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Ⅱ. 근대 종교운동
  • 6. 대종교
  • 3) 대종교의 항일민족독립운동

3) 대종교의 항일민족독립운동

대종교는 중광된 시점부터 항일구국투쟁의 성격을 띠었다. 대종교의 교단조직과 포교활동, 그리고 민족교육 자체가 항일민족독립운동의 일환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대종교계 항일독립운동단체의 독립군이 직접 독립전쟁이나 항일민족독립운동을 수행한 것만을 서술 대상으로 했으며, 이러한 항일독립군과 독립운동단체를 만들 수 있게 한 대종교계의 민족학교 또는 무관학교도 포함시키기로 하겠다. 그리고 항일독립운동단체 또는 독립군의 발족과 재편과정에서의 맥락, 그 속의 인맥과 항일선상에 있어서의 방략과 전략·전술문제, 지리적 문제(관할) 등에 유의하여 서술하려고 한다.

북간도·북만지역과 서간도·全滿지역으로 대별해 고찰하려고 한다. 우선 북간도 및 북만지역에는 興業團·軍備團·重光團·正義團·軍政府·北路軍政署·新民府·韓族總聯合會·在滿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과 明東學校·東昌學校 등으로 맥락을 이어 볼 수 있다. 서간도와 전만지역에서는 신민회의 맥락을 이어서 新興講習所·西路軍政署·大韓統義府·義烈團·光復團·歸一黨·正義府로 맥락을 이을 수 있다. 그러나 인맥과 재편과정에서 체계적으로 그 계열이 그대로 계승된 것은 아니고 다수의 이탈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먼저 북간도와 북만지역을 중심으로 보면, 중광단·정의단·군정부·북로군정서(일명 대한군정서)·신민부·한족총연합회·재만조선인무정부주의자연맹으로 맥락이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대맥을 계승하는 가운데 군소 항일독립운동단체(대종교계)가 가입 이탈하는 것을 포합시켜 재편성과정에서 나타나는 대종교계열의 인맥과 대종교의 교리에 바탕을 둔 항일독립운동의 이념 등을 추구하면서 전개한 항일민족독립운동의 성과를 구명해 보고자 한다.

대종교계에서 가장 먼저 항일독립운동단체로서 발족한 것은 중광단이라고 할 수 있다. 중광단은 국내에서 의병전쟁을 전개하다가, 1910년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자 그 한계성을 느끼고 두만강을 건너 독립전쟁을 기도한 구한국 군인출신들로 구성된 조직이었다. 이들을 규합하여 중광단을 조직한 중심인물은 서일이다. 서일은 함북 慶源郡 출신으로 일찍이 咸一師範學校를 졸업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명동학교를 설립, 항일민족교육에 투신하였다. 그러던 중 대종교가 만주로 이전한 후에 대종교에 입교하여 施敎師·東一道本司 典理·總本司 典講을 역임하고≪5大宗旨講演≫·≪圖解≫·≪神誥講義≫·≪眞理圖說≫·≪會三經≫등을 저술하였다. 그는 명동학교에서의 재만 한국청소년들의 민족교육과 대종교의 포교활동에 기여하고 아울러 대종교의 종리연구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또한 그 바탕 위에서 조직적인 항일독립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망명한 의병을 중심한 대종교인으로 독립군단을 조직하였다. 단장에 선임된 서일은 중광단의 소재지를 길림성 汪淸縣으로 하였다. 서일은 단원들에게 대종교의 교리와 항일민족독립운동에 대한 의식을 고취시켰다. 그는 무기의 미비로 직접적인 군사행동을 취하지는 못하였지만 그 대신 군사학을 강조하였다.378)金厚卿·申載洪,<徐一先生>(≪大韓民國獨立運動功勳史≫, 韓國民族運動硏究所), 576∼577쪽.
蔡根植,<北路軍政署>(≪武裝獨立運動秘史≫, 大韓民國 公報處, 1949), 78∼79쪽.

