•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Ⅱ. 근대 종교운동
  • 5. 천도교
  • 1) 천도교의 성립

1) 천도교의 성립

동학농민군의 갑오년 봉기가 실패로 끝난 뒤 동학교단은 全琫準을 비롯하여 대다수의 지도자들이 체포·처형되었으며, 봉기에 적극 참여했던 일반 교도들도 수십만 명이 희생되었다. 특히 동학농민군 봉기의 중심 기반이 되었던 전라도·충청도·경상도 등 이른바 三南지방의 동학조직은 거의 와해되고 말았다.

그뿐 아니라 갑오년 봉기의 와중에서 가까스로 살아 남은 崔時亨을 비롯한 소수의 지도자와 일부 교도들은 관변측과 향촌사회로부터 더욱 가혹한 지목과 탄압에 직면했다. 예를 들면 동학농민전쟁이 거의 종결된 1894년 12월 전라감영에서는<伍家統節目>과<鄕約章程>을 발하여 동학을 향촌사회에서 완전히 추방하려고 하는 정책을 펼쳤다.309)申榮祐,<甲午農民戰爭 以後 嶺南 北西部 兩班支配層의 農民統制策>(≪忠北史學≫ 5, 충북대, 1992) 참조. 이러한 가혹한 탄압이 가해지는 가운데 최시형은 강원도 산간을 전전하면서 피난생활을 계속했다. 따라서 삼남지방에 일부 잔존하고 있던 동학지도자 및 교도들과의 연락체계도 거의 두절되었으며 극히 일부의 지도자들이 최시형과 연락을 취하며 교단조직의 재건을 시도하긴 했으나 이 같은 시도도 사실상 성공하기 어려웠다.

한편 참담한 패배로 귀결된 갑오년 봉기에 대한 동학교단 내부에서의 책임문제는 심각한 양상을 드러내고 있었다. 즉 가까스로 살아 남은 동학지도자들 사이에서는 갑오년에 이르기까지의 교단의 지도노선에 대한 비판과 반성의 분위기가 강해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일부 지도자와 교도들은 동학교단을 이탈하는 현상도 적지 않게 일어나고 있었다. 시기는 비교적 뒤늦기는 하지만 1893년(고종 30)의 敎祖伸寃運動과 1894년 동학농민전쟁 당시에 유력한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던 徐璋玉이 1896년 12월 최시형에게 편지를 보내 “佛道를 숭상하라”310)東學農民戰爭百周年紀念事業推進委員會 編,<昌山后人曺錫憲歷史>(≪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0, 1996), 192∼193쪽.고 했다고 한다. 서장옥의 편지 내용은 여러 측면에서 검토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주목되는 것은 갑오년 봉기 이후 동학교단을 둘러싼 분화현상의 하나로 볼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도 여전히 道統의 정통을 대변하는 최시형이 체포되는 1898년(광무 2)까지는 급격히 대두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봉기 실패로 인한 책임문제는 있었을지라도, 최시형이 지니고 있던 도통의 정통성을 거역할 만큼의 힘을 가진 지도자가 부재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동학교단의 분화현상이 노골화되는 계기가 된 것은 1898년 최시형의 체포·처형이었다. 최시형은 갑오년 봉기 후 극소수의 지도자 및 교도들의 도움을 받아 가며 강원도 산간지대에 은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관변측과 향촌사회의 동학 탄압은 가혹하기 그지 없었으며 특히 동학교단의 최고 지도자 최시형에 대한 지목은 해가 갈수록 격화되어 갔다. 이 같은 상황 아래에서 1898년 1월에는 최시형의 측근 金洛喆이 경기도 여주에서 체포되었으며,311)東學農民戰爭百周年紀念事業推進委員會,<金洛喆歷史>(위의 책 7, 1996), 292∼293쪽. 이 때 가까스로 체포를 면했던 최시형도 마침내 동년 5월 24일(음력 4월 5일) 강원도 원주 송골에서 체포되기에 이르렀다.312)東學農民戰爭百周年紀念事業推進委員會, 위의 글, 299쪽. 서울로 압송된 최시형은 7월 18일 고등재판소의 사형 판결을 받아 7월 20일 교수형에 처해졌다.313)東學農民戰爭百周年紀念事業推進委員會,<東學關聯判決宣告書>(앞의 책 18, 1996), 523∼534쪽. 뿐만 아니라 1900년에는 최시형의 3대 제자였던 孫天民과 金演局이 잇따라 체포되었고, 갑오년 봉기 이후에도 살아 남았던 서장옥마저 1900년 9월경에 체포되어 그 달 20일에 손천민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고 처형되었다.314)東學農民戰爭百周年紀念事業推進委員會, 위의 글, 567∼568쪽. 이로써 동학교단은 거의 전면적인 와해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1898년의 최시형의 체포·처형 그리고 1900년의 손천민·서장옥의 체포·처형 및 김연국의 체포 등으로 사실상 동학교단의 최고 지도자가 된 孫秉熙는 관변측의 감시와 탄압 아래에서 교단 재건을 위한 일련의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사료에 의하면 그는 최시형이 체포·처형당하던 시기를 전후하여 서울로 올라와 동학사상에 공감하는 일부 민중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몇몇 개화파 인사들과 접촉하여 문명개화의 공기를 들이마셨던 것으로 확인된다. 즉 후일 3·1독립운동의 33인 ‘민족대표’의 한 사람이 되는 黙庵 李鍾一은 1898년 1월 손병희와 서울에서 대면하고 있다.315)<黙庵備忘錄>(≪韓國思想≫16, 1978), 273쪽. 이종일은 손병희에게 민권운동을 펼칠 것을 설득하였지만, 오히려 그는 손병희와의 교제를 거듭해 가는 가운데 손병희의 감화를 받아 1899년에 동학에 입교하고 있다.316)위의 글, 279·338쪽. 1899년에 손병희가 지었다고 알려져 있는≪覺世眞經≫·≪授受明實錄≫·≪道訣≫등의 저작은 손병희와 개화파 인사와의 교류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317)이들 저작에 나타나는 사상적 특징에 대해서는 후술한다.

