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Ⅲ. 근대 과학기술
  • 1. 서양과학에 대한 인식
  • 4) 박물학

4) 박물학

식물·동물·광물을 아울러 당시에는 博物學이라 하였다. 최초의 박물학 교재로는 1907년 6월 초판의 국민교육회의≪新撰小博物學≫을 들 수 있다. 3편 26장 21절로 구성되었는데, 제1편 식물학이 5장 14절, 제2편 동물학이 11장 5절, 제3편 광물학은 10장 2절로 되어 있다. 삽도가 많이 들어 있고, 1907년 11월에 이미 재판, 그리고 1909년에는 다시 3판을 냈다. 재판에는 이 책의 지은이가 兪星濬(1860∼1934)이라 밝혀져 있다. 유명한 개화기 사상가 유길준의 동생인 유성준은 이것 이외에도 여러 가지 근대 학문을 소개하는 책을 썼다.

이 밖에도 1910년에는 李觀熙가 지은≪最新博物學敎科書≫가 나왔는데, 역시 식물·동물·광물의 순서를 따르고 있다. 그런데 이들 이외에 理科라는 말이 박물학보다 좀더 넓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玄采가 지은≪最新新高等小學理科書≫는 식물과 동물(1권), 地文과 광물(2권), 물리와 화학(3권), 생리와 위생(4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밖에는 여러 가지 식물학·동물학·광물학교과서가 발행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1906년 윤태영이 지은≪식물학교과서≫가 식물학에 관한 첫 교재인 것으로 보이고, 1908년에는 동물학교재도 적어도 세 가지가 나왔다. 책에 광물학이란 제목을 단 경우로는 1907년에 나온 閔大植이 번역 편찬한≪礦物界敎科書≫(휘문관 발행)가 있는데, 국한문 혼용으로 36개의 삽화가 들어 있다. 1908년 玄公廉이 쓴≪중등광물학≫이 그 다음 정도로 보인다.417)김봉희, 앞의 책. 271∼276쪽.

그러나 이렇게 박물학을 교과목 이름으로 사용하여 교과서를 짓고 있던 것과 달리 그에 앞서서 이미 ‘생물학’이란 용어가 조선사회에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897년에≪독립신문≫은 ‘생물학’을 제목으로 연재기사를 길게 쓰고 있다.<론설>이란 제목 아래 생물학에 관한 연재는 이렇게 시작한다.

학문이라 하는 것은 다름아니라 갖가지 문건과 생물의 자연스런 이치를 자세하게 아는 것이 학문인 바, 우리는 틈있는 대로 학문상의 도움될 만한 이야기를 실으려 하거니와, 오늘은 생물학을 먼저 시작하여 조금씩 이야기하겠노라(≪독립신문≫, 건양 2년 6월 17일(71호)).

이 기사는 1897년 6월 17일 71호부터 시작하여 7월 24일 87호까지 자그마치 17호에 걸쳐 연재되었다.≪독립신문≫이 어느 기사보다도 길게 다룬 중요한 기록으로 볼 수 있을 듯하다. 어쩌면 이 신문을 주관하던 의사로서의 서재필이 직접 자신의 전문분야에 가장 가까운 생물학을 소개했던 것이기 때문이라고도 생각된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 긴 기사에서는 한결같이 한글 전용과 우리말 용어의 사용을 위해 크게 힘쓰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우리말로 아직 알 수 없는 동물에 대해서는 그 이름을 영어 발음기준으로 표기하고 있는 수가 아주 많아서, 히포파다무슈·라인아셰로스·갱가루·오포슴·돌핀·크락코다일·캐밀욘·파이손·코부라 등등이 영어 발음대로 표기되어 있다. 또 세상 만물을 금수·초목·금석으로 나눈다고 시작한 다음에는 ‘즘승’에 대해 쓰고 있는데, 먼저 등뼈 있는 즘승을 소개한다. 여기 속하는 것들로는 젖 먹는 즘승(4다리)·새·배암 같이 가는 즘승·슈토(水土)에서 다 사는 즘승(양서동물), 물 속에 사는 생선 등의 5가지를 말하고, 이를 다시 더운피와 찬피동물로 나눈다.