서일은 일찍이 신학인 함일사범학교에서 수학할 당시 동북아시아 정세의 급변과 외세의 침략을 간파하여 교육으로서 구국해야겠다는 애국계몽운둥을 전개하였다. 1910년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자 그는 만주로 망명, 일단 구국교육에 투신하였다. 애국교육을 위한 민족교육과 아울러 민족종교가 필요하다고 생각할 즈음, 대종교가 만주로 이전하자, 그는 대종교에 귀의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애국교육과 민족종교인 대종교만으로는 목적한 바를 달성할 수 없다고 여기고, 독립전쟁만이 일제를 한국으로부터 구축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선견지명을 가지고 망명의병을 바탕으로 망명대종교와 구국교육을 기반으로 하는 강력한 항일독립운동단체인 중광단을 조직하게 된 것이다.379)金厚卿·申載洪 위와 같음.
愛國同志援護會,<北路軍政署>(≪韓國獨立運動史≫), 309∼310쪽.

1918년에 만주·노령 유지일동이란 명의로 戊午獨立宣言書가 발표되었다. 이는 대종교의 제2세 교주인 김교헌 외 38명의 이름으로 발표되었다.380)李鉉淙 편저,<戊午獨立宣言書(1918)>(≪近代民族意識의 脈絡≫, 亞細亞文化社, 1979), 175쪽. 이 무오독립선언서는 3·1운동의 도화선이 된 2·8독립선언서보다도 앞서는 것으로 항일독립운동의 책원지였던 북간도지역에서 선구적으로 발표되었다는 사실에 큰 의의가 있다.

1910년 일제에 의해 한국이 강점되자 애국계몽운동을 추진하던 항일투사나 의병전쟁을 전개하던 의병, 그리고 애국지사들의 대다수가 망명한 곳은 만주와 노령지역이었다. 특히 북간도는 해외 망명지역 중에서 가장 항일의식이 높았으며 국내 진격작전도 많았던 지역이었다. 1911년에 대종교의 지사가 이 곳으로 이전하고 뒤이어 1914년에 대종교의 총본사마저 이 곳으로 이전함으로써 대종교는 이 지역에서 민족종교로서 항일독립운동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민족학교의 설립과 교육, 그리고 대종교를 바탕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중광단이 창립되었고, 여기에 대종교 시교당이 설치되어 포교활동이 전개됨으로써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구국독립운동의 방략으로 대종교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 중광단이 1918년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한 것이다. 무오독립선언서는 대종교의 제2세 교주인 金敎獻이 작성하였다고도 하며, 한편으로는 趙素昻이 지었다는 설도 있다.381)三均學會 編,≪素昻先生文集≫하(횃불사, 1979), 157쪽. 구국항일을 위하여 대종교에 투신한 김교헌은≪神檀民史≫와≪神檀實記≫를 저술한 대사학자이고, 대종교의 종리를 연구하여 체계화시킨 위인이었다.

무오독립선언서의 서명자에는 대종교의 중진인 김교헌을 비롯하여 3세 교주 윤세복과 金東三·申圭植·朴殷植·朴贊翊·金佐鎭·李始榮·李相龍·申采浩·李東寧 등이 있다. 만주·노령지역 이외에서는 李承晩·安昌浩 등이 명단에 들어 있다. 만주·노령지역 이외에까지 항일독립운동에 명성을 크게 떨친 명사를 포함시킨 것으로 보아, 대종교가 중심이 되어 진행된 항일독립운동은 만주·노령지역의 독립운동세력뿐만 아니라 거족적 차원에서 전개하였던 것이라고 하겠다.

무오독립선언서에 담겨 있는 항일민족독립운동의 방략 등은 종래 나철교조가 대일민간외교에서 주장한 동양평화론 등과는 달리 민족종교의 바탕 위에서 항일민족의식을 고취시켜 조국을 광복하고 말겠다는 굳은 결심과 결단코 殺身成仁으로 독립전쟁에서 민족의 자주독립을 쟁취하겠다는 것을 강하게 투영하고 있다.

