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Ⅲ. 근대 과학기술
  • 1. 서양과학에 대한 인식
  • 2) 물리학

2) 물리학

근대 서양물리학에 관한 여러 가지 지식은 17세기 이래 서양선교사들이 중국에서 소개한 서양과학의 내용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국내 학자들에게 알려졌다. 예를 들면 李瀷·洪大容·丁若鏞을 거쳐 최한기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정도의 잡다한 근대 물리학 지식이 조선의 실학자들에게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398)朴星來,<19세기 朝鮮의 近代物理學 수용>(≪外大史學≫5, 1993), 243∼260쪽. 천체의 운동에 대해서는 이들 사이에 이미 인력 개념이 들어오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최한기는 1836년의≪推測錄≫에서는 아직도 데카르트의 渦動論(vortex)을 바탕으로 천체의 인력을 설명하고 있으며, 그 후 1858년의≪地球典要≫에서 그의 인력 개념이 더 분명해지는 것으로 보인다. 전기와 자기에 대한 근대 물리학적 지식은 역시 19세기 초에서야 나타난다.

나침반은 동양에서는 이미 고대부터 알려졌던 것이어서 새롭지 않았으나, ‘電氣’란 말이 처음 보이는 것은 최한기의≪身機踐驗≫에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그가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의사 홉슨(Benjamin Hobson)의 서양 의학 및 과학에 관한 책을 토대로 1866년에 쓴 것인데, 끝 부분에 전기란 제목 아래 상당히 상세하게 당시의 전기에 대하여 물리학 지식을 소개하고 있다.399)崔漢綺,≪身機踐驗≫8, 電氣.

1866년의 전기에 관한 최한기의 지식은 곧 보다 대중적으로 되어 갔을 것으로 보인다. 그보다 앞서서 이미 서울에는 일본에서 수입한 정전기 발생장치가 일부 식자층의 장난감으로 여겨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규경이 1830년쯤 보았다는 雷法器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전기를 몸으로 경험하여 배운 최초의 조선인으로는 1881년 중국에 파견되었던 金允植의 영선사행 가운데 尙澐·安浚·趙漢根 등을 들 수 있다. 1881년 말 천진에 도착한 38명의 기술연수생 가운데 상운과 안준이 전기를 공부하게 되었고, 조한근은 水雷砲를 공부하도록 배치되었다. 1882년 3월 상운은 전기기구 21가지를 가지고 귀국했고, 뒤의 기록에 의하면 상운과 조한근은 국내에서 최초의 전보기술자로도 활동한 것이 밝혀져 있다.400)朴星來, 앞의 글(1993), 243∼260쪽. 이들의 물리학 지식이 어느 정도였던지는 지금 알 수 없다.

광학지식은 역시 서양 근대과학의 핵심부분으로 이익 이래 여러 가지로 알려졌다. 빛의 굴절현상에 대한 지식이 알려지고, 망원경이 1631년 이래 전해졌지만, 그에 대한 구체적 응용이나 지식이 늘어 가지는 못한 채 19세기 중반으로 접어든다. 최한기는 1836년의≪神氣通≫에서 소리의 파동현상을 설명하고 있고, 인체의 다른 감각현상도 파동현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그가 어디서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아직 밝혀져 있지 않다.

개국 이후 물리학 수용의 자취는 당시 널리 지식층 사이에 소개되던 신문이나 책 등을 살펴보아야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최초로 ‘物理’란 용어가 근대적 의미로 사용된 것은≪한성순보≫가 처음으로 보인다. 1883년 11월 1일자≪한성순보≫ 제4호는 ‘論電氣’라는 기사에서 처음으로 근대적 의미의 물리를 말하고 있다. 전기현상에 대한 서양과학을 소개한 이 기사는 ‘물리’라는 표현을 ‘物理學家’라는 단어로 처음 사용하고 있다. 순 한문 기사인 이 기사에서는 물리학자라는 뜻의 단어로만 사용되었으나, 그로부터 반년 뒤인 1884년 5월 11일자≪한성순보≫에서는 서양의 職工학교, 즉 지금으로 치면 직업학교 제도를 말하면서 東京직공학교의 예를 들고 있다. 이 기사에서 이 일본의 학교는 예과와 본과로 구성되었는데, 예과에서 공부하는 과목으로 대수학·對數용법·기하학·삼각술·물리학·화학·畵學 및 畵法기하학을 들고 있다.

