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Ⅲ. 근대 과학기술
  • 2. 근대 과학기술의 도입
  • 1) 교통·통신·전기
  • (2) 사회간접자본의 전개과정

가. 교통

“조선의 교통수단은 빈약하기 그지없다. 도로는 나쁘고 橋梁도 드물다. 주요한 교통 수단은 소와 작지만 힘이 센 말이다. 수레는 보잘것없이 만들어져 있다. 선박은 극히 원시적이며 專馬船과 나룻배는 초라하기만 하다.”438)로잘린 폰 묄렌도르프, 위와 같음. 이 글은 묄렌도르프(Paul Georg von Möllendorf, 1848∼1901)가 1897년 조선을 회상하면서 쓴 글 가운데 교통에 대한 항목이다. 이 글을 보면, 개항 초기 우리 나라의 교통수단은 전형적인 농촌사회의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개항으로의 전환은 전통 농촌사회로부터 근대적 자본주의체제로의 편입을 의미했으며 사회간접자본의 측면에서 볼 때 자본주의 사회가 요구하는 교통수단 및 시설, 즉 증기나 전기와 같은 대규모 동력의 교통시설을 수용할 수 있는 체계로 轉化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가) 육상교통-철도부설을 중심으로

철도는 근대 육상운송 수단 가운데 하나로 선진 제국의 근대화과정에서 산업발달을 뒷받침한 중요한 사회간접자본이다. 이 철도부설 작업은 대규모의 자본이 투자되어야 하는 사업으로 재정이 부실한 조선정부는 철도부설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철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철도부설의 자주성과 독자성을 수호하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위한 정부의 지속적이고 강력한 정책이 뒷받침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한반도의 철도부설사업은 경제적·정치적 이권을 확보하려는 청나라와 일본 및 러시아를 포함한 서구열강의 각축전 속에서 전개되었다.

(가) 한반도 철도부설권 쟁탈전

한반도의 철도는 한반도를 둘러싼 나라들의 정치·경제·군사면에서 매우 중요했다. 일본은 한반도를 대륙침략의 교두보로 여겨 만주까지로 이어지는 철도를 부설하려 했고, 러시아는 한반도 남단까지 시베리아철도를 연결, 부동항을 확보하려 했다. 또 청나라는 일본침략을 막기 위해 한반도의 철도부설권을 원했으며, 영국 역시 러시아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한반도에서의 철도부설권을 획득하려 했다. 이 같이 한반도의 철도부설권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수성으로 인해 아시아를 포함한 서양열강들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조선에서 철도부설권을 획득하기 위해 가장 발빠르게 움직인 나라는 일본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1882년의 철도부설 특허권 청원이 거부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1892년(고종 29) 서울-부산간 철도노선 답사 및 측량을 비밀리에, 이른바 수렵여행을 가장해 실시했다.439)鐵道廳 公報擔當官室,≪韓國鐵道史≫2(철도청, 1977), 8쪽. 한반도와 중국에서 군사행위를 염두에 두고 있던 일본으로서는 “군대와 군수물자의 선편 운반이 해상권과 관련해 곤란하므로 부산에서 서울까지 육상교통로를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440)鐵道廳 公報擔當官室, 위와 같음. 그러나 일본의 측량작업이 곧 철도부설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1894년 청일전쟁 이래 일본은 조선정부와 맺은 여러 가지 강제적 협정·조약 등으로 이권침탈의 우위를 점했지만 삼국간섭과 아관파천으로 한반도에서의 영향력이 감소했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의 일본과 서구열강들의 세력이 균형을 이룬 상태에서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자주권 수호를 위해 각종 이권 양여를 중단할 것을 천명했으나 이 정책을 적극적으로 유지하지는 못했다. 京仁철도부설권이 미국인 모스(James R. Morse)에게, 京義철도부설권이 프랑스의 피브릴상사 대표인 그릴(Grille)에게 양여되었다.441)鐵道廳 公報擔當官室,≪韓國鐵道史≫1(철도청, 1977), 104∼105쪽. 모스는 경인철도부설권을 획득하기 위해 이미 1891년부터 집요하게 정부를 상대로 작업을 진행했다.442)鐵道廳 公報擔當官室, 위의 책, 87∼90쪽. 한편 프랑스인인 그릴이 경의선부설권을 획득하게 된 데에는 러시아공사의 적극적인 개입이 크게 작용했다. 러시아로서는 당시 시베리아철도부설을 진행중이었기 때문에 한반도에 철도를 부설할 여력이 없었다. 그러므로 주한러시아공사는 일본을 배제하고 러시아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그를 적극적으로 추천했다.443)鐵道廳 公報擔當官室, 위의 책, 104∼112쪽. 한편 1898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한성을 방문, 철도부설에 관한 일본의 우선권을 강력히 주장하여, 경부철도합동조약을 체결하게 함으로써 경부선부설권은 일본으로 이양되었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일본철도조합을 설립하여 자본을 모으는 한편, 190l년(광무 5) 永登浦와 부산 草梁에서 각각 공사를 시작하였다.

