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Ⅱ. 근대 종교운동
  • 5. 천도교
  • 3) 천도교의 민족운동
  • (2) 제2단계 천도교의 민족운동

(2) 제2단계 천도교의 민족운동

천도교 민족운동의 제2단계인 1919년 3·1독립운동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과 함께 동학·천도교의 민족운동사상 그 정점을 이루는 운동이었다.

3·1독립운동에 있어서 천도교측의 역할을 분석·검토해 보기로 한다. 주지하듯이 1919년 3·1독립운동은 3월 1일 오후 2시, 이른바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29인의 대표가 서울의 조선요리점 泰(太)華館에 모여 獨立宣言書를 발표한 것을 계기로 촉발되었다. 당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을 종교별로 구분해 보면 천도교인 15인, 기독교 15인, 불교 2인, 기타 1인이다. 이들 가운데 천도교인 15인의 주요 직력 및 경력을 분석해 보면 다음의<표 1>과 같다.349)姜德相,<3·1運動における民族代表と朝鮮人民>(≪思想≫537, 東京;岩波書店, 1969년 3월호), 336쪽.

이 름 직     력 정  치  력
孫秉熙 천도교 제3세 교주
보성학원, 문종, 종학, 교남, 동덕, 일신,
보창, 명신, 양덕, 창동 각 학교 설립경영
동학농민전쟁(이하 동학)참가,
보국안민 3책제창
梁漢黙 탁지부 주사, 능주세무관, 보성전문, 동덕
여학교 경영
동학참가, 진보회조직, 헌정연구회
조직, 자강회참가, 이재명사건관여
朴準承 임실 천도교 접주, 수접주, 대교구장, 순
유위원, 지주
동학참가350)姜德相이 작성한 표에는 없지만 필자가 보충하였다.
崔 麟 함남관찰부 집사, 외사부 주사 활빈당가입, 일심회가입, 신민회
가입, 보호조약반대 구금처분
李鍾勳   동학참가, 갑진혁신운동, 계몽운동
참가, 이완용가방화사건 관여
金完圭 여수통신 주사, 한성부 주사, 봉도법암장  
洪基兆 천도교 황해·평안양도 수접주 동학참가, 창의대령 갑진혁신운동
참가
李鍾一 대한황성신문 사장, 정삼품 의관, 천도교
월보 과장
성수망세불경사건 관여
吳世昌 박문국 주사, 한성순보 기자, 군국기무소
비서관, 농상공부 참의, 우정국 통신국장,
만세보, 대한민보 사장, 대한협회 부회장,
광성학교 부교장
 
權秉悳 천도교 대접주, 시천교 종무장, 금융관장,
보문관장
동학참가
權東鎭 함안군수, 육군장교 임오군란참가, 개화당입당, 혁신운
동참가, 동학참가
羅龍煥   동학참가
羅仁協   동학참가
林禮煥   동학참가
洪秉基   동학참가

<표 1>천도교인 경력표

위의<표 1>에 의하면 15인의 천도교인 가운데 11인이 1894년의 동학농민전쟁에 참가하여 반봉건·반외세투쟁을 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동학농민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던 4인 즉 최린·김완규·이종일·오세창의 경우를 보면, 활빈당·헌정연구회·자강회·대한협회·신민회 등 1900년대 활발히 전개되었던 애국계몽운동에 적극 참여한 경력을 가진 인물들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3·1독립운동을 적극 주도하는 천도교인들은 동학농민전쟁 및 애국계몽운동·의병전쟁의 투쟁이념 및 그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이 1894년 동학농민전쟁 및 애국계몽운동·의병전쟁 투쟁이념을 계승하고자 했던 천도교인들은 3·1독립운동을 어떻게 준비해 왔는가. 그 구체적 준비 및 실행과정을 천도교측의 동향을 중심으로 고찰해 보기로 한다.

1910년대 말 세계적인 추세가 되고 있던 민족자결 및 독립운동의 고양을 계기로 국내외 민족운동가들은 그것을 조선독립의 절호의 기회로 받아들이고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개시하게 된다.

국내에서는 1918년 11월경에 미국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론 제창과 관련된 신문보도를 접한 천도교의 중견 간부 權東鎭·吳世昌·李鍾一·崔麟 등이 중심이 되어 그 해 12월에 이르러 민족자결에 관한 의견을 나누었다. 그들은 이 모임에서 조선의 ‘自治’운동을 개시하기 위해 다음해 봄 동경으로 갈 것을 결정했다. 그 뒤 1919년 1월에 이르러 권동진 등은 국외 동포들의 독립운동 소식과 宋繼白(당시 일본 早稻田大學 학생이었다)을 통해 재일유학생들의 독립운동계획을 접하고 그것과 보조를 함께 하기 위해 당초의 ‘자치’운동을 독립운동으로 전환할 것을 결정하였다. 1월 말에서 2월 초경에는 최린을 중심으로 宋鎭禹(중앙학교교장), 玄相允(중앙학교교사), 崔南善(역사가) 등이 모여 독립운동 실행계획을 토의·결정했다. 그 내용은 ① 동지를 모을 것, ② 독립선언서를 작성·발표할 것, ③ 일본정부 및 일본의 귀족원과 중의원·조선총독에게 의견서를 제출할 것, ④ 미국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청원서를 보낼 것 등이었다.351)市川正明 編,≪3·1獨立運動≫1(東京;原書房, 1983), 116∼117쪽, 216쪽.