개화파 인사와의 교류를 통해 문명개화에 대한 일정한 인식을 가질 수 있었던 손병희는 마침내 근대문명 섭취를 위한 외유의 길을 떠나게 된다. 즉 그는 1901년 미국으로 외유의 길을 떠나려고 했으나 그것이 여의치 않게 되자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1901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간 손병희는 동년 9월 일시 귀국하여 국내 동학지도자를 평안도지방으로 파견하여 교도들을 격려하도록 한 뒤 1902년 3월에 다시 鄭廣朝 등 유학생 24명을 이끌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손병희의 일본생활은 도중 반년 정도의 일시 귀국기간(1901년 10월∼1902년 3월)을 제외하고 1906년 1월 말까지 계속되었다. 일본에서 그는 李祥憲이라는 가명을 쓰면서 朴泳孝·吳世昌·權東鎭 등 망명 개화파 인사들과 교제를 맺고,318)李敦化,≪天道敎創建史≫(京城, 1933), 28쪽. 동학의 장래에 대한 전망을 모색하였다. 이 시기의 손병희는 근대문명 수용을 통한 이른바 근대적인 동학교단 체제정비를 깊이 연구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근대적인 동학교단 체제구상은 1902년 국내의 교도를 대상으로 쓰여진≪三戰論≫에 잘 나타나 있다. 즉≪삼전론≫에서 손병희는 道戰·財戰·言戰을 통한 문명개화의 방도를 제시함으로써 동학교단의 근대적 체제구상의 일단을 개진하고 있다.319)<三戰論>(≪天道敎創建史≫, 1933), 82∼86쪽.