이렇게 하여 한반도의 철도부설권은 미국·프랑스·일본에 양도되었다. 그러나 1904년에 이르면 모두 일본으로 집중되었다. 1897년 3월 경인철도를 기공하기 시작한 모스는 심한 재정 압박을 받았고, 이를 기회로 일본이 다각도의 매수 공작을 전개했다. 결국 모스는 1898년 경인철도부설권을 180만 원에 일본경인철도인수조합에 매도하였다.444)鐵道廳 公報擔當官室, 위의 책, 134∼136쪽. 한편 그릴은 경의선부설권을 획득해놓고도 부설사업을 전개하지 않았다. 부설권 획득 당시 그가 조선정부와 맺은 조약에 의하면 3년 이내에 철도 기공을 하지 못하면 부설권을 정부에 반환하도록 되어 있었으므로 부설권을 모스처럼 다른 나라에 매각하려고 교섭을 전개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시베리아철도부설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어 이를 매수할 여지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부동항을 요동반도에 건설하기로 청나라와 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굳이 한반도 철도부설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어진 상황이었다. 한편 일본은 그릴이 제시한 막대한 매수금액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릴은 부설권 매각에 실패함에 따라 부설권을 조선정부에 반납해야만 했다.

경의선부설권을 환수한 조선정부는 자주적으로 경의선을 부설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물론 대한제국 정부는 경의선부설을 자주적으로 시행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내장원 소속으로 서북철도국을 조직하여 경의선부설을 직영하기로 하고 서울-송도 구간을 기공하여 공사를 진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경의선부설권은 1904년 러일전쟁 전인 2월에 체결된 한일의정서에 의거, 일본군이 3월 경의선 부설을 강행함에 따라 강점당하고 말았다. 군용으로 경의선을 부설하기 시작한 일본은 단지 13개월 만에 무려 528km의 철도를 부설하는 속성 공사를 시행했다. 이미 일본철도조합에 의해 부설이 진행중이던 경부선 역시 1904년, 속성으로 진행되었다. 러일 전쟁 후 일본은 정부에 경의철도를 반납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고 철로 복선화 작업을 개시했다.445)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朴萬圭,<韓末 日帝의 鐵道敷設 支配와 韓國人 動向>(≪韓國史論≫8, 서울大 國史學科, 1982), 247∼300쪽 참조.