2월 초순경부터 그들은 독립운동계획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준비 행동에 들어갔다. 즉 선언서의 기초는 최남선이 담당하며 선언서를 ‘민족대표’의 이름으로 발표하기 위해 대한제국시대에 고관을 지냈던 朴泳孝·尹用求·韓圭卨·金允植·尹致昊·宋秉畯 등을 포섭 대상으로 역할을 분담하고 교섭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들은 독립운동계획에 협조해 줄 것을 요청하는 천도교 인사들의 제안을 모조리 거절했다. 이에 천도교측 인사들은 2월 8일경 기독교측과 제휴하기 위한 접촉을 시도하였다. 이 무렵 평양의 장로교파 기독교도들 사이에서도 독립운동계획이 독자적으로 검토되고 있었는데 천도교측의 호소에 따라 五山學校長 李昇薰이 교섭에 나섰다. 그 뒤에 여러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서울의 기독교도(감리교파)도 참여를 결정하여 2월 24일 천도교와 기독교의 연합이 결정되었으며,352)이 때 기독교측의 거사자금을 천도교측에서 제공했다고 한다. 기독교측의 참여가 결정되자 불교측도 그 연합에 참여하여 3교연합이 성립되었다.

2월 25일에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하는 ‘민족대표’에 대한 심사가 있었으며 선언서의 발표를 3월 1일 서울의 탑골공원에서 할 것, 그리고 선언서를 서울 및 각 지방에 배포할 것 등이 결정되었다. 27일에는 천도교가 경영하고 있던 普成社 인쇄소에서 21,000매의 선언서가 인쇄되었으며, 28일부터 3월 초에 걸쳐 천도교를 비롯한 기독교 조직, 학생들을 통해 서울과 각 지방에 비밀리에 배포되었다. 이들 천도교측·기독교측·학생측에 의해 각지에 배포된 독립선언서는 지방에서의 독립만세 시위운동의 기폭제가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353)天道敎는 당시 37개의 대교구 아래 북간도를 포함하여 지방에 194개의 교구를 거느리고 있었다. 이들 지방교구가 중심이 된 지방의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대한 실증적 연구는 금후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3월 1일 오후 2시 독립선언서는 33인의 민족대표 가운데 29인이 참석한 가운데 본래 선언서가 발표될 예정이었던 탑골공원이 아닌 조선요리점 태화관에서 발표되었고, 선언서를 발표한 직후 민족대표들은 즉각 자수하였다. 그러나 민족대표들의 이 같은 애매모호한 투쟁에도 불구하고,354)민족대표들의 애매모호한 투쟁방식에 대해서는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엄격한 비판이 있어 왔다. 대표적인 비판으로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姜德相, 앞의 글.
康成銀,<3·1運動における民族代表の活動に關する一考察>(≪朝鮮學報≫130, 朝鮮學會, 1989년).
탑골공원에 모인 학생 및 일반 민중에 의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은 높이 고양되어 갔으며, 그 열기는 이윽고 각 지방에까지 파급되었다. 각 지방에서 전개되는 3·1독립만세 시위운동은 특히 지방의 천도교·기독교조직 및 서울에서 파견된 학생들에 의해 지도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면, 전라북도 임실의 경우 천도교 임실교구가 임실지방의 만세시위운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하였으며,355)≪天道敎任實敎史≫(프린트본, 1980). 임실과 이웃한 남원에서도 천도교 남원교구장 柳泰洪 등이 남원지방 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356)崔炳鉉,≪天道敎南原郡宗理院史≫(筆寫本, 1924). 이상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천도교는 1905년 성립 직후부터 손병희의 지도 아래 근대적인 종교로 재정비되었으며, 그 같은 재정비과정에서 교육·문화·출판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고, 교구조직을 정비하여 3·1독립운동의 전개 기반을 확립하였다.

또한 1919년 3·1독립운동에서 그 구체적인 전개 방법상으로 적지 않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지만, 천도교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방교구 중심의 만세시위운동도 활발히 전개되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3·1독립운동에 있어 천도교의 역할을 과소평가 할 수는 없을 것이다.

<朴孟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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