그리고 84호부터 86호까지는 15만 가지나 있다는 버러지에 대한 소개가 시작된다. 그리고 이어서 86호에는 눈으로 볼 수 없는 즘승에 대한 기사가 계속되는데, 이에 의하면 세상에는 이런 즘승이 여러 백만 종류나 있고, 이들이 사람의 병을 일으키고 전염시킨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만하면 당시로서는 가장 잘 준비된 생물학교과서라고도 할 수 있을 듯하다.

≪독립신문≫에는 그보다 1년 전에 ‘박테리아’란 말을 처음 사용한 기사가 있는데, 이것도 생물학 소개의 일부라 할 수 있을 듯하다.418)≪독립신문≫ 건양 1년 5월 19일. 10년도 더 뒤인 1908년에 나온 국어교과서는 ‘박테리아’를 제목으로 달고 이에 대해 설명하고 있기도 하다. 이 글은 “박테리아는 가장 細微한 동물이니 顯微鏡이라 하는 眼鏡이 없으면 능히 보지 못하는도다.”로 시작한다.419)<國語讀本> 권 8-9과(≪韓國開化期敎科書叢書≫6), 466쪽.

실제로 생물학이 이 땅에서 연구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의 학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외국학자들에 의해서였다고 할 수 있다. 동물학·식물학·지질학 등이 모두 서양학자들에 의해 시작되었고, 그 후 일본인 학자들이 그 뒤를 이어 연구자로 활약했던 것이다. 1910년 이전에는 조선학자란 전혀 있을 수 없었던 때문이다. 물론 물리학이나 화학의 경우에는 외국학자가 이 땅에서 연구할 이유가 없었으나, 박물학분야는 이 땅에 사는 동물과 식물, 그리고 한반도의 땅 자체가 외국에서는 연구할 수 없는 현장성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한국의 해방 이전의 생물학사는 제1기(1854∼1882), 제2기(1883∼1899), 제3기(1900∼1910), 제4기(1911∼일제시기)로 나눌 수도 있다.420)金昌煥,<韓國生物學史>(≪韓國現代文化史大系≫Ⅲ 科學技術史, 高麗大 民族文化硏究所, 1977), 145∼182쪽. 1854년 4월에 독일인 슐리펜바크(Baron Schlippenbach)는 군함(Palace)을 타고 동해안에 와서 50여 종 한국식물을 채집하여 유럽학계에 보냈고, 이것이 화란학자(F. H. Miquel)의 연구자료가 되어 1865년 이후 몇 차례 논문으로 발표되기에 이른다. 그 후 여러 서양학자들의 동식물 채집보고가 계속되었고, 1869년에는 윌리엄슨(R. A. Williamson)이 중국의 북쪽, 만주, 몽고, 조선을 여행하여 얻은 식물정보를 보고한 일도 있다. 1883년부터는 보다 장기간 직접 체류하면서 연구하는 생물학자가 등장했고, 이들의 활동상은 일부 쿠랑의≪한국서지≫에도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대체로 1900년부터는 서양학자들 대신 이웃 일본학자들이 비슷한 역할을 맡아 활동하기 시작했다.

지질학연구 역시 조선학자가 전혀 없는 가운데 서양학자들이 먼저 조선지질을 연구하기 시작했다.421)孫致武,<韓國地質學史>(≪韓國現代文化史大系≫Ⅲ 科學技術史, 高麗大 民族文化硏究所, 1977), 235∼250쪽. 1862년부터 3년 사이에 미국의 지질학자 펌펠리(Raphael Pumpelly)가 처음으로 중국 북부에서 몽고, 만주, 한국의 지질조사를 시도했다. 그리고 1886년 독일 지질학자 고체(C. Gottsche)은 한국지질 전반을 조사한 일이 있다. 암석채취 발표는 그 직전의 1884년에 골랜드(W. Gowland)에 의한 조사가 1891년 발표된 일이 있다. 지질학 역시 이렇게 한반도를 대상으로 서양학자가 먼저 시작하고, 그 뒤를 일본학자가 이어갔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조사는 아직 본격적인 조사·연구라기보다는 대체적인 표본의 수집·정리 단계가 시작되었던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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