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Ⅱ. 근대 종교운동
  • 6. 대종교
  • 1) 대종교의 창립과 의의

1) 대종교의 창립과 의의

일본제국주의가 한국을 반식민지화하자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항일투쟁이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그것은 크게 두 조류로 나누어 흐름을 살펴볼 수 있는데, 하나는 衛正斥邪사상에 바탕을 둔 의병계열이고, 다른 하나는 개화사상에 바탕을 두었던 애국계몽운동계열이다.

일제는 청일·노일전쟁이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한국의 자주독립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전쟁을 합리화하면서 이들 전쟁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노일전쟁의 결과 일제는 대륙침략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을 반식민지화하였고 이에 대항하여 羅喆동지 일행은 대일민간외교와 을사오적 암살시도로써 일제의 침략을 막는데 전력을 경주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나철 일행은 일개 민간외교나 몇 명의 매국노 저격으로는 일제의 침략을 방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방략을 전환하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 가운데 국권회복을 위한 정신사적 첩경의 방략이 무엇이겠는가의 고민 속에서 한민족 전체의 힘으로 일제의 침략을 방어하는 데는 어디까지나 국조 단군을 구심점으로 새로운 민족종교를 창시하여 거족적인 대일항쟁을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점에서 단군을 대황조로 하는 민족고유의 종교를 창업한 것이 바로 1909년 단군교(뒤의 대종교)의 重光이었다. 민족종교의 원류는 단군조선으로부터 계승되어 부여에서 代天敎, 신라에서 崇天敎, 고구려에서 敬天敎, 발해에서 眞倧敎, 고려에서는 王儉敎로 전해졌다. 그런데 몽고의 침략으로 고려 元宗 때에 민족종교가 단절되었다고 생각한 나철 등이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한국 고유의 민족종교를 중광시켜려고 하였다. 물론 단군교는 종교로 정립되었지만, 이는 강렬한 항일투쟁을 목표로 한 항일비밀결사단체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곧 국권회복을 위해 檀君敎를 창립, 항일민족독립운동단체를 성립시켰던 것이다. 나철이 교조가 되었는 바 그는 문장이 뛰어났으며, 또한 인격을 갗춘 항일열에 불타는 항일구국운동의 화신이었다. 따라서 구관료양반·항일지사·열사·애국청년들이 단군교에 입교하였다.

그러나 단군교를 1년 만에 大倧敎로 개칭하고, 국내에서의 항일투쟁에 한계성을 느껴 대종교의 總本司를 국내로부터 만주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각지에 교단조직을 추진하여 포교활동과 동시에 민족교육을 전개하였고, 그 바탕 위에 항일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하여 독립전쟁과 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

일찍이 나철과 吳基鎬 등은 일제의 한국에 대한 식민지화정책을 저지하기 위해 여러 차례 渡日하여 일제와의 민간외교 교섭을 추진하였으나 실패를 거듭하였다. 이에 차선의 실천방법으로 일제에 국권을 팔았던 을사오적을 저격하였으나 이것마저 실패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한민족의 단합만이 일제의 침략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단군교를 창립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성격을 띤 대종교의 활동은 일제의 무단통치하에서 유지될 수 없었으므로 대종교의 지사가 1911년 백두산에 설치되었다. 이어서 1914년에는 대종교의 총본사를 만주로 이전하였으며 국내의 남도본사는 1915년에 조선총독부에 의해 불법화되었다. 이는 대종교가 민족종교인 동시에 항일독립운동단체의 성격이 있었다는 것을 여실히 입증한다고 하겠다.

1916년 나철교조가 사망하고, 1917년 제2세 교주로 金敎獻이 취임하여 종리와 종사를 체계화하고≪神檀民史≫등의 저술로 민족주의사관을 정립하였다. 그는 1917년에 대종교의 총본사가 있는 만주로 부임하여 교단조직과 포교활동에 전념하고, 또한 민족의식의 고취에도 이바지하였다. 만주방면에서 대종교의 교단조직에 따르는 시교당 설치는 바로 항일독립운동의 거점 설치나 다름없었으며, 포교활동은 바로 항일운동인 동시에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는 운동으로서 항일독립운동의 측면지원운동인 것이었다.

대종교는 일제 식민지하에서는 종교적 측면보다는 항일독립운동의 측면에서 더욱 돋보인 것이 사실이다. 대종교의 바탕 위에, 즉 대종교 신자를 기반으로 한 재만한인사회가 항일투쟁의 기반이 되었고, 대종교 4종사 중의 1인인 서일종사는 1911년 이후 중광단·정의단·군정부·북로군정서·대한독립군단의 단장과 총재로 추대되어 독립전쟁을 수행하였다. 서일총재의 자결 후에는 김좌진장군을 비롯한 대종교 간부에 의하여 신민부·한족총연합회·재만무정부주의자동맹 등으로 맥락이 계승되면서 대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한편 대종교는 종교적인 면에서도 항일투쟁과 동시에 종립학교와 시교당 설치를 통하여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재만한인사회에 고취시켰으며 아울러 그러한 바탕 위에 서일과 김좌진을 중심한 대종교 간부에 의한 항일독립운동과 독립전쟁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면에서 대종교의 중광은 구국항일독립운동단체의 성격을 띤 가장 뚜렷한 민족종교라고 할 수 있으며, 정신사로서 주체적인 민족주의사관을 정립하는 데에도 크게 공헌하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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