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Ⅱ. 근대 종교운동
  • 5. 천도교
  • 2) 천도교의 중심사상

2) 천도교의 중심사상

먼저 천도교사상의 유래와 연원을 말한다면 두말할 나위도 없이 1860년에 창도된 동학사상을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동학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실패로 돌아간 뒤 사실상 여러 갈래로 분화되어 천도교만이 동학사상을 계승했다고 볼 수는 없다.

여기서 1894년의 봉기 실패 이후 분파화된 동학의 여러 갈래를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갑오년 봉기에서 강하게 드러나고 있었던 반봉건·반외세투쟁을 계속해 가는 세력을 들 수 있다. 예를 들면 제2차 동학농민전쟁 때부터 나타나는 의병, 갑오년 이후의 英學黨·活貧黨에 의한 투쟁, 1910년 이후 만주지방의 독립군 등에 편입되어 활동하는 동학세력 등을 들 수 있다. 둘째 갑오년의 반봉건·반외세의 이념을 완전히 저버린 채 급격히 체제내화하거나 일면 개화를 표방하여 친일화하는 세력이다. 여기에는 동학 교도를 탄압하는 관료로 진출하거나 침략자 일제의 앞잡이로 변신한 일진회 및 시천교 등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갑오년 봉기의 중심 무대였던 전라도지역의 경우 그 대부분이 일진회 또는 시천교의 세력권으로 전화되어 간다는 점이다. 셋째 1894년 동학농민전쟁은 ‘반봉건적임과 동시에 반자본주의적·반식민지주의적이며 반근대적 변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332)趙景達,<甲午農民戰爭指導者 全琫準의 硏究>(≪朝鮮史叢≫7, 1983), 71∼72쪽. 종래 동학이 표방했던 반근대적 노선을 버리고 일본을 통한 근대문명을 수용하여 종래의 동학교단을 크게 쇄신하려고 한 세력을 들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손병희를 중심으로 한 망명 개화파 인사들이 이끄는 천도교이다. 넷째 갑오년 봉기의 실패는 동학교단의 지나친 현실참여 내지는 정치참여에 있다고 비판하고 1894년 이후 철저하게 종교적 수도주의, 은둔, 현실 불간섭을 표방하여 순수한 종교운동에만 전념하는 세력이다. 여기에는 경상북도 尙州를 비롯, 충청남도 鷄龍山 등을 근거지로 삼아 활동하는 敬天敎·靑林敎·東學敎·上帝敎 등의 동학계 신종교들이 있다. 시천교 창립 초기에 일시 가담했던 김연국의 경우에는 1920년경에는 수도은둔주의를 내걸고 계룡산으로 들어가 상제교를 창립하여 활동한다. 다섯째 동학과는 완전 결별하여 새로운 종교운동에 나서거나 다른 종교로 개종하는 세력을 들 수 있다. 새 종교운동의 대표적 사례로는 1901년에 창립되는 姜一淳의 甑山敎, 1916년에 전라남도 영광에서 창립되는 朴重彬의 圓佛敎 등을 꼽을 수 있으며, 다른 종교로 개종하는 사례로는 가톨릭으로의 개종(황해도의 경우가 대표적이다)을 들 수 있다.

