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Ⅲ. 근대 과학기술
  • 1. 서양과학에 대한 인식
  • 1) 수학

1) 수학

지금 우리는 과학 앞에 수학을 먼저 다루는 수가 많지만, 근대 서양과학 지식이 이 땅에 들어오기 시작할 때에는 수학에 대한 관심은 극히 낮았다. 아니 거의 수학은 관심 밖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수학이란 전통사회에서의 算術과 근본적으로 달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일부 선각자들은 일찍부터 북경에 들어온 서양수학에서 감동을 어느 정도 받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홍대용도≪籌解需用≫이란 수학책을 썼고, 또 서양 학문의 특징을 수학적 정확성에서 보았다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최한기는≪習算津筏≫이란 수학책을 남기고 있다. 특히 그는 인재를 등용하는 데 수학을 참고하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390)金容雲,≪한국수학사≫(과학과 인간사, 1977), 219쪽. 특히 기하학은 동양 사람들에게는 더욱 신기한 분야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 초의 李圭景이 그의<幾何原本>에 대한 긴 글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것은 마음을 다스리는 좋은 약(治心之良藥)과도 같이 평가되기도 했다.391)李圭景,≪五洲衍文長箋散稿≫권 15, 幾何原本辨證說(東國文化社 영인본, 1959).

그런 가운데 1876년 개국이 있었고, 그에 이어 일본에 몇 차례 수신사가 파견되었으며, 1881년에는 중국에 영선사행이, 그리고 일본에는 신사유람단이 파견되어 근대 서양문명의 진수를 경험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들은 상당히 기술 발달에 눈을 크게 뜨고 감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중국에 갔던 기술유학생이나 일본에 갔던 유람단 어느 쪽에서도 수학에 특히 관심을 갖게 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80년대에 나온≪한성순보≫같은 대중매체 역시 수학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결국 근대수학의 도입은 정식으로 학교교육이 시작되면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1886년 시작된 최초의 근대식 공립학교라 할 수 있는 育英公院에서는 매일 공부해야 할 과목의 하나로 算學을 들고 있는데, 당시 서양선교사들이 처음 와서 가르친 수학이 어느 수준의 것이었던지 확실하지 않다. 우선 교재도 없었을 것이고, 전혀 서양 근대수학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 없었을 터이기 때문이다.392)이광린,<育英公院의 設置와 그 變遷>(≪韓國開化史硏究≫, 一潮閣, 1974 개정), 103∼133쪽.

하기는 최초의 근대식 학교로 인정되는 元山學舍에서도 개교한 1883년부터 수학은 가르쳐졌다고 기록은 전한다. 근대식 학교라면 당연히 근대식 수학도 가르쳐야한다는 인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886년에 문을 연 이화학당의 초기 교과목에도 산수는 들어 있다. 여기서 가르친 과목으로는 영어·인문·창가·역사·영어·문법·글쓰기·산술 등이 나열되었음을 보아 알 수 있다. 그러나 1880년대의 조선 신식 학교가 어떤 정도의 수학을 어떻게 가르쳤는지 지금 알 수는 없다. 당시 발행된 대중적 매체인≪한성순보≫와≪한성주보≫에는 과학에 관한 높은 관심은 잘 나타나, 많은 과학기술에 관한 기사를 볼 수 있지만, 수학에 관한 관심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수학은 상당히 기술적인 분야라고 여겨져 대중 상대로 일반적 지식을 전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때문이라 생각된다.

결국 수학은 학교교육이라는 제도권 교육을 통해서만 근대화 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학교교육의 근대화는 90년대에 들어가서야 본격화한다. 1895년 4월 한성사범학교 관제가 공포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7월에는 소학교령이 나오는 등 각급학교가 정식으로 설립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이들 여러 학교에는 모두 근대식 수학교육을 의무화했다. 일본은 1872년부터 서양식 수학(洋算)을 공식적으로 채택했지만, 조선왕조는 1895년에서야 이런 조치가 취해진 셈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한성사범의 경우 주간 수업시간은 30시간인데, 그 가운데 수학 수업에 몇 퍼센트를 할애했던가. 규정에 의하면 한 주일의 수업시간 34∼35시간 가운데 4∼5시간이라고 되어 있다. 수업시간의 10분의 1 정도를 수학교육에 할애한 것이 된다.393)김용운,<韓國數學史>(≪韓國現代文化史大系≫Ⅲ 科學技術史, 高麗大 民族文化硏究所, 1977), 77쪽. 수학을 제대로 공부하고 교사가 되는 일이 아직 없을 때였기 때문에, 학교교육에서조차 수학 수준은 극히 낮았을 것은 물론이다.