무오독립선언은 곧 重光團宣言書로 대종교 간부가 중심이 되어 움직였지만 이 선언은 당시 항일독립운동의 策源地에서 발표된 한민족 전체의 대일항쟁선언이요,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무오독립선언이 기폭제가 되어 敵都에서 동경유학생에 의한 2·8독립선언이 나왔고, 국내에서는 3·1독립선언이 거국적으로 일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북간도에는 기독교계의 북간도국민회와 大韓正義軍政司·義軍府·光復團·義民團·野團·軍備團·太極團·大震團 등 독립운동단체가 많이 있었다. 3·1운동 직후인 3월 25일 중광단이 정의단으로 재편성되었는데, 대종교인인 徐一·桂和·蔡五·梁玄 등이 주축을 이루었다. 중광단과 마찬가지로 정의단도 무력항쟁을 투쟁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무기가 없었기 때문에 군사훈련만 계속하던 차에 국내에서 광복단 사건으로 3년간 옥고를 치르고, 1917년 만주로 망명한 金佐鎭장군을 맞이하게 되었다. 중광단·정의단에서 군사면에 역점을 두었던 서일단장을 비롯한 간부진이 김좌진장군과 함께 항일방략에 대해 고심하던 상황에서, 마침 국내에서의 3·1운동의 여파로 항일의식이 고조되어 만주로 망명하는 청년들의 수가 많아졌다. 또한 무기도 구입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정의단은 더욱 확장되어 항일운동단체와 독립군으로서의 면모를 갖출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382)崔衡宇,<正義團과 北路軍政署>(≪海外朝鮮革命運動小史≫, 東方文化社, 1945), 57∼60쪽.
蔡根植, 앞의 글, 78∼79쪽.

북간도는 훈춘·화룡·연길·왕청 등 4현을 주로 지칭하는데 초기 대종교인이 거주한 곳은 바로 이 지역이었다. 이 곳의 대종교인을 기반으로 항일민족독립운동을 지도한 것이 중광단·정의단이었다. 여기에서 3·1운동 이후 항일무장독립운동을 총지도한 것은 대종교인 가운데 徐一과 羅仲昭였다. 정의단은 김좌진장군을 맞이하였으며, 3·1운동 후 망명해 온 혁명가와 애국청년들이 수가 늘어나 민족의식이 더욱 고조되었다. 이에 대종교인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항일독립운동단체의 성격을 벗어나 1919년 8월 7일에 정의단을 군정부로 개편하였다. 군정부는 항일독립운동단체 가운데 가장 강력한 무장독립군을 보유한 단체였다. 동시에 행정부를 겸비한 명실상부한 군정부였다. 그 소재지는 汪淸縣 十里坪이고 행정구역은 왕청현을 중심으로 북간도 전지역을 대상으로 하였다. 중심인물은 徐一·玄天黙·金佐鎭·金奎植·李章寧·李範奭383)獨立運動史編纂委員會,<北路軍政署의 成立>(≪獨立運動史 5, 獨立軍 戰鬪史(상)≫, 獨立有功者事業基金運用委員會, 1973), 363∼364쪽. 등이었는데, 이들의 인물구성을 살펴보면 대종교의 4倧師의 한 사람이었던 서일, 대종교의 핵심간부와 의병출신인 김규식, 舊韓國軍將校 중에서도 명성이 높았던 김좌진장군을 위시한 曺成煥, 그리고 중국 講武堂(中國士官學校) 출신인 동시에 서간도의 新興武官學校 교관을 지낸 李範奭과 李章寧·金燦洙·洪忠憙 등이었다.

특히 일제가 한국을 강점한 직후 장차 조국광복을 위하여 新興講習所가 설립됨으로써 해외 망명지도자들의 군사이론이 크게 발전하였다. 이 신흥무관학교에서 민족의식과 항일의식 그리고 민족주체사관을 정립한 유능한 독립군 지도자들이 북간도의 군정부로 이동하여 독립전쟁에 임하게 되었다. 이렇듯 대종교를 신봉하는 재만한인들의 바탕 위에 강력한 군정부가 수립되어 역사적인 사명을 완수할 준비단계에 이르게 된 것이다.