이상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천도교는 갑오년 봉기 이후 여러 갈래로 분화되는 동학의 한 갈래로 이해함이 타당할 것이다. 따라서 종래 1860년에 성립을 본 동학과, 1905년에 성립을 본 천도교를 동일선상에 두어 이해하려는 견해는333)예를 들면 姜在彦은 1969년에<東學=天道敎의 思想的 性格>(≪思想≫537, 東京;岩波書店, 1969년 3월호)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동학과 천도교를 동일 선상에 두는 견해를 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갑오년 봉기 이후 여러 갈래로 나뉘어진 동학의 분화현상에 대해 적절하게 고려하지 못한 데서 온 결과로 생각된다. 수정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렇다면 천도교와 동학사상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양자의 차이는 천도교를 성립시키는 손병희의 갑오년 직후부터 1905년까지의 행적, 그리고 해당 시기의 천도교의 교리서에 대한 분석을 통해 규명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앞에서도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1898년 7월에 최시형이 체포되어 처형되는 시기를 전후하여 손병희는 서울로 올라와 이종일을 비롯한 문명개화적 인사들과 접촉하였다.334)앞의 주 7)과 같음. 이 같은 사실로 미루어 손병희는 1898년경부터 이미 동학사상에 근대문명을 결합시키고자 하는 생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1901년 손병희의 일본으로의 외유는 표면적으로는 관변측의 탄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의도였다고 하더라도 그보다 더욱 중요했던 의도는 ‘근대문명 섭취를 위한 외유’335)趙景達, 앞의 책, 363쪽.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겠다. 일본에서의 외유기간 동안 손병희는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박영효·오세창·권동진·양한묵 등 망명 개화파 인사들과 교유하며 근대문명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켜 갔던 것이다.

손병희의 근대문명에 대한 이해는 드디어 1902년에 이르러≪삼전론≫이라는 저술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이 삼전론은 물론 종래 동학의 天道사상에 그 근간을 두고 있는 것이었지만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근대문명에 대한 이해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삼전론≫의 구성은 먼저 서언에 이어, 道戰·財戰·言戰으로 이어지고, 마지막에 결어로 되어 있다. 우선 손병희는 서언에서 천도의 근본원리는 불멸이지만 시세의 변화에 의해 다스리는 방법은 변한다(治異道同 時異規同也)라고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또 도전·재전·언전 즉 사상전·경제전·외교전의 세 가지를 들면서 새로운 정세에 대응하는 동학사상의 문명개화적 방도를 제시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동학이 근대적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사실을 재빠르게 선언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었다”336)위와 같음.고 하는 평가가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주목할 만한 내용은 동학이 지니고 있었던 민족주의적 성격에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즉≪삼전론≫에서 손병희는 제국주의가 각축하는 시대에 대외적으로는 천도의 원리를 固持하여 국제간의 분쟁을 병력이 아니라 담판에 의해서 해결해야 한다고 지적하였고, 대내적으로는 신사회를 향한 구태의 탈피를 위해서 필요한 기본적인 권력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人和之策’으로써 국교의 확립을 기본과제로 제기하는 등 근대문명과 동학사상을 일체화시키고 있다. 그 결과 동학이 본래 지니고 있었던 ‘輔國安民’이라는 민족주의적 성격은 점차 약화되어 갔던 것으로 생각된다.

≪삼전론≫외에 손병희의 저작으로 알려지고 있는≪覺世眞經≫(1899)·≪授受明實錄≫(1899)·≪道訣≫(1899)·≪明理傳≫(1903)·≪大宗正義≫(1905) 등에는 초기 천도교의 天觀이 드러나고 있어 주목되고 있다.337)이들 저작이 손병희 개인의 저작인지에 대해서는 검토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이들 저작이 손병희 개인의 저작이 아니라 할지라도 초기 천도교사상을 살피는데 있어서는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된다. 예를 들어 종래 동학교조 최제우가 제시했던 ‘侍天主’의 관념은 초기 천도교 교리서 속에 어떻게 반영되어 있을까. 1899년에 지었다고 알려진≪각세진경≫에서는 ‘시천주’대신 단지 ‘侍天’이라고만 기록되어 ‘主’자가 탈락하고 있다. 본래 동학에서 말하는 ‘시천주’의 ‘주’는 하늘(天)에 대한 존칭을 뜻하는 것인데 천도교에 들어와 탈락되고 있는 것이다.

또 이 ‘시천주’와 관련된 표현이 초기 천도교 교리서에 자주 등장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수수명실록≫및≪도결≫등에 있어서는 ‘人是天人’이란 표현이 보이고 있으며, 이 표현은 또한 1903년에 지었다고 하는≪명리전≫에도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1905년경에 지어진 것으로 생각되는≪대종정의≫에서는 그 유명한 ‘人乃天’이란 표현이 등장하고 있다.