그러나 손병희에 의한 동학교단의 근대적 체제구상이 정비되어 가는 상황 아래에서도 관변측의 동학 탄압은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손병희는 동학교단의 근대적 체제정비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체제측으로부터의 공인이 필요하며 이 공인을 위하여 일대 전기를 마련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1902년 2월 국내에 있는 李容九에게 보낸 ‘敬通’에서 손병희는 천하의 대세가 三戰에 있다고 강조하고 특히 언전편에서는 “외교적 담판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러·일 양세력의 각축 속에서 우리 나라가 어느 편이 승전할 것인가의 국제정세를 잘 살펴 예견하는 외교적 자립책을 강구”320)申一澈,<천도교의 민족운동>(≪동학사상의 이해≫, 사회비평사, 1995), 174쪽.하고 있다. 손병희는 러·일간의 전쟁위기가 목전에 다가오고 있음을 주시하고 국내 교도들에게 한국과 일본이 공동 출병하여 한국도 전승국의 지위를 차지하도록 해야 함을 설득하는 한편 일본 육군당국과도 비밀리에 접촉을 시도하였다.≪천도교창건사≫에 의하면 손병희는 당시 일본 육군참모본부차장인 타무라 이요조(田村怡與造, 1854∼1903)를 만나 동학교도를 상인으로 가장시켜 한국에 상륙하는 일본군을 돕게 하고 동학교도와 일본군이 연합하여 친러파정권을 타도하자는 제안을 하였다.321)李敦化, 앞의 책, 32∼33쪽. 그러나 이 제안은 참모본부차장 타무라의 급작스런 사망으로 인해 수포로 돌아갔다고 한다.322)≪大日本人名辭書≫(增訂 11版, 東京, 1937). 손병희의 이러한 제안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 당시의 반일투쟁과는 정반대로 가는 것이었다. 여기에 종래의 동학교단과 손병희가 지도하는 1900년대 동학과의 노선 차이가 존재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1898년 최시형의 체포·처형 이후 손병희에 의해 지도되는 동학교단은 이른바 문명개화의 근대주의 노선을 수용하는 대신 종래의 반일투쟁 노선에서 친일 연합노선 쪽으로 한 걸음 내딛게 되었던 것이다.

손병희의 친일노선은 타무라에 대한 제안이 수포로 돌아간 뒤에도 계속되었다. 즉 그는 1904년 2월 러·일이 개전하자 자신의 성의를 표시하기 위해 일본 육군성에 10,000엔을 기증하였으며, 또 일본과 협력하기 위한 토대를 만들기 위해 러·일 개전 직후 일본에 있던 동학 간부 40명 정도를 동경의 처소로 소집하여 民會 개설운동을 전개하도록 지시하였다.323)李敦化, 앞의 책, 43쪽. 이 같은 손병희의 지시에 따라 국내의 동학지도자들은 먼저 1904년 4월 大同會를 조직하였으나 정부에 의해 강제 해산당하였다. 이에 9월에 다시 대동회를 이은 中立會를 설립했으나 친일 또는 친러단체로 오해되어 그것은 다시 進步會로 개칭되었다.

진보회는 손병희의 심복이라고도 할 수 있는 李容九에 의해 지도되고 있었는데 진보회는 ① 황실을 존중하고 독립 기초를 공고히 할 것, ② 정부를 개선할 것, ③ 군정 및 재정을 정비할 것 등 입헌군주제를 일단 인정하면서 독립국가의 보전, 근대적인 조정개혁을 선언하고 160,000명의 동학교도들이 일제히 단발을 단행하게 했다.324)천도교에서는 이를 甲辰革新運動 또는 甲辰開化運動이라 하여 그 역사적 의미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동학농민전쟁 당시의 반일노선에서 친일노선으로의 변화라는 측면도 있기 때문에 재검토되어야 할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된다.

