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Ⅲ. 근대 과학기술
  • 1. 서양과학에 대한 인식
  • 5) 천문학과 기상학

5) 천문학과 기상학

이미 실학시기의 학자들에 의해 서양천문학은 대단한 관심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그것은 세상의 모양에 대한 전혀 새로운 생각을 가능하게 해 주었던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익 같은 학자는 중국을 더 이상 세상의 중심이라 볼 필요가 없게 된 상황에서 나라마다 자기 사는 곳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할 수 있음에 주목하기도 했다. 그와 함께 이상한 천문현상을 하늘이 내리는 災異라 여겼던 전통적 자연관도 사라져 갔다.

최한기가 중국의≪海國圖志≫등을 참고하여 1857년≪地球典要≫를 쓴 것에서도 이미 19세기 후반의 조선 식자들에게 지구의 모양과 우주 속에서의 지구의 위치 등에 대한 관심이 대단히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개국 직후의 지식층에도 이런 경향은 그대로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어서, 예를 들면 1883년에 처음 발간된 최초의 신문≪한성순보≫는 바로 이런 문제를 처음 여러 호에 걸쳐 다루고 있다.422)朴星來, 앞의 글(1983), 39∼73쪽.

≪한성순보≫는 국내기사·외국기사 그리고 集錄이란 3가지 기사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집록이 가장 길게 쓰여진 해설기사라 할 수 있다. 이 신문의 첫호에 들어 있는 집록기사는≪地球圖解≫·≪地球論≫·≪論洲洋≫등 세 가지인데 모두 천문·지리라 할 수 있다. 그 다음에도 집록기사의 상당 부분이 바로 천문과 지리에 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당시 신문을 읽는 지식층이 얼마나 당시 서양인들의 상식이 되어 있던 우주의 구성과 지구의 모양 등에 대해 모르고 있었던가를 역설적으로 알려준다. 천문학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가 아주 많은데, 망원경과 음력과 양력에 대한 기사도 있고, 16호(1884년 3월 1일)에는 천문학사를 소개한 기사<星學源流>와 점성술의 잘못을 지적하는 기사<占星辨謬>가 나란히 실려 있기도 하다. 탈레스-피타고라스-히파르코스-톨레미를 거친 천문학 발달과정이 여기 설명되어 있고, 혜성은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어서 그것이 재이로 여겨질 까닭이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신문은 당시 중국에서 발행되는 신문·잡지를 주로 참고하고 가끔은 일본신문도 참고하여 기사를 만들었는데, 1884년 12월 갑신정변과 함께 신문 발행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이 신문이 다시≪한성주보≫라는 이름 아래 순간에서 주간으로 부활한 양력 1886년 1월부터는 이미 그렇게 천문과 지구에 관한 기사는 많지 않다. 1885년 전과 후의 조선 지식층 사이에 천문지리에 관한 관심이 이렇게 달라졌을까 생각될 지경이다. 이는 1885년을 전후하여 가장 널리 보급된 지식이 바로 천문지리였다는 것을 오늘 우리에게 알려준다.

아닌게 아니라 1890년대의 대표적 신문≪독립신문≫을 보면 이미 천문과 지구에 대한 지식은 널리 보급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독립신문≫은 이를 별로 특별하게 다루고 있지 않음을 보아 이를 알 수 있다. 그 대신≪독립신문≫은 여러 가지 근대적 사상이나 제도, 그리고 그런 방향에서 서양 여러 나라들의 현실을 소개하는데 열성이다. 이미 지식층에게는 천문지리에 대한 지식은 어느 정도 보급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자라나는 어린이들의 교육에 있어서는 여전히 천문지리가 중요한 새로운 지식이 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896년의 국어교과서에조차 바로 이런 문제가 단원에 들어 있음을 보아 알 수 있다. 학부 편집국에서 편찬해 낸≪尋常小學≫(1896)에는 지구의 회전에 대한 단원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第二十四科 地球의 回轉이라

地球는靜하야조곰도動치아니하난듯하나其實은暫時도쉬지아니하고回轉하는거시오이다.