(나) 정부 및 국민의 철도자주권 확보 노력

1900년을 전후하여 정부가 철도부설권 수호를 위해 여러 조치를 취했음은 이미 앞에서도 언급했다. 한편 민간에서는 정부관료와 민간인이 철도회사들을 설립했으며 철로를 부설하는 데에 필요한 기술인력 양성을 위한 철도학교들이 세워졌다. 1900년 설립된 서북철도국은 1902년 5월 8일 경의선의 일부 구간인 서울-송도 사이의 철로부설 기공식을 가지고 프랑스인 기사를 채용, 노선 확정을 위한 측량사업을 시작하기도 했다.446)≪한국철도사≫1, 119쪽. 프랑스인을 기사로 채용한 것은 그릴이 경의선부설권을 반환할 때 요구한 조건 가운데 하나이다. 그릴은 그 밖에도 경의선부설에 필요한 자재와 기계들을 프랑스인이 중개하는 상사를 통해 구입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한편 대한제국 정부는 그의 요구를 수용해 90만 원 상당의 경의선부설에 필요한 자재를 大昌洋行 龍東에서 구매하려 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서는 같은 책, 121쪽을 참조. 이하영과 같은 정부관료와 朴琪淙같은 민간인이 설립한 대한국내철도용달회사는 京元線부설권을 획득하여 자금을 모집하기도 했다. 이 회사 외에도 興業會社·大韓京釜鐵道役夫會社·京城土木會社·京城北濟特許會社·釜山土木合資會社·京釜鐵道慶尙會社 같은 철도자재 및 역부 동원을 위한 토건 및 청부회사들이 설립되었다.447)鄭在貞,<京義鐵道의 敷設과 日本의 韓國縱貫鐵道 支配政策>(≪방송대논문집≫3, 1984), 8쪽 표 참조. 이들 회사는 철도부설에 따르는 각종 자재공급과 인부들의 동원을 맡거나 일정 구간의 공사를 청부 맡아 진행했다. 특히 1901년부터 1903년 말까지 일본 민간조합에 의해 경부선 공사가 진행될 때에는 영등포로부터 振威까지, 草梁부터 밀양까지의 노선공사에 직접 참여하여 괄목할 만한 실적을 올리기도 했다.448)鄭在貞,<京釜京義線의 敷設과 韓日 土建會社의 請負工事活動>(≪歷史敎育≫37·38, 1985), 240∼242쪽의 표.

한편 당시 설립된 많은 철도학교에서 서양식 토목기술을 습득한 기술인력이 배출되기 시작했다. 특히 사립철도학교는 대한국내철도용달회사의 사장을 교장으로 영입해 오는 등 졸업생의 사회 진출을 위한 교두보 마련에 힘썼고, 1901년에는 일본인 공학사 오오에 산지로(大江三次郞)를 초빙하여 철도공업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기도 하였다.449)鄭在貞, 위의 글, 234쪽.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철도부설권은 일본에게로 집중되었고 철도부설에서 한국의 기술인력과 토목회사들은 배제되었다.

(다) 철로의 사양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한반도에 철도가 놓이게 되었다. 제일 먼저 개통된 것은 경인선으로 1899년 9월 18일 노량진-제물포 사이 33km가 완성, 영업을 시작했으며, 1900년 6월 한강대교가 준공됨에 따라 11월 남대문까지 개통되었다. 경부선은 1905년 1월 1일 영업을 개시하였고, 경의선은 같은 해 4월 28일 서울 용산-신의주 사이에 군용철도로 운행을 개시했고, 1906년 청천강과 재령강 교량이 준공되어 전 선로가 개통되었다.

한반도 철로는 일본과는 다른 방식으로 부설되었다. 일본은 협궤식인 반면 한반도의 철도는 궤폭 4피트 8인치 반의 표준궤가 채택된 것이다. 이는 한반도의 철도를 일본이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드러내는 중요한 점이다. 일본은 한반도의 철도를 협궤식으로 가설하자는 일부 의견에 대해 한반도의 철도는 만주 및 중국 대륙과 시베리아철도를 연결하기 위한 것임을 들어 표준궤로 채택했다. 즉 한반도의 철도는 그 자체의 중요성보다는 대륙을 연결하는 간선철도로서의 역할이 더 부각되었던 것이다.

사용된 자재 가운데 궤조는 75파운드(약 37kg)를 사용했다. 처음에는 일본제 철강을 사용하려 했으나 제품이 좋지 않아 미국 카네기철강회사의 것을 사용했다.450)鐵道廳 公報擔當官室,≪韓國鐵道史≫ 2(철도청, 1977), 8쪽. 勾配(비탈길 100m에 대한 1m 높이)는 1/100을 표준으로 하였으나 경제사정상 1/80도 인정하였다. 교량설계의 계산 기초는 E호티식으로, 연결기는 중앙연결기를 채용하였으며 제동기는 에어브레이크(Air Break)를 채택했다.451)위의 책, 15∼16쪽.