동학교도의 단발은 진보회가 개화주의임과 동시에 반일단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었다.325)趙景達,<大韓帝國期の東學>(≪異端の民衆反亂≫, 東京;岩波書店, 1998), 364쪽. 이것은 당시 일본군부를 배경으로 一進會를 조직한 宋秉畯과 진보회를 사실상 이끌고 있던 이용구와의 결합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즉 단발을 단행하여 개화주의와 반일이 아님을 증명해 보인 진보회를 본 송병준은 진보회와의 합동을 결심하고 이후 줄곧 진보회를 옹호하는 활동을 펼치게 된다.326)위와 같음. 송병준 등의 지원을 받은 진보회는 스스로 자신들은 옛날의 동학도가 아니라 개명한 단체이므로 각지에서 체포당하고 있는 동학도들은 당연히 석방되어야 한다는 운동을 펼쳤다. 진보회와 일진회는 1904년 12월에 합동하여 합동일진회로 개칭된 이후 공공연한 친일 정치활동을 펼쳐가게 된다.

진보회와 합동한 일진회는 이후 일본이 군용으로 필요로 하고 있던 京義線 부설공사와 한국의 북방으로의 군수물자 수송에 전면적인 협력을 하는 한편, 러시아군에 대한 첩보수집 활동에도 종사하였다. 특히 서울과 신의주를 있는 경의선 부설공사의 경우 일진회는 평안도·황해도의 동학도를 대동원하여 지원을 자청하였다고 한다.327)鄭在貞,<大韓帝國期 鐵道建設勞動者의 動員과 沿線住民의 抵抗運動>(≪韓國史硏究≫73, 1991), 88∼93쪽. 사상자가 나올 정도로 위험한 공사였지만 일진회원들은 사료에 의하면 ‘自費助役’할 정도로 헌신적인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이 같은 일본에 대한 협력은 원래 일본에 체류하고 있던 손병희의 지시에 의한 것으로 진보회 설립단계로부터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 대한 보호국화가 결정된 1905년 11월 17일의 이른바 ‘乙巳保護條約’체결 직전인 11월 5일 일진회가 ‘일진회 회장 이용구’의 명의로 일본의 보호를 요청하는 성명서를 발표함으로써 여론이 反一進會를 외치게 되자 일본에 머물고 있던 손병희는 깊은 위기감을 갖게 되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00년대의 손병희는 종래의 동학지도자들과는 달리 이른바 ‘친일 연합노선’논자였지만,328)1900년대 손병희의 ‘친일노선’에 대해서는 검토의 여지가 있다는 점은 앞에서 이미 지적한 바 있다. 한편 1900년 손병희의 노선을 ‘連日獨立’으로(申一澈, 앞의 책, 176쪽) 보는 경우와 또 다른 경우는 ‘일본과의 동맹론자’(趙景達, 앞의 책, 365쪽)라는 표현을 통해 1900년대 손병희의 ‘친일노선’을 지적하고 있다.≪천도교창건사≫에 의하면 당시 한국의 독립을 실질적으로 포기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이용구 등의 보호국론에 대해서는 반대했다고 한다.329)李敦化, 앞의 책, 53쪽. 또한 그는 무엇보다도 동학의 정치적 분신인 일진회에 대한 비판이 동학교단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는 것을 가장 염려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용구의 행위에 위기의식을 느낀 손병희는 이용구를 불러 보호독립의 허구성을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호령했다고 한다.

보호를 받으면 독립이 아니오 독립을 하면 보호가 불필요할 텐데 보호독립이란 말이 성립된단 말인가(≪天道敎創建史≫3編 7章, 甲辰革新運動 참조).

또한 손병희는 1905년 12월 천도교의 탄생을 고하는 광고를 당시 일간지에 게재하여 동학에 대한 일반 인심의 일신을 도모하게 하였다. 그리고 다음해 1월 일본으로부터 귀국하여 교단 정비에 착수하였다. 즉 1906년 2월에는≪天道敎大憲≫을 공포하여 동학을 근대적 체제를 갖춘 종교로 정비하고 친일 매국단체로 전락한 일진회의 이용구 등에게는 政敎分離를 내세워 친일 정치활동을 중단하고 천도교의 종교운동에 귀의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용구 등은 손병희의 요구를 거절하고 친일 정치활동을 계속해 갔다. 천도교가 출범하게 되는 초기의 복잡한 내부 사정은 다음과 같은 吳知泳의 지적에 잘 나타나 있다.

