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Ⅲ. 근대 과학기술
  • 2. 근대 과학기술의 도입
  • 2) 근대 의료기술
  • (3) 서구 선교사들을 통한 의료기술의 도입

(3) 서구 선교사들을 통한 의료기술의 도입

서양 근대의학 훈련을 받은 사람으로서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들어온 사람은 미국 북장로교의 의료선교사 알렌(Horace N. Allen, 安連)이다.484)알렌의 의료활동에 대해서는 민경배,≪알렌의 宣敎와 近代韓美外交≫(연세대 출판부, 1991)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그는 미국 마이애미의과대학(Miami Medical College)에서 수학하여 의사자격증을 얻은 후, 중국 상해에 의료선교사로 파송되었다가 1884년 9월 미국공사관 부속의사의 자격으로 내한하여 활동하였다. 특히 그 해 12월에 일어난 갑신정변으로 부상을 입은 閔泳翊을 치료하여 국왕의 신임을 얻고 侍醫로 임명되었으며, 그의 건의로 최초의 왕립 서양식 병원인 廣惠院(곧 그 명칭은 濟衆院으로 바뀜)이 1885년 4월에 설립되어, 조선정부의 지원을 받아 운영하였다. 이 병원은 개원하자마자 환자들이 몰려들어 개원 첫 한 해 동안에 입원환자 265명, 외과 수술환자 150명, 간단한 외과 치료환자 394명, 800여 명의 부녀자를 진료하여 총 진료자 수는 10,460명에 이르렀다.485)H. N. Allen, Medical Work in Korea, The Foreign Missionary, 1886, 10월호, 215∼216쪽.
이만열,<한말 미국계 의료선교를 통한 서양의학의 수용>(≪국사관논총≫3, 국사편찬위원회, 1989), 200쪽.
F. Ohlinger, The Beginning of the Medical Work in Korea, The Korean Repository, 1892, 12월호, 356∼357쪽.
민경배, 위의 책, 154쪽.
이를 다시 질병별로 환자수를 세분하면 다음의<표 2>와 같다.486)이만열, 위의 글, 206쪽에서 거듭 인용.
First Annual Report of the Korean Government Hospital, Seoul, under the care of H. N. Allen and J. W. Heron, for the Year Ending April 10th, 1886.

번 호 분 류 병종류 환자수 환자가 가장 많은 병
1 발 열 12 1,147 사일열(713)
2 소화기계질환 30 2,032 소화불량(582)
3 순환기계질환 6 111  
4 호흡기계질환 16 476 천식(148)
5 신경계질환 36 833 간질(307)
6 임파선계질환 2 214 경부임파선비대(212)
7 비뇨생식계 및 매독 30 1,902 매독(760)
8 전신질환 13 365 연주창(146)
9 새로운 병 2 7 음낭부분의 오한(6)
10 눈 병 32 629  
11 귀 병 7 318  
12 종 양 10 145  
13 골 관절 건질환 37 105  
14 외 상 17 140  
15 기 형 5 37  
16 결체조직질환 31 363  
17 피부질환 37 815 옴(160)
18 부인병 12 67 백대하(27)
미 분 류.   721  
335 10,427  

<표 2>광혜원 개원 1차년도 질병별 환자 통계

이 병원은 처음에는 기초적인 의료교육을 받은 바 있는 같은 북장로교 복음선교사 언더우드(H. G. Underwood)와 감리교의 의료선교사 스크랜턴(Wm. B. Scranton, 施蘭敦)이 도왔지만, 스크랜턴은 곧 사임하고 1885년 9월 새로운 진료소를 차려 施病院이라 하였다. 제중원에는 같은 해 6월 미북장로교 소속 의료선교사인 헤론(John W. Heron, 惠論)이 부임하여 알렌을 돕고, 1887년 9월 알렌이 주미한국공사관 서기관으로 전임하자 제중원의 책임을 맡아 운영하였다. 헤론은 미국 테네시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 의료선교사로 부임하였는데, 알렌의 후임으로 제중원을 맡아 운영하다가 1890년 7월 과로로 사망하여 양화진에 묻혔다. 여성 의료선교사로는 엘러즈(Annie J. Ellers)가 1886년에 파송되어 제중원 안에 부인과를 신설하여 활동하였고, 1887년에는 그의 후임으로 의사자격을 가진 호튼(Lillias S. Horton)이 부임하여 부녀과 책임을 맡아 부녀들을 진료하고 민비의 시의로서도 활동하였다.487)이만열, 위의 글, 201쪽.