러일전쟁 이후 시행된 경의선 복선 토목공사에는 국내의 토건회사 및 용역회사들의 참가는 거의 배제되고 건설업 불황으로 곤란을 겪던 일본의 토목회사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또 이 복선공사는 새로운 토목공사 공법의 시험장이 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카시마쿠미(鹿島組)가 담당한 增若터널은 착암기를 이용한 신공법으로 공사되었고, 세이요우샤((盛陽社)와 마쿠미(間組)가 각각 담당했던 청천강 교량공사와 압록강 철교공사에는 일본 토건업 사상 처음으로 潛函공법이 도입되었다. 특히 省峴터널은 터널 규모 자체가 거대할 뿐만 아니라 공사를 보조하기 위한 스위치백이 설치되는 등, 일본 토건업계의 철도 건설사상 신기원을 이루기도 해 이 터널의 조감도는 일왕 明治에게 헌상되기까지 했다고 한다.452)정재정, 앞의 글(1985), 289쪽. 이 같은 신공법의 도입에는 엄청난 인명 피해가 뒤따랐는데, 그 피해는 우리 나라 인부들이나 러시아 및 중국 포로들의 몫이었다. 복선공사에 새로운 공법을 시험적으로 도입한 경험을 토대로 일본 토목업계는 비약적인 기술발전을 이루었고, 그 가운데 카시마쿠미같은 회사는 세계 굴지의 토건회사로 성장할 수 있었다.453)정재정, 위의 글(1985), 289∼290쪽.

(라) 초기의 철도 운영

전 철로가 모두 표준궤로 부설되었기 때문에 차량도 여기에 맞추어 객차·화차가 모두 크고 긴 보기(bogie)式이 이용되었다. 화차는 1차량에 26톤의 짐을 실을 수 있었다.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도입된 기차는 경인선에 투입되었던 미국 부르크스사 제품인 모걸(Mogull)형 탱크기관차, 즉 증기기관차였다. 이 기관차는 3등급으로 구분된 객차 및 화물차를 끌었다. 한편 경부선이 영업을 시작한 1905년 1월 1일, 열차는 서대문과 초량 사이를 다니는 남행과 북행으로 나누어 북행은 오전과 오후에 초량을 출발해 대전 또는 대구까지 운행하고 이튿날 서대문에 도착했다. 남행은 서울에서 출발하여 대전, 대구까지 운행하고 이튿날 초량에 도착했는데 남행과 북행 모두 약 30시간 정도 걸렸다. 급행은 하루에 한 번씩 운행했는데 10시간 정도가 걸렸다. 1908년 4월 1일부터는 부산-신의주간의 매일 1회 왕복 급행열차를 운행했으며 26시간 정도 걸렸다.

나) 증기선 도입을 통한 해운업의 근대화

육상교통 수단의 근대화는 장기간의 시간과 막대한 비용이 투자되어야 가능한 일이지만 해상운송의 서구화는 이보다는 비교적 쉬운 일이었다. 기존의 해로를 이용하면서 재래선박을 기선으로만 대체하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개항 이후 무엇보다도 먼저 조선정부는 기존 해로에 증기선을 도입하여 화물을 운송시키는 방안을 마련했다.