‘물리’라는 표현이 일본에서 들어오고 있음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 실제로 물리라는 근대과학 분야를 가리키는 말은 일본에서 처음 만들어져 동아시아 한문 사용권에 퍼졌다. 실제로≪한성순보≫의 이 기사가 일본신문에서 베낀 것인지 또는 중국 언론에서 옮겨 놓은 것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그 때까지도 여전히 중국에서 옮겨 쓴 기록은 대체로 물리란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예를 들면 일본에서도 전에 공부했지만, 그 후 중국에서 오래 있었던 兪吉濬은 그의≪西遊見聞≫(1895)에서 ‘格物學’과 ‘화학’을 나란히 말하고 있어서 그가 말하는 격물학이 바로 지금의 물리학임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1895년 일본에서 발행되었으나, 훨씬 전에 이미 집필되어 있었던 것으로 밝혀져 있다. 그는 이 책을 쓰면서 자신이 직접 경험한 서양문명을 소개하였지만, 그 상당 부분은 그의 스승이기도 한 일본 문명개화운동의 대표격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책을 참고한 것으로 밝혀져 있다. 그런데 그가 참고한 후쿠자와의 1860년대 책≪西洋事情≫은 아직 일본에도 물리란 표현이 사용되기 전이어서 당연히 그런 표현을 읽은 일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401)兪吉濬,≪西遊見聞≫13편, 學業하는 條目·格物學(≪兪吉濬全書≫Ⅰ, 一潮閣, 1971, 350쪽).

결국 1883년 말에 이미 물리학이란 표현이≪한성순보≫에 한 번 나타나지만, 그것이 어느 정도 조선의 지식층에게 알려진 것은 10여 년 뒤≪독립신문≫ 때부터였을 것으로 보인다. 1898년(광무 2) 9월 16일자≪독립신문≫은 도량형 개량계획에 대해 논평하면서, 다음과 같은 물리학이란 표현을 쓰고 있다. 영국과 미국 두 나라는 원체 오랜 동안 그들나름의 도량형제도를 써 왔고, 또 수많은 책에 모두 그 법을 써 놓았기 때문에 지금 갑자기 바꾸기 어려워서 겨우 물리·화학 등의 학문분야에서만 채택하고 있지만, 대한제국에서는 아직 통일된 도량형이 전국에 사용되지도 않고 있어서, 어차피 새로 도량형을 정해야 하니 미터법을 채택하자는 주장을 담은 논설이다.402)≪독립신문≫3권 140호, 광무 2년 9월 16일.

1899년에는 3월부터 漢城義塾의 광고에, 그리고 5월부터는 培英義塾 광고에 학생들에게 이런 과목을 가르친다면서, 산술·물리학·화학 등이 그 과목 가운데 들어 있다. 훨씬 전인 최한기의 1836년 작품에도 ‘물리’란 말은 나오지만, 그것은 전통유학사상에 흔히 등장하는 용어로서의 물리였을 따름이다. 또 1883년의≪한성순보≫에도 근대과학의 물리란 용어는 등장하지만, 이 경우에는 그저 스쳐 지나는 정도로 외국의 글을 옮겨 오는 과정에 들어온 정도임이 분명하다. 결국 1898년의≪독립신문≫이 처음으로 물리학이란 용어를 제대로 그리고 그 후 지속적으로 쓰기 시작한 경우라고 판단된다.

물론 그에 앞서서 근대물리학의 내용은 여러 가지로 국내에 들어오고 있었음은 앞에서 이미 지적한 바와 같다. 실학자들 글 가운데 이미 근대물리학의 여러 가지 내용이 들어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시작된 단편적 근대물리학 지식의 수용은 1880년대 이후에서야 조금씩 체계적으로 이 땅에 알려졌고, 결국 1890년대에서야 근대식 학교교육에서 물리학 내용이 어느 정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교육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아직 그런 교육을 제대로 담당할 만한 물리교사가 조선에 양성된 일은 없다. 일본과 중국에 번역 소개된 물리학책이 국내에 들어와 그대로 사용되는 단계에 들어서고 있었을 따름이다.

그리고 이렇게 시작된 물리학교육은 1900년대로 들어가서 보다 본격화되었다. 학교교육이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보다 더 체계적인 일본 과학교재가 국내에 번역되어 소개되기 시작했던 까닭이다. 앞의 수학의 경우나 마찬가지로 일본교육을 조금이나마 받은 지식층이 주로 일본책에서 물리학 내용을 번역해 소개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국내에 소개된 초기의 대표적 물리학교재로는 1906년 발행된 소학교용≪간이물리교과서≫(崔在學 譯述, 朴晶東 校閱, 徽文館 인쇄)를 들 수 있다. 이 책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403)김정흠,<韓國物理學史>(≪韓國現代文化史大系≫Ⅲ, 1977), 100∼101쪽.

제1장 물리학, 제2장 고체학, 제3장 水學, 제4장 기학, 제5장 성학, 제6장 광학, 제7장 열학, 제8장 전학, 제9장 結語.