제중원은 환자의 진료활동만 담당한 것이 아니라, 설립 초기부터 ‘소수의 한국인들에게 의학 교육을 시킬 목적으로’ 병원 안에 의과교실을 개설하였다. 여기서 틈이 나는 대로 알렌과 헤론은 서양의 실용적인 의술을 가르치고 언더우드는 기초과학인 물리와 화학을 가르쳤다. 그러던 것이 1886년 3월에는 정부의 협조를 얻어 제중원의학교로 발전하였다. 의학교는 처음에 16명의 학생을 선발하여 4개월간 시험기간을 거친 후, 그 가운데 4명을 낙제시키고 성적이 우수한 12명을 정규과정에 들어가게 하여 매년 국비로 12명의 학생에게 의학공부를 시키고, 전 과정을 수료하고 졸업하면 정부관리로 등용하여 主事職을 주도록 하였다.488)H. N. Allen, Medical Work in Korea, 앞의 글, 216쪽.
이만열, 위의 글, 201쪽.
그러나 이러한 한국인 의료인 양성계획은 그 후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지는 못한 것 같다.

제중원의 책임을 맡고 있던 헤론이 순직하자 1891년 4월에 내한한 빈튼(C. C. Vinton, 賓頓)이 책임을 맡고, 1893년부터는 애비슨(O. R. Avison)이 책임을 맡았으나 재정문제와 관리의 부패로 이듬해 그 운영이 미북장로교 선교부로 이관되었다. 애비슨은 이 병원을 현대식 시설을 갖춘 선교연합병원으로 발전시키기를 원했다. 1899년 애비슨부부의 건강이 악화되어 긴급 휴가를 얻어 잠시 캐나다에 귀향하였을 때, 애비슨은 건축가인 친구 고든(H. B. Gordon)에게 부탁하여 현대식 병원 설계도를 그리고 병원 건축기금 모금운동을 하였다. 1900년 5월 뉴욕 국제선교대회에서 그의 강연을 감명깊게 들은 스탠다드 석유회사의 지배인 세브란스(L. H. Severance)씨가 장로교선교부에 서울에 근대식 병원을 짓도록 10,000달러를 기증하였다. 1902년 세브란스씨는 5,000달러를 더 기증하였고, 기존의 제중원을 판 대금을 합하여 남대문 근처에 세브란스병원을 건립하여 1904년 11월에 개원하였다. 세브란스병원은 개원하던 해에 7,242명의 환자를 진료하였고, 1905년에는 9,218명, 1906년에는 13,045명, 1907년에는 14,679명이 진료를 받았고, 1908년에는 입원환자만도 655명이었으며, 1909년에는 13,716명(입원 512명), 1910년에는 10,791명(입원 439명)의 환자를 진료하였다.489)이만열, 위의 글, 223쪽, 세브란스병원 진료통계(1903∼1910) 참조.

뿐만 아니라 정부관제에 의해 1899년에 창설된 제중원의학교는 1908년 6월 제1회 졸업생 7명을 배출하였고,490)첫 졸업생은 金熙榮·金弼淳·朴瑞陽·申昌熙·朱賢則·洪錫厚·洪鍾殷이었다. 이듬해 이 의학교는 사립세브란스의학교로 개명하여 4년제의 체계적인 의학교육을 실시하였다. 이 의학교에서는 애비슨·웰즈(J. H. Wells)·샤록스(A. W. Sharrocks) 등 의료선교사들과 한국인 번역 조사들이 협력하여 해부학·무기약학·무기화학·세균학·간호학·생리학·생약학·질병과 치료·피부질환·수술 등에 관한 의학교육에 필요한 교재들을 번역 편찬하여 보급하였다. 이러한 의학교재들은 국내 각 병원의 의료조수 양성에도 교재로 쓰임으로써 서양의학의 도입을 촉진시켰다.491)이만열, 앞의 글, 224쪽. 더욱이 애비슨은 의학교육에서 교파간의 협력을 주장하여 1907년 9월 한국의료선교사회가 조직되고, 1908년부터 여러 교파에서 의료선교사를 파견 협력하였으며, 1910년 세브란스의학교는 한국내 모든 개신교 선교단체의 연합의학교가 되었다.492)위와 같음.