기선을 신속하게 도입한 것은 稅穀운송에서 발생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즉 우리 나라 곡창지대인 삼남지방으로부터 세곡을 빠른 시간 안에 운반해 오는 일은 조선정부의 재정상태를 호전시키기 위한 가장 좋은 방안으로 정부관료들에게 인식되었던 것이다.454)이 글의 우리 나라 기선과 근대 해운업에 관한 부분은 羅愛子,≪韓國近代 海運業發展에 관한 硏究≫(이화여대 박사학위논문, 1994), 37∼73쪽을 정리한 것이다. 기선이 도입되기 이전, 화물 특히 세곡운반을 담당하던 배들은 나무로 만들어져 규모도 작았을 뿐만 아니라 취급할 수 있는 화물의 양도 많지 않았고, 주로 인력과 풍력을 이용하는 것이어서 시간도 많이 소요되었다. 또 풍랑에 의해 침몰되거나 화물들이 바닷물에 젖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 점은 세곡을 독점적으로 운반해 오던 경강상인들과 지방관리, 이서배들이 세곡을 빈번하게 유출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이들의 이런 불법 세곡유출로 정부재정이 매우 빈곤해졌고 이에 따라 조선정부는 백성에게 조세부담을 늘렸다. 그러나 정부재정이 풍부해지지는 않는 현상이 지속되었다. 더욱이 개항으로 일본이 쌀을 대량으로 수입해 가면서 이서배들과 경강상인의 농간이 더욱더 심해졌고 이는 재정을 고갈시켰을 뿐만 아니라 시중 곡가를 앙등시켰다.455)이들은 주로 세곡선이 침몰했거나 풍랑으로 인해 세곡이 바다물에 젖어 버렸다고 허위로 보고함으로써 세미를 불법유출하여 일본인들에게 팔아 버렸던 것이다.

따라서 기선은 재래의 선박을 대체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기선은 한 번에 운반할 수 있는 양이 수천 석에 이르렀고 소요시간도 적게 걸리며 침몰하는 경우도 지극히 드물다는 점이 부각되어 정부관료들로 하여금 매우 효율적인 운송수단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했던 것이다. 즉 기선을 도입함으로써 세곡의 불법유출 원인을 제거하여 재정을 튼튼하게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이런 생각을 토대로 1880년대 이후 조선정부는 기선 도입을 서둘렀다. 우선 조선정부는 재정이 부실했기 때문에 값비싼 기선을 수입하여 직접 운영하기보다는 기선을 운항하는 외국상사와 계약을 맺어 조선 연안의 항로를 개설하는 방안을 채택했다.

(가) 외국상사와의 항로개설 계약체결

근대 기선이 세곡운반에 이용된 것은 1883년 8월의 일이었다. 조선정부는 묄렌도르프로 하여금 1883년 4월 상해의 영국계 상사인 태화양행과 기선의 운항 항로에 대한 계약을 맺게 해 8월부터 上海-부산·인천-長崎의 항로를 南陞號가 월 2회 정기운항하도록 했다. 조선정부는 이 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남승호가 조선 연근해를 항해할 때 적자가 발생하면 해관세에서 반을 보전해 주기로 하는 한편 독점적으로 세곡을 수송하게 하는 특권을 1년간 부여하는 등 태화양행에게 특혜를 제공했다. 이와 같은 특혜를 제공하면서까지 서양 근대기선을 우리 나라 연안에 도입하게 된 데에는 세곡운반과 관련된 주목적 이외에도 조선 근해의 해운업을 장악하고 있는 일본 해운업계를 견제하는 한편 대외무역과 국내상업을 신장시키겠다는 목적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태화양행의 남승호는 계약기간 1년이 만료된 후 계약 연장을 하지 않고 운항을 중단했다. 정부는 그 대책으로 독일의 世昌洋行과 1885년 3월 상해-인천간 항로를 계약하여 希化號를 취항시켰다. 그러나 희화호 역시 불과 6개월 만에 운항을 중단했다. 이 같이 계약 연장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기선 운항이 조기에 중지된 데에는 지방관리들이 기선으로 세곡을 운반하는 일에 비협조적이었고 지방주민 역시 하역작업이 재래 선박과 달라 반발하였던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선이 운항일자를 제대로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기선을 무작정 기다리며 세곡을 露積할 수 없었고 따라서 외국상사와 약속한 세곡의 양을 채울 수 없었던 점이 크게 작용했다.

