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Ⅲ. 근대 과학기술
  • 2. 근대 과학기술의 도입
  • 1) 교통·통신·전기
  • (1) 근대적 교통·통신·전신 및 전기의 도입 배경

(1) 근대적 교통·통신·전신 및 전기의 도입 배경

1876년 개항 이후 다양한 경로를 통해 서구사회의 근대시설과 문물에 대한 정보가 우리 나라에 들어왔다. 물론 개항 이전에도 이미 전반적인 서구사회에 대한 소개는 개괄적으로나마 되어 있었다. 이 소개들은 주로 청나라에 파견된 사신들이 수입한 서적들을 통해 이루어졌는데,≪博物新編≫·≪海國圖志≫·≪瀛環志略≫·≪地理問答≫·≪中西見聞錄≫등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 서적들에는 서양의 실정뿐만 아니라 과학과 기술에 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책들은 당시 최신 정보의 집중지였던 한성과 그 주변에 살고 있던 近畿학자들을 중심으로 꽤 널리 읽혔던 것으로 보인다.430)愼鏞夏,<吳慶錫의 開化思想과 開化活動>(≪韓國近代社會思想史硏究≫, 일지사, 1987), 97∼106쪽.

그러나 개항으로 서구사회에 대한 정보들은 질적, 양적으로 급변하게 되었다. 일본·미국 등에 파견된 외교사절단은 서양문물에 대해 많은 정보를 가지고 왔다. 1880년을 전후하여 일본에 파견된 수신사나 신사유람단은 ‘기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전신국’을 방문하기도 하고 ‘전등’이 켜지는 것을 보기도 했다. 특히 제2차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된 김홍집은 鄭觀應의≪易言≫이라는 책도 가져왔는데 이 책에는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각종 정보가 실려 있었다. 조선정부는 이 책의 복간본과 번역본을 만들어 전국으로 배포하였고 그 결과 많은 유학자들이 근대문물을 도입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431)두 권으로 편집된≪易言≫의 제1편에는 ‘화차’·‘전보’·‘船政’·‘郵政’ 등에 관한 글들이 담겨 있다. 이 책의 영향에 대해서는 李光麟,<≪易言≫과 韓國의 開化思想>(≪韓國開化史硏究≫, 一潮閣, 1969)을 참조. 한편 1882년<조미수호통상조규>를 맺은 정부는 민영익을 단장으로 하는 사절단을 1883년, 미국으로 파견하였다. 이 견미사절단은 전신 및 전기 시설을 시찰한 것은 물론이고 기차로 미국대륙을 횡단하였다.432)견미사절단의 신식문물 시찰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金源模,<韓國報聘使의 美國使行(1883) 硏究(하)>(≪東方學志≫50, 1986)를 참조할 것. 이들의 경험은 조선의 최고 권력자였던 고종에게 보고되었으며 각종 기록으로 남겨졌다.

개항 이후 서적 수입은 더욱더 활발해졌으며 이들 서적을 통해 수집된 정보들은≪漢城旬報≫를 통해 전국으로 유포되었다.≪漢城旬報≫는 1883년 한성부 박문국에서 발간한 관보로 3,000부가 발행되어 조선 각지에 보내졌는데 이 신문에는 전기통신이나 철도 등 서구의 근대기술이 가지는 유익한 점들과 서구과학에 관한 내용도 다루어 지방 곳곳의 식자층은 이 신문을 통해 서구의 근대사회와 문물에 대해 적지 않은 정보를 가질 수 있었다.433)박문국의 운영과≪한성순보≫의 발행에 대해서는 李光隣,<漢城旬報와 漢城周報에 대한 一考察>(앞의 책), 60∼102쪽을 참조할 것. 그리고≪漢城旬報≫와≪漢城周報≫에 실린 근대 기술에 대한 논의는 朴星來,<漢城旬報와 漢城周報의 근대과학 수용 노력>(≪신문연구≫36, 1983), 39∼73쪽을 참조할 것.

