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Ⅱ. 근대 종교운동
  • 5. 천도교
  • 3) 천도교의 민족운동
  • (1) 제1단계 천도교의 민족운동

(1) 제1단계 천도교의 민족운동

먼저 제1단계인 1905년부터 1919년 3·1독립운동 직전까지 천도교가 펼쳐 온 민족운동을 교육운동·출판문화운동·3·1독립운동의 기반조성운동 등으로 삼대별하여 고찰한다.

천도교의 초대 교주였던 손병희는 1907년에 교주의 지위를 朴寅浩에게 물려주고 교육·출판문화운동의 전면에 나섰다. 그는 우선 인재양성을 위해 한말에 李容翊이 설립했던 普成學校·普成中學校·普成法律商業學校(이것은 뒤에 보성전문학교로 개칭된다. 현재의 高麗大學校의 전신) 등을 인계받아 경영했다. 보성중학교 교장 崔麟과 보성전문학교 교장 尹益善 등은 모두 손병희가 육성한 인재였다. 보성전문학교의 경우를 보면, 교주인 李鍾浩가 新民會에 참여하여 운동의 간부로서 해외독립기지 건설을 위해 안창호와 더불어 망명하자 당시 보성전문의 학감 윤익선은 손병희의 도움과 천도교로부터 나온 재원으로 학교를 경영할 수 있었다.345)申一澈,<천도교의 민족운동>(≪동학사상의 이해≫, 사회비평사, 1995), 180쪽. 손병희는 1909년에는 同德女學校(현 동덕여자대학교)를 설립했으며, 지방인 全州에 昌東學校, 서울에 宗學院 등을 설립하여 교육운동을 펼쳤다.

손병희는 또 1905년에 이미 근대적 인쇄시설을 갖춘 보문관을 설립하여 천도교사상을 해설한 근대적 교리서를 간행했으며, 그의 지도로 천도교인이 된 이종일·오세창 등을 시켜 1906년에≪萬歲報≫를 창간하도록 함으로써 출판을 통한 애국계몽운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한말의 유명한 언론인이자 대표적인 신소설 작가로 알려진 李人稙은≪만세보≫의 주필로 활동하였을 뿐 아니라<血의 淚>라고 하는 신소설을 발표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근대 한국 최초의 신소설로 평가되고 있다.

한편 손병희는 1907년 4월 5일에 천도교 부구총회를 소집하여 천도교의 재정자립책을 논의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전라북도 益山敎區의 오지영이 제안한 교인 1인당 매 식사 때마다 쌀 한 숟갈씩 거두는 방안이 채택되어 이른바 천도교의 대대적인 ‘誠米運動’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성미운동’에 의해 축적된 천도교의 재정은 교단의 조직이 정비되고 교도수가 증가함에 따라 그 규모가 크게 팽창하였다. 예를 들면, 1919년 3·1독립운동 직전에는 100만 신도들이 낸 성미를 통해 조성한 자금이 100만원의 거금이 되었다고 전한다.346)위와 같음. 이 때 조성된 자금은 3·1독립운동의 거사자금뿐만 아니라 기독교 쪽에도 거사자금으로 제공되었다.

손병희가 전개한 운동의 또 다른 측면은 제1·2차 교리강습회를 통한 지방의 중견지도자 양성 그리고 大敎區制 도입을 통한 천도교 조직의 정비를 들 수 있다. 교리강습회는 1908년에 제1차가 1912년에는 제2차가 개최되었으며, 제2차의 강습회 때에는 500명에 이르는 지방의 중견지도자들이 참가했다고 한다.347)위와 같음.

손병희는 또한 교단조직 정비에도 눈을 돌려 1910년 4월에는 천도교 간부 74인을 한 자리에 불러 共同傳授心法式을 거행하였다. 이 공동전수심법식은 교단의 도통을 교도들에게 공동전수하는 과감한 대중화의 길을 여는 것이었으며 1914년에는 ‘衆議制’를 채택하여 종래의 비민주적이며 권위적인 교주제를 폐지하게 하였다. 또한 같은 해 7월에는 전국에 대교구제를 시행하니 전국은 37개 대교구, 185교구에 달했으며 北間島·西邊지역의 교구를 합치면 194교구를 넘었다고 한다.348)申一澈, 위의 글, 182쪽.
韓㳓劤,≪韓國通史≫(平木實 譯, 東京;學生社, 1976), 552쪽.

이상과 같이 1905년 이후 손병희를 중심으로 한 천도교는 근대적 교단체제를 갖추어 나가는 한편으로 교육운동·출판문화운동·3·1독립운동을 위한 인재양성, 재정기반의 확충, 교단조직의 정비를 성공적으로 이룩하였다. 그 결과 종래 동학교리 속에 혼재되어 있던 민간신앙적 요소는 제거되고 합리화되어 천도교의 宗旨는 人乃天으로 정리되었다. 사회개벽을 내세워 현실주의적 색채를 선명히 했으며 그 구체적 슬로건이 輔國安民·布德天下·廣濟蒼生·地上天國 건설로 요약할 수 있다.

‘성미’운동을 통한 재정난의 해소, 교구체 시행을 통한 전국적인 조직망의 정비 등이 성공적으로 추진되었다. 이와 같은 조직적 에너지를 기반으로 삼아 천도교는 1919년 3·1독립운동에 대대적으로 참가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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