한편 조선정부는 1884년 5월, 일본 橫濱에서 무역업을 하고 있던 미국 미들톤상사의 대리인과 기선회사를 설립하기 위한 계약을 맺기도 했다. 이 기선회사는 통신·운수를 발달시켜 상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설립이 추진되었다. 비록 이 기선회사가 설립되지는 않았지만 해운업을 근대화시키겠다는 조선정부의 의지를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나) 조선정부의 기선구입

해운업의 근대화와 관련된 업무는 1881년 외교와 서구문물 도입을 담당하기 위해 조직되었던 통리기무아문 郵政司에서 주관했다. 이 통리기무아문이 1884년 갑신정변으로 폐지되어 기선도입에 관한 郵政司의 업무는 1885년 7월에 설치된 機務司내에 轉運署로 이관되었다. 전운서는 1886년 7월 세곡 운송을 전담할 해룡호·조양호·광제호 등 200∼500톤 급의 기선을 구입했다. 이들 기선들은 세곡운반 시기 이외에는 항구에 정박해 있었기 때문에 재정 낭비의 한 원인이 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해안을 경비하는 일이나 일반화물과 승객을 운송하는 일에 기선을 투입하기로 결정하기도 했다. 이 사업을 전개하기 위해 조양호를 1889년에 매각하고 그 대신 독일제 쾌속정 한강호를 도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같은 해 일반화물과 승객 수송업무를 담당하기로 했던 제강호가 좌초되어 이 계획은 처음부터 차질을 빚었다.

전운서는 기선을 도입함으로써 해운업을 근대화하고, 이전 외국상사와 기선운항 계약연장 실패 및 조기 해약를 야기했던 문제점들을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여전히 세곡운반에 얽힌 이서배의 부정은 해결되지 못했다. 오히려 기선들이 개항장 이외의 항구들에서 밀수와 관련된 많은 비리를 저지르는 일이 종종 발생하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운서는 1890년 이후에도 수십만 석의 세곡을 운반하기 위해 일본·독일·노르웨이와 같은 나라들의 상사 소속의 기선과 세곡운반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이들 기선은 주로 마산·진주·목포 등지와 같은 삼남지방과 인천을 연결하는 항로에 취항했다. 또 1892년 말에 이르면 일본으로부터 범선 15척을 구매하기도 했다.

(다) 이운사의 설립

1893년, 조선정부는 利運社를 설립하고 전운서 소속의 기선과 범선을 이양했다. 이운사는 세곡뿐만 아니라 일반화물과 승객을 운송하려는 계획 아래, 즉 자본주의적 경영을 지향하는 해운업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설립된 것이다. 이운사 설립은 전운서 설치로 파생된 많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 가운데 하나였다. 즉 1885년 전운서 설치로 본격화된 관영해운업은 기선구입비를 외채에 의존했고, 또 항해기술자 역시 외국에 의존했을 뿐만 아니라 비싼 기선을 주로 세미의 운반에만 이용함으로써 상당기간을 항구에 정박시켰다. 이와 같은 비효율적 운용으로 재정낭비를 초래했음은 앞에서도 이미 지적했다.

그렇다고 자본주의적 경영을 위해 설립된 이운사의 운영이 원활한 것은 아니었다. 5대의 기선은 주로 세곡운반을 담당했고 일반화물과 이용 여객은 매우 적었다. 따라서 1894년 조세의 금납화로 주수입원인 세곡운송이 불가능하게 되자 이운사의 존립에 관심이 모아지게 되었다. 조선정부는 이운사의 운영을 민간에게 이양하는 방안을 모색했고 1894년 10월 말 그 운영권이 조선 상인들에게로 넘어갔다. 그러나 이듬해인 1895년 일본은 조선정부에 연 8% 저리로 차관 15만 원을 제공한다는 조건으로 이운사의 기선들을 일본 郵船회사에 위탁 경영시킨다는 계약을 체결하게 했다. 일본과 맺은 이 조약의 체결로 조선 연근해의 항로는 일본의 독점적 지배에 놓이게 되었으며 조선정부가 개항 이후 정부 주도로 지속적으로 추진했던 해운업의 근대화는 이로써 막을 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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