1895년의 學部令은 수학교육의 목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算術은 日用計算에 習熟하게 하고 겸하야 사상을 정밀케 하고 또한 생업상에 유익한 지식을 여함을 요旨로 함―이런 목표 아래 가르치는 내용으로는 그리 크지 않은 자리수의 加減乘除를 중심으로 한다고 밝혀져 있다. 아울러 소수와 분수도 교육한다고 되어 있으며, 이를 가르치는 데에는 필산과 주산을 함께 가르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으로 수학교육의 내용에 도량형, 화폐, 시각의 계산을 가르치는 것으로 밝혀져 있다. 당시의 시대적 요청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된다.394)金貞欽,<韓國科學敎育史>(≪韓國現代文化史大系≫Ⅲ 科學技術史, 高麗大 民族文化硏究所, 1977), 32쪽.

그러나 아직 이런 근대식 교육제도가 확립될 수 있는 배경을 갖추지 못한 조선왕조에서는 이런 규정을 급히 일본의 그것을 옮겨 놓기만 한 것으로 드러났다. 실제로 이런 방향의 교육이 보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00년대로 들어가서부터의 일이었다. 1896년 학부에서 펴낸≪簡易四則問題集≫이후 가장 일찍 출간된 근대식 수학교재로는 1900년의 것을 대표로 들 수 있다.

≪精選算學≫(1900)은 당시 일본에서 사용되고 있던 수학책 가운데 중요한 것을 골라 편찬한 것이라고 밝혀져 있다. 국한문 세로쓰기지만 算式만은 아라비아숫자로 가로쓰기로 나타낸 것이 당시로서는 대단한 개혁일 듯하다.≪算術新書≫(1900)는 더욱 가로쓰기를 확대하여 수식과 그 수식이 포함된 문장도 가로쓰기로 하되, 큰 줄기는 여전히 세로쓰기로 하고 있다. 일본의 우에노 키요시(上野淸, 1854∼1924)의≪近世算術≫의 번역으로 광무 4년 7월 19일 學部 편집국장 李圭桓의 서문이 들어 있다. 이에 의하면 學士 李相卨이 우에노의 책을 옮겨 만든 책임자라고 밝혀져 있다. 그런데 이규환의 서문은 순 한문이다. 원서가 된 책의 원래 이름은≪普通敎育近世算術≫(1888)이고, 지은이는 당시 일본의 민간 수학자로 많은 책을 남겼다.

이보다 1년 뒤인 1901년의≪新訂算術≫(1901)은 1895년의 소학교령에 의하여 엮어진 尋常科用의 교과서로 각 학년 1권씩이다. 당시 조선의 사정에 맞는 문제를 새로 만들어 사용하고 있어서 당시 사회상을 연구하는 자료로도 유용할 것이다. 그러나 본문이 국한문 혼용인 것과 달리 서문은 역시 순 한문으로 되어 있다.395)김용운, 앞의 책(1977a), 299∼304쪽.

그 후의 대표적인 수학책으로는 대한예수회에서 낸≪算學新編≫(상·하, 1907)을 들 수 있다. 중학교과서로 만든 이 책은 미국책의 번안판이며, 전면 가로쓰기에 순 한글이다. 구구단이 12단까지 실려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일본책이 아니라 미국책을 직접 번역한 것으로 보여 당시 다른 교재에 비해 아주 특이하다. 지은이는 미국의사 필하와(Eva Field)이고, 옮겨 풀이한 사람이 申海永이라 밝혀져 있다.

당시 수학교과서 가운데 한 가지 더 예를 들자면≪初等算術敎科書≫(상·하, 1908)가 있다. 柳一宣이 지은 것으로 밝혀져 있다. 또 표지에는 이 책이 皇城(서울) 倉洞의 精理舍 藏版이라 밝혀져 있는데, 인쇄된 곳은 일본 橫濱(요코하마)으로 기록되고 있다. 유일선은 정리사를 경영한 것으로 보이고, 한국 역사상 최초의 수학잡지인≪數理雜志≫를 1905년 11월호부터 1906년까지 통권 8호를 발행한 선구자이다. 또 그는 당시 徽文義塾長을 지냈다.