조선정부는 이런 정보를 토대로 개항 초부터 근대적 사회간접자본의 도입을 위한 정책을 시행하기도 했다. 근대적 통신을 도입하기 위해 이미 1880년대 초반부터 일련의 작업을 진행한 것이 그 예이다. 1881년 말, 청나라 天津에 파견한 영선사행 가운데 尙澐과 安浚으로 하여금 南局 電氣廠에서 전기통신기술을 체계적으로 습득하게 하는 한편, 1882년 5월에는 상운이 귀국할 때 電箱(축전지)과 축전지용 화학약품을 비롯해 전선과 電鐘, 전화기 및 피복동선 등 전기통신에 필요한 기기들을 남국 전기창에서 가져오도록 했던 것이다.434)영선사행에 대해서는 權錫奉,<領選使行에 대한 一考察>(≪歷史學報≫17·18, 1962), 277∼312쪽 참조.
상운이 도입한 전신기기들에 대해서는 韓國電力公社,≪韓國電氣百年史≫, 41쪽에서 재인용. 한편 이 기기들은 임오군란 때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같은 해 11월 영선사 김윤식은 귀국할 때 電箱과 銅線을 추가로 구입하여 가지고 오기도 했다. 이 같은 조선정부의 근대적 통신 도입을 위한 인력양성과 물품도입은 “軍機를 전하는 것을 전보에 의지하니 이것이 있는 나라는 승리함이 많고…전보가 있는 자는 항상 이익을 남기니 부강의 공이 여기에 있다”고 한≪易言≫의 언급을 비롯한 당시 도입된 각종 정보들이 하나의 배경이 되어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435)鄭觀應,≪易言≫상, 論電報.
김연희,<大韓帝國期의 전기사업>(≪한국과학사학회지≫19-2, 1997), 91쪽에서 재인용.

한편 철도부설에 대해서도 많은 정보들이 입수되었다. 일본에 수신사로 다녀온 김기수는 견문록≪日東紀遊≫에 이미 기차에 대해 서술했으며 제2차 수신사였던 김홍집도 역시 철도 운영의 중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그러나 견미사절단의 미대륙철도 횡단 경험은 그보다 훨씬 생생한 정보였으며 이 경험은 고종에게 보고되었다. 이런 정보들로 조선의 집권층은 화차, 즉 기차의 효율성을 충분히 인식하게 되었다. 이후 지속적으로 수집된 철도에 관한 정보 가운데 특기할 만한 것은 駐美朝鮮代理公使인 李夏榮이 1889년 귀국하면서 구입해 온 철도 모형이었다. 이 기차 모형은 폭이 67촌, 높이가 89촌 정도 되는 금속제의 매우 정교한 모형으로 기관차·객차·화물차로 구성되어 있었고 작동을 시키면 궤도 위를 달렸다. 고종을 비롯한 대부분의 정부관료들은 말로만 듣던 기차를 모형으로나마 직접 접할 수 있었다.436)鐵道廳 公報擔當官室,≪韓國鐵道史≫1(철도청, 1977), 38쪽.

개항 초인 1882년 조선정부 내에서 철도부설 논의가 전개된 바 있었다. 일본과 영국이 철도부설 특허권을 적극적으로 요구해 왔던 것이다.437)묄렌도르프는 “철도문제는 이미 내가 1882년에 조선에 체류한 직후에 일어났다. 철도부설권을 놓고 여러 곳으로부터 시달림은 받은 정부는 여하튼 간에 결정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신청해 온 회사 중의 일부는 영국에 소속되어 있고, 일부는 일본에 소속된 회사들이었다…한국정부에서는 이를 위한 자금이 없었기 때문에…잠시 보류하게 되었다”고 회상하였다(로잘린 폰 묄렌도르프, 신용복·김운경 옮김,≪묄렌도르프文書≫, 평민사, 1987, 110쪽). 묄렌도르프는 청나라의 주선으로 1883년부터 1885년까지 조선정부에서 외무협판, 총해관사등으로 활약했다. 당시 조선정부는 이 요구에 부정적이지만은 않았으나 철도부설사업을 전개할 자금이 없었고 임오군란으로 정치상황과 사회가 매우 불안했으며 청나라의 내정간섭이 매우 심해지고 있었으므로 철도부설과 같은 대규모 사업을 전개할 수 없었다.

개항 이후에 본격적으로 접하게 된 사회간접시설에 대한 정보들은 급속히 부국강병을 이루어 서구열강들의 침략 위협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매우 중요하게 거론되었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사회간접자본은 이런 정보들이 충분히 실정에 맞게 소화되어 일관된 정부의 정책으로 표면화되기 전에 일본을 비롯한 한반도를 둘러싼 여러 나라와 서구열강들에 의해 장악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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