그러므로우리사람들과家屋과田畓과山河等도亦是地球와갓치回轉하나그러나우리가其回轉함을아지못하기는地球가甚大한緣故이라譬컨대우리가大船을타고海上에떠가되自己의몸은가지아니하는줄노아는것과갓소이다…

 (學部 編輯局,≪尋常小學≫권 3-24과,≪韓國開化期敎科書叢書≫1, 440∼442쪽).

천문학에 관한 이 시기의 교과서로는 1908년에 출간된 閔大植의≪新撰地文學≫(휘문관 발행, 1908), 鄭永澤이 번역한≪天文學≫(京城;普成館, 218쪽), 그리고≪天文略解≫(1908) 등을 들 수 있다. 민대식의≪신찬지문학≫은 휘문의숙에서 사용되던 것으로, 測地·천문·기상·해양·지질·地史에 걸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텬문략해≫는 숭실학교의 창립자인 미국북장로교 선교사 베어드(W. M. Baird, 한국 이름 裵緯良)가 미국 스틸스(Steeles)의≪천문학≫(Popular Astronomy)을 편역한 것으로 246쪽이다.423)유경로,≪한국천문학사연구≫(녹두, 1999). 33쪽.

이처럼 근대 서양천문학의 수용은 전통적 천문학의 재빠른 도태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1894년의 갑오개혁과 함께 삼국시대 이래 국가 천문기구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해 왔던 관상감이 기구가 대폭 축소되어 觀象所란 이름으로 명색만 남게 되었다. 소장 1명, 技師 1명, 技手 2명, 서기 2명의 일본식 이름을 가진 간단한 기관이 된 것이다. 이들의 거의 유일한 임무는 전통적인 역법을 지켜 역서를 제작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그나마 양력 채용이 결정되어 개국 504년(1895년) 11월 17일을 개국 505년 1월 1일로 양력 사용을 선언했기 때문에 그 후부터는 공식적으로는 양력이 사용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제 재이로서 천문현상을 임금에게 알리는 업무도 사라졌다. 측우기를 사용하여 강우량을 관측 보고하던 정도의 전통은 계속된 것으로 보이지만, 근대적 일기예보 기술이 일본인들에 의해 시작되면서 기상분야도 완전히 관상소의 일에서 사라졌다. 1907년 2월 한국정부는 서울·평양·대구에 측후소를 설립했지만, 이미 그 해 3월 인천 임시관측소가 통감부관측소로 개칭되고, 모든 측후업무는 일본인의 손에 넘어갔다.

이에 앞서 1884년 봄에 이미 외무협판으로 고용되어 있던 독일인 묄렌도르프(Moellendorf, 穆麟德)가 원산항과 인천항 세관에 측후소를 설치했으나, 1885년 인천측후소에 화재가 나서 당시 세관장 메릴(H. F. Merill)이 다시 기기를 수입하여 1886년부터 관측을 재개한 일이 있다. 또 1887년에는 부산세관에서도 관측이 시작되었다. 이 시기부터 1903년까지 16년간의 기온·천기·우량은 1905년 당시 인천관측소에 있던 일본인 기상학자 와다(和田雄治)가 조사하여 미국에 보내,≪월간기후보고≫(Monthly Weather Review, 1905년 p. 355)에 실렸고, 국내에서는 별도로 책자로 나오기도 했다.

일본 기상관측을 시작한 독일인 크니핑(E. Knipping)은 동경기상대에서 폭풍경보를 하기 위해 한국자료를 요청했다. 1884년 2월 부산과 일본 사이에 해저전신이 개통되었기 때문에 그 해 6월 16일부터는 기상관측을 시작하여 그 결과를 12월 1일부터 매일 6시와 21시 두 번씩, 1885년부터는 14시 추가하여 3회씩 기상관측 전문을 발송했다. 러시아도 별도의 기상관측을 한반도에서 실시하고 있었고, 이런 상태는 러일전쟁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근대국가로서 절대로 필요한 기상업무는 1880년대에는 서양인들이 중심이 되어 진행되었고, 1907년에는 완전히 일본에 넘어간 셈이 되었던 것이다.424)金聖三,<韓國氣象學史>(≪韓國現代文化史大系≫Ⅲ 科學技術史, 高麗大 民族文化硏究所, 1977), 211∼2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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