요약하면 동학의 ‘시천주’가 천도교 초기에 들어와 ‘주’자가 탈락된 ‘人以侍天’이란 표현으로 나타나고, 그것이 다시 ‘人是天人’이란 표현으로, 그리고 마침내 1905년경에는 ‘인내천’이란 표현으로 정리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왜 천도교에서는 종래 동학의 ‘시천주’에서 굳이 ‘주’를 탈락시키고 ‘시천’이라고만 했을까. ‘시천’은 하느님(天主)이 아니라 하늘(天)을 모시는 것으로 이것은 하느님의 의지적 성격을 부정하려는 의식적인 의도였다고 한다.338)崔東熙,<韓國 東學 및 天道敎史>(≪韓國文化史大系≫Ⅵ, 高麗大 民族文化硏究所, 1970), 767쪽. 다시 말하면 ‘시천’에서 말하는 천, 즉 하늘은 만물의 생성을 설명하는 원리 또는 원소를 뜻한다. 그러므로 존경의 대상일 수 없고 따라서 존칭을 뜻하는 님(主)을 붙일 필요가 없게 된다339)崔東熙, 위의 글, 767쪽.는 것이다.

다음으로 ‘인내천’이란 천도교의 宗旨에 대해 부언하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인내천’은 조선 민중사상의 도달점이며 평등사상을 가장 간명하게 선언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천도교 초기 저작에는 오히려 性理學(朱子學)의 방향340)崔東熙, 위의 글, 770쪽.이 농후하다고 지적하면서 그 표현이 지나치게 철학화되고 있을 뿐341)崔東熙, 위의 글, 771쪽.이라고 설명하는 견해가 있다. 뿐만 아니라 “인내천이란 있는 그대로의 인간에게 전일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었으며,”342)趙景達, 앞의 책, 369쪽. 오히려 “최시형이 범신론적 천관의 통속적 전개에 의해 한 걸음 진전시킨 愚民觀의 극복이 오히려 후퇴하고 있다”343)위와 같음.고 하는 비판적 견해도 있다. 위의 두 견해는 반드시 정당하다고 볼 수 없을지라도 종래 동학에서 강조되어 온 인격적 天觀의 측면이 천도교에 들어와 후퇴하는 가운데 하늘(天)의 철학적·원리적 측면이 강조되는 ‘인내천’으로 정리되었다는 점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끝으로 천도교사상과 관련하여 지적해 두고자 하는 것은 普文館이라는 근대적 인쇄시설에 대해서이다. 천도교 직할 인쇄소이기도 한 보문관은 1907년 이후 집중적으로 천도교의 교리해설서344)1900년대 집중적으로 간행되는 천도교의 교리서에 대해서는 崔起榮과 필자가 공동 편집한 다음의 자료집이 참고가 된다.
崔起榮·朴孟洙 編,≪韓末 天道敎資料集≫상·하(國學資料院, 1997).
를 간행하고 있다. 그리고 1910년 8월에 창간호가 나온≪天道敎會月報≫에 관해서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보문관판 천도교 교리서들은 이미 지적했듯이 ‘中央總部發刊’이라는 이름으로 나왔다.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만한 교리서는 1907년에 나온≪東經演義≫가 아닐까 생각된다. 이것은 芝江 梁漢黙의 집필로서 동학의 기본경전인≪東經大全≫을 근대주의의 입장에서 체계적으로 해석한 저술이다. 이것은 천도교 초기사상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특히 종래 동학사상과의 비교검토를 하는데 있어서도 참고하지 않으면 안되는 교리서로 볼 수 있다.≪천도교회월보≫는 1910년에 천도교의 기관지로서 창간되었기 때문에 천도교 초기의 교리에 관한 기사가 풍부하여 초기 천도교사상연구에 없어서는 안될 자료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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