대종교의 4종사인 서일과 김좌진장군이 주도한 군정부는 다른 독립운동단체가 생각하지 못하였던 재민한인사회를 기반으로 행정구역을 획정하고, 하나의 군사정부를 수립하였던 것이다. 군정부가 수립되자 이를 바탕으로 항일독립운동을 추진하면서 군사훈련, 무기구입, 재만한인사회의 권익옹호, 대중교섭, 대일항쟁에 대한 방략 구상에 진력하였다. 그러던 중 1919년 4월 3·1운동의 결과로 한국과 해외에 각기 수립되었던 망명임시정부, 즉 漢城政府·露領政府 등 많은 단체들이 효과적인 항일태세를 갖추기 위해 상해에 새로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탄생시켰다. 3·1운동 이후 민족의식이 크게 고조된 가운데 小我를 버리고 대국적 견지에서 망명정부가 둘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주창되었는데, 이것은 항일세력의 힘을 하나로 결집시켜 효과적인 항일독립투쟁을 추진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발맞추어 왕청현에 만들어졌던 군정부도 1919년 12월 북로군정서로 개편되었다. 이러한 개편으로 비록 명칭은 개칭되었으나 사실상 재만한인사회의 조직이나 군정부 자체에는 조직의 재개편에 불과할 뿐 근본적인 변화는 없었다.

북로군정서의 소재지는 왕청현 春明鄕이며 조직부서는 총재 서일, 총사령관 김좌진, 참모장 이장녕 등이었고,384)愛國同志援護會,<北路軍政署>(앞의 책), 309∼310쪽. 군정서 구성원의 대다수는 대종교인으로서 강한 민족주의자들이었다. 署員은 1,600∼1,700명으로 노령으로부터 구입한 무기로 무장되었으며, 속성사관학교를 설치하여 강훈련을 통해 정예의 독립군을 배출하였다.385)慶北警察局,≪高等警察要史≫(1929?, 1967년 영인본), 113쪽. 소장에는 김좌진장군이었고, 교관은 주로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이었던 이장녕·이범석·김규식 등이었다. 이들 북로군정서는 재만한인사회의 행정과 노령으로부터의 계속적인 무기 구입·보충(특히 체코제의 기관총 등), 그리고 단기 속성사관학교의 군사훈련과 계속적인 국내로부터의 망명청년의 증가에 따른 독립군의 보충으로 날이 갈수록 강력해졌다.386)金正明,<大韓軍政署司令部日誌送付の件>(≪朝鮮獨立運動 Ⅲ-民族主義運動編≫, 東京;原書房, 1968), 967∼978쪽.

이와 더불어 북로군정서의 지도층과 구성원의 의식에도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중국 동북지역은 장작림의 동북군벌이 지배·통치하고 있었으나 이지역의 지배층과 대지주들은 거의가 한족이며 민족주의의 성향이 짙은 편이었다. 이 곳에 자리하고 있는 북로군정서의 지도층이나 구성원은 의병과 관료출신, 구한말 군인, 학자 등 다양하였다. 이들 대다수는 외세로부터 조국을 광복해야 하겠다는 민족의식이 강렬한 인사들이었다. 그러나 상당한 인원이 복벽적 민족주의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시 중국의 국가체제는 종래의 전제군주체제에서 공화체제로 전환하였고, 세계적인 사조도 공화정체로 변하였다. 1919년 4월에 탄생한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도 국체를 공화제로 선언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공화정체가 선포되자 군정부도 1919년 12월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로 들어갔다. 이에 북로군정서로 명칭을 변경함으로써 공화제를 따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북로군정서의 지도층이나 구성원 전체가 공화적 민주주의자가 된 것은 아니고, 그 가운데 일부는 복벽적 민족주의자로 잔류한 자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로군정서의 대다수는 대종교인이었으며 북로군정서의 속성사관학교의 국사교재도 김교헌이 저술한≪신단민사≫로 교수한 것으로 보아 민족주체사상의 고취와 민족사관의 정립, 그리고 시대적인 흐름에서 공화적 민주주의로의 의식의 변화를 가져와 민족군대의 성격을 지닌 강력한 군정부와 독립군이 이룩되었다고 하겠다.387)李達淳,≪韓國政治史 Ⅱ 韓國獨立運動의 政治史的 硏究≫, 中央大 出版局, 1979, 221∼230쪽 참고.
金永珍(1920년 滿洲 密山에 居住:大倧敎幹部 金永肅과 再從間임)과 필자와의 대담(1982년 9월 20일 청계천 3가 효창빌딩 205호 사무실). 김영진 자신이 직접≪신단민사≫를 김교헌 제2세 교주에게 사사하였다고 하고 그 당시 들은 바에 의하면 재만독립운동자는 물론이고 북로군정서 속성사관학교 등 대종교인 재만교육기관에서 교재로서 사용되었다고 증언.

<朴永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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