모두 72쪽밖에 되지 않는 초급 교재로서는 물리학의 모든 분야를 다루고 있음을 알 수는 있으나, 당연히 그 내용은 아주 짧고 초보적이다. 어느 책인지 아직 확인되지 않았으나, 일본책을 옮겨 놓은 것이 분명하다.

역시 같은 1906년에 나온≪新撰小物理學≫은 아주 착실하게 쓰여진 교과서다. 국민교육회에서 발행한 것으로 저자는 분명하지 않으나, 발행자는 국민교육회의 吳相奎라 밝혀져 있다. 1904년 계몽단체로 시작한 국민교육회는 여러 가지 교과서를 편찬해 냈는데, 그 가운데 이 책이 누구에 의해 쓰여졌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미국인 스지-루씨의 理學說을 따라서 썼다는 앞의 예문으로 보아 미국인 책을 일본인이 발행하고, 그 일본어역을 다시 옮겨 놓은 것이 분명하다. 다른 국민교육회 책이나 마찬가지로 국한문 혼용이고, 107쪽에 그림이 64장이나 들어 있다. 발행된 즉시 1906년 7월 17일자≪황성신문≫에 책 광고까지 났고, 1910년에는 동문서림에서 다시 출간된 것으로 보아 상당히 당시로서는 많이 팔린 물리학책으로 보인다.404)김봉희, 앞의 책. 267∼268쪽.

모두 10장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원래는 거의 다 漢字임).

1. 총론-물리학의 정의, 三體, 물질의 불멸, 분자 급 원자. 2. 각종 인력-인력·중력·응집력·부착력. 3. 力의 작용-動靜, 합력, 重心, 반사운동의 규칙, 물체의 勢(에너지), 振子, 槓杆, 落射定律. 4. 液의 성질-액체압력의 전파, 액의 압력, 수면평균, 水準器, 액체의 부력. 5. 기체의 성질-기체의 중량, 대기, 대기의 압력, 배기통. 6. 聲音-진동 급 매개, 파급, 음원, 음의 속도, 음의 반사, 음의 강약, 음의 고저, 축음기, 耳. 7. 열-열의 정의, 열의 전도, 삼체의 팽창, 한난계, 비등, 증류, 증기의 기관, 운우박설노상, 열의 대류, 비열, 冷劑, 연소. 8. 광-광의 본성, 광의 직진, 광의 속도, 투명 불투명, 광의 반사, 광의 굴절, 三稜유리, 렌스, 현미경, 망원경, 쌍안경, 광의 분해, 광의 흡수 및 방출, 광의 枉撓·虹霓·日暈 및 月暈·迷映·眼·발광체. 9. 電-전의 상태, 마찰전, 기전기, 험전기, 헤이덴담, 전기의 발광작용, 避電計, 전류, 전지, 전신기, 전기등, 생리의 작용. 10. 자석-發磁의 작용, 자침에 及하는 전류, 자석의 양극, 천연자석.

그 후에 나온 물리학 내지 물리학·화학을 함께 다룬 이른바 理學관련 교과서들은 대강 다음과 같다.

1906,≪新撰小物理學≫, 國民敎育會 저, 國民敎育會 吳相奎 1907,≪小物理學≫, ?, 普成館 1908,≪普通理科敎科書≫, 普成館    ≪物理學初步≫, 安一榮 저, 柳一宣 교열, 博文書館    ≪普通理科敎科書≫, 普成館    ≪新撰理化學≫, 朴晶東 저, 廣學書舖    ≪理科書≫, 學部 編輯局 편, 學部    ≪中等物理學敎科書≫, 閔大植, 徽文館    ≪初等物理敎科書≫, 安衡中 교열, 陳熙星 역편, 義進社    ≪(초등용)簡明物理敎科書≫, 崔在學 역, 朴晶東 校正, 安峴書館 河益泓 1910,≪改訂新撰理化學≫, 朴晶東, 廣學書舖    ≪改訂中等物理學敎科書≫, 閔大植 편, 閔大植    ≪新撰實驗理化學敎科書≫, 李觀熙, 廣韓書林    ≪普通物理敎科書≫, ?, ?

진희성은 보성관의 번역원, 안형중은 공업전습소 기사라는 정도가 알려져 있으나, 물리학교과서를 펴낸 당시 인물들의 이력이나 그 후의 활약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져 있지 않다. 수학이나 마찬가지로 물리학을 소개한 인물들 역시 물리학에 정식으로 교육받은 인물도 아니었고, 그 후 물리학으로 들어간 사람도 없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들 교과서 이외에도 약간의 일반용 물리학책이나 일본책을 번역해 낸 것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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