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Ⅱ. 근대 종교운동
  • 6. 대종교
  • 2) 대종교의 교단조직과 포교활동
  • (2) 제2세 교주 김교헌시기의 교단조직과 포교활동

(2) 제2세 교주 김교헌시기의 교단조직과 포교활동

대종교의 총본사는 1914년 만주로 이전하였지만, 교조 나철이나 핵심 간부인 김교헌·오기호·유근 등은 이동하지 않았다. 그러나 1915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으로부터 대종교가 불법화되어 대종교에 대한 탄압이 심화되고, 1916년에는 나철교조가 사망하자 이에 지역을 옮겨 본래의 목적인 항일구국독립운동을 적극 추진하였다.

제2세 교주 金敎獻이 만주로 망명하여 포교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미 만주에는 지사가 설치되어 있고 또한 대종교 총본사도 이전되어 있었다. 그러나 대종교의 활동은 아직 미미한 상태였다. 이와 같이 종리연구와 교사편찬에 전력을 경주하는 한편 敎政처리와 교무수행에 노력하고 포교활동에 힘쓰던 중, 1920년 일본군의 만주출병으로 많은 대종교인들이 희생되었다. 이에 김교헌은 화룡·寧安·密山 등지를 전전하며 대책에 부심하면서도 포교활동에 전념하였다.

제2세 교주 김교헌은 동지들과 함께 포교활동에 노력하여 46개소의 시교당을 설치하였다.372)朴永錫,≪韓民族獨立運動史硏究≫(一潮閣, 1982), 165∼166쪽. 시교당을 지역별로 보면, 만주지역이 34개소, 한국지역이 6개소, 노령지역이 3개소, 중국본토가 3개소로 되어 있다. 시교당의 수가 확대되면서부터 이의 관리를 위한 여러 규정들이 만들어졌다. 즉 敎區分理·敎區分理條例·施敎堂分屬發佈案·誠金관리와, 誠捐모금·성금관리에 관한 倧諭文·誠捐募集文·蘇扶稧認施, 徐一에 의한 墓柵建立·육영사업과 청년운동·敎史저술과 교적간행이 제정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대종교의 敎德의 증가와 시교당의 확대에 따른 관리를 할 수 있게 되었다.373)大倧敎倧經倧史編纂委員會,<茂園宗師의 佈敎>(앞의 책), 334∼356쪽.

1922년 倧經會에서≪신고강의≫·≪신리대전≫·≪회삼경≫·≪신사기≫·≪조천기≫·≪신단민사≫·≪신가집≫등 7종의 교적을 등사·간행하고 이어서 施敎會에서 성금을 모아 敎經을 인쇄·간행하였다. 또한 이듬해인 1923년에 와서는 종경회에서 倧理問答·重訂神歌集·增刪倧禮抄略·國漢文三一神誥·神理大全 등을 검정한 후, 시교회에서≪國文懸吐神誥講義≫·≪신리대전≫·≪신사기≫·≪국한문신단민사≫·≪배달족강역형세도≫등을 간행하였다. 이러한 간행 활동은 포교활동의 활성화와 교세확장에 이바지하였다. 이 중에서도 김교헌의≪신단민사≫와 李源臺의≪배달족강역형세도≫는 대종교인뿐 아니라 당시 항일독립운동자를 양성했던 사관학교 학생들에게까지 민족사의 교재로 이용되어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하였다.374)大倧敎倧經倧史編纂委員會,<敎史著述과 敎籍刊行>(위의 책), 353∼354쪽.

김교헌교주는 渡滿 이후에도 계속해서 종리와 교사편찬 및 포교활동에 노력함으로써 시교당의 수를 확대시켰으며, 종리·교사의 연구, 시교당의 확대를 통해 항일독립운동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종리와 교사의 연구는 항일독립운동과 민족의식을 고취시켰고, 시교당 설치는 바로 항일독립운동의 교육장인 동시에 항일독립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김교헌 재임기간 동안 일본군의 만주출병이 있었으나 이에 대응하여 독립전쟁과 항일독립운동에서 많은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대종교를 중심으로, 특히 김교헌교주에 의한 노력으로 교단조직과 포교활동이 이루어진 데 힘입은 바가 컸다고 할 수 있다.

일본군의 만주출병으로 재만한국인의 희생도 또한 컸다(琿春大事件). 그 가운데 대종교의 지도급 인사들의 희생도 많았는데 1921년에 徐一이, 1922년에는 申圭植이 사망하였다. 김교헌은 이들의 희생에 크게 상심하던 중 1923년 11월 寧安縣에서 사망하고 말았다.375)大倧敎倧經倧史編纂委員會,<茂園宗師의 朝天>(위의 책), 362∼365쪽. 그는 죽음에 앞서 尹世復을 제3세 교주로 지명하였다.

1910년에 경남 密陽에서 상경한 윤세복은 교조 나철을 만나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그 후 1911년 가산을 정리하여 만주의 桓仁縣에서 東昌學校를 설립하고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러던 중 일제가 중국관헌을 사주함으로써 동창학교가 폐쇄되자 그는 撫松縣으로 가서 전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대종교의 시교당 설치에 헌신하면서 興業團 등에 관여하여 독립운동에도 이바지하였다.376)大倧敎倧經倧史編纂委員會,<奉敎와 入滿活動>(위의 책), 393∼394쪽.

윤세복이 나철교조를 만난 것은 1910년 12월의 일로 기간은 3일에 불과했다. 제2세 교주인 김교헌도 나철교조와 함께 윤세복을 한 번 만났으나 그와 대담한 적은 없었다. 서일은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제2세 교주로부터 후계자로 임명된 것은 평소 그가 대종교에 대한 신앙심이 깊었고 동창학교를 운영하여 민족교육에도 힘쓰고 또한 항일독립정신과 위인됨이 뛰어나다는 것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특히 학문과 종교적 신앙심, 그리고 가계를 통해 볼 때 당대에 명망 높았던 제2세 교주의 지명을 받았다는 사실은 윤세복의 탁월함을 그대로 입증하는 것이라 하겠다.377)大倧敎倧經倧史編纂委員會,<靈骸奉藏>(위의 책), 395∼3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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