천도교 중앙총부 안에는 내지(일본)로부터 선생(손병희)과 같이 나온 오세창·권동진·양한묵 등 일파와 일진회 골자인 이용구·송병준 일파와 비개화파인 김연국 일파가 한 곳에 섞여 있어 외면으로는 비록 번번한 듯하나 그 내막에 있어서는 雍齒格으로 仇讎와 같이 되어 있었던 터이다(≪吳知泳,<東學史>,≪東學思想資料集≫2, 亞細亞文化社, 1979, 555쪽).

이른바 吳越同舟의 상황이었다. 손병희는 마침내 1906년 9월 17일 이용구와 송병준에 대해 일진회를 탈퇴하라는 통첩을 내려 최후의 설득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것이 거부될 것으로 판단한 손병희는 이용구를 비롯한 일진회원 62명의 黜敎처분을 내렸다. 이 같은 손병희의 용단은 천도교로 하여금 인적·재정적 고립에 직면하게 만들었으나 친일단체라고 여론의 강한 비판을 받고 있던 일진회로부터 천도교를 분리해 내는 데 성공하게 만들었으며, 이후 일진회 등과는 일정한 거리를 둔 독자적인 노선을 걷는 기반이 되게 하였다.

한편 손병희로부터 출교처분을 당한 이용구 등은 같은 해 12월 새로이 侍天敎를 창립하는 한편 일진회 활동도 계속해 간다. 뿐만 아니라 인적·재정적으로 고립된 손병희가 이끄는 천도교에 대해 와해공작마저 시도하였다330)崔琉鉉,<侍天敎歷史>(≪東學思想資料集≫3, 1979), 172∼174쪽.고 한다. 그러나 손병희는 그에 굴하지 않고 천도교의 근대화와 그 재건을 위해 적극적인 활동을 펼쳐 갔다. 우선 그는 1906년부터 천도교의 기본의례에 해당하는 五款 즉 ① 呪文, ② 淸水, ③ 侍日, ④ 祈禱, ⑤ 誠米 등의 5대 의례를 제정하고 교도들에게 그것을 성실히 지킬 것을 선언하였으며, 그 때까지도 표준화가 되지 않고 있던 종래의 제사의례를 개혁하여 제단에 오직 청수 한 그릇만 차리는 방향으로 간소화하였다. 또한 1907년 4월에는 천도교의 部區總會를 개최하여 천도교 재정의 유지방안을 논의하였다. 이 때 오지영이 제안한 ‘성미의 납부’ 즉 교도 1인당 식사 때마다 쌀 한 숟갈씩을 거두는 방안이 채택되어 대대적인 ‘성미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근대적인 교리해설서 출판을 위해 천도교 산하에 普文館이라는 인쇄소를 설치하여 1907년부터 천도교 ‘中央總部發刊’이라는 간기가 인쇄된≪東經演義≫·≪大宗正義≫등을 비롯한 다수의 근대적 교리서를 인쇄·보급하였다. 1908년에는 제1차 교리강습회를 개최하여 천도교의 중견 지도자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이상과 같이 근대적 의례의 제정, 성미운동의 전개, 근대적 교리서의 보급 및 교리강습회를 통한 중견 지도자의 양성 등으로 천도교는 그간의 인적·재정적 고립이라는 위기를 극복하고 근대적 체제를 갖춘 종교로서의 확립에 성공하게 된다. 그러나 종래의 동학에서 근대적 종교로 확립을 본 천도교는 종래 동학사상 속에서 강하게 표출되고 있었던 ‘輔國安民’이라는 민족주의적 성격이 점차 약화되어 간다331)趙景達, 앞의 책, 372쪽.는 문제점을 떠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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