개화기 동안에 출간된 근대수학 교과서들을 출판연도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396)김봉희,≪한국 개화기 서적문화 연구≫(이화여대 출판부, 1999), 247∼253쪽을 수정 보충.

1900,≪精選算學≫, 南舜熙 저 塔印社.    ≪算術新書≫, 上野淸 저, 李相卨 역편 1906,≪新訂算術≫, 李敎承 저, ? (발행) 1907,≪簡易四則≫, ?, 玄公廉 발행 1908,≪代數學敎科書≫, 金俊鳳 저, 柳一宣 교열, 발행 鄭象煥    ≪算術敎科書≫, 李敎承 저, 李冕宇 共閱, 李冕宇法律事務所 발행    ≪高等算學新編≫, 필하와 저, 申海永 술, 대한예수교서회 발행    ≪新訂敎科算學通編≫, 李命七 저, 李敎承 교열, 玄公廉 발행    ≪新撰算術通義(上)≫, 洪種旭 편, 博學書館    ≪中等敎科算術新書≫, 上野淸 저, 李相卨 역편, 玄公廉    ≪中等算術敎科書≫, ?, 博學書館    ≪中等算學), 李元祚 저, 大同報社    ≪算學通編≫ 상·하, 1908, 李命七 著述, 李敎承 校閱, 玄公廉    ≪初等近世算術≫, 李相益 편, 徽文館    ≪初等算術敎科書≫, 柳一宣 저, 新舊書林    ≪最新算術≫, 金夏鼎 저, 興文社 1909,≪高等小學算術書≫, ? 저, 博文書館 발행    ≪近世代數≫, 李相益 編, 唯一書館    ≪普通敎科算術書≫, 洪秀璇 저, 博文書館    ≪算術書≫, 학부 편집국 편, 學部 발행    ≪算術要解≫, 李聖和 저, 廣德書館 발행    ≪算術指南≫, 柳錫泰 저, 廣德書館 柳廷烈 발행    ≪算學通編≫, ? , ?    ≪平面幾何學≫, 李命求 저, 柳一宣 校, 廣東書局 1910,≪新撰代數學敎科書≫, 李敎承 저, ?

또 유일선·이상설·이상익 등 이 때 활약한 수학교육자들은 모두 아마추어들임을 알 수 있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였으나, 수학의 경우도 일본수학책을 필요에 따라 번역하고, 그것을 새로 생긴 출판 수단을 통해 발간하여 학교교육 등에 사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위에 소개한≪산술신서≫또는≪중등교과산술신서≫를 편역한 李相卨(1870∼1917)의 경우 그는 원래 당시 학부 편집국장 李圭桓의 부탁으로 일본 수학자 우에노의≪근세산술≫을 번역해 편집한 것으로 서문에 밝혀져 있다. 그가 그 전부터 수학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그는 1886∼1887년 쯤에 이미≪數理≫라는 책을 쓴 것을 알 수 있고, 1906년 북간도로 망명해 간 다음에도 자신이 세운 학교(瑞甸書塾)에서≪산술신서≫로 학생들을 가르쳤다고 밝혀져 있다. 또 그는 당시 천재적 재능을 가진 젊은이로 조선에 수학을 처음 받아들인 사람으로도≪騎驢隨筆≫에는 기록되어 있다.397)尹炳奭,≪李相卨傳≫(一潮閣, 1984), 16∼19쪽.

또 역시 앞에 소개한 유일선처럼 몇 가지 수학교재와 함께 최초의 수학 잡지까지 내면서 근세수학의 수용에 노력한 인물이 있지만 이들 모두는 당시 전문수학자가 아니었고, 또 그 후에도 전문수학자로 성장하지 못했다. 그 대표적인 경우로 이상설은 망명 이후 독립운동가로 크게 이름을 후세에 남겼을 뿐이지, 수학을 연구하고 보급하는 일에는 더 이상 종사할 수 없었다. 이것이 개화기 근대수학 내지 근대과학의 특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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