1906년 미북장로교 의료위원회는 북감리교 선교부가 공동으로 간호원양성 교육을 하기로 하고 쉴즈(E. L. Shields)간호원이 중심이 되어 세브란스병원 안에 간호원학교를 설치 운영하였다. 여기서는 임상간호교육과 함께 기초간호술·해부생리학·미생물학·약리학·간호사·간호윤리·산수·국어 등 간호학의 기초적인 과목을 가르쳤다.493)金亨錫,<韓末 韓國人에 의한 西洋醫學 受容>(≪國史館論叢≫5, 국사편찬위원회, 1989), 205쪽. 그리하여 1908년에는 5명이 자격시험을 거쳐 간호원 모자를 쓰고 수술실에서 일하게 되었고, 1910년에는 첫 졸업생을 배출하였다.494)첫 졸업생인 김배세(Bessie Kim)는 미국에 유학한 최초의 한국인 여의사인 김점동(박에스더)의 여동생으로 세브란스병원의 간호과 부과장으로 근무하였다.

조선에 아직 선교의 자유가 완전히 허용되지 않은 상황에서 구미의 각 선교부들은 복음선교에 앞서 의료와 교육사업을 먼저 시작하였다. 1884년 6월 24일부터 7월 8일까지 선교 탐사를 위해서 한국을 방문한 감리교 선교사 매클레이(R. S. Maclay)가 개화파 인사 김옥균을 통해 고종의 윤허를 받은 사업도 바로 교육과 의료사업이었다. 그리하여 각 선교부들은 복음선교사와 함께 의료선교사들을 파송하여 가는 곳마다 진료소를 개설하고 의료사업을 실시하였다. 감리교 의료선교사 스크랜턴은 1885년 6월 정동에 시병원을 세워 운영하였는데, 여기서 1890년 안식년으로 잠시 귀국할 때까지 6년간 2만여 명의 환자를 진료하였다. 1890년 가을 맥길(W. B. McGill)은 남대문 부근에 진료소를 개설하였는데 이것은 남대문 상동병원으로 발전하였다. 1887년 10월에는 최초의 여의사로서 하워드(Meta Howard)가 파송되어 이화학당 구내에 부인진료소를 개설하였는데, 이것이 우리 나라에 세워진 최초의 부인병원으로서 保救女館이라는 이름을 민비로부터 하사받았다. 보구여관은 1892년 동대문분원을 설치하여 여의사 커틀러(M. M. Cutler)·해리스(L. Harris)·에른스버거(E. Ernsberger) 등이 내한하여 활동하였다.

평양에도 1893년 의료선교사 홀(W. J. Hall)부부가 진료소를 개설하여 운영하였고, 1895년 가을 홀이 순직하자,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기홀병원을 세웠다. 북장로교 선교부도 1895년 6월에 내한한 의사 웰즈(J. Hunter Wells, 禹越時)가 평양에 파송되어 1896년 평양에 진료소를 개설하였으며 이듬해 피쉬(Miss Alice Fish)의사가 합류하였다. 이 진료소에서는 1899년까지 3만 6천여 명을 진료하였고 웰즈는 한국인 조수들에게 의학을 가르치기도 하였다.495)이만열, 앞의 글, 212쪽. 이 진료소가 발전하여 평양기독병원이 되었는데, 이 병원은 1923년 기홀병원과 합동하여 평양연합기독병원으로 발전하였다.

부산에도 미국 북장로교 의료선교사 브라운(Hugh M. Brown)부부가 파송되어 1892년 진료소를 개설하여 환자들을 진료하였다. 그에 이어 어빈(C. H. Irvin, 魚乙彬)의사가 진료소를 운영하였는데, 그가 안식년 휴가를 떠나던 1902년까지 남자 30,895명, 여자 18,120명, 어린이 9,197명 등 총 58,185명을 진료하였으며, 5,396건의 왕진과 2,472건의 성공적인 외과수술을 하였다.496)이만열, 위의 글, 212쪽. 이 진료소는 1904년 현대식 시설을 갖춘 전킨(W. M. Junkin)기념병원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 지역 선교는 호주장로교 선교부로 이관되어 1902년 6월 커렐(Hugh Currel, 巨烈)이 부산에 진료소를 개설하였고, 1905년 진료소를 진주로 옮겨 운영하였으며, 이 진료소는 1910년 6월 2층의 건물을 갖춘 페이튼기념병원(培敦病院)으로 발전하였다.497)조영렬,<西歐諸國을 통한 西洋醫學의 受容>(≪國史館論叢≫9, 국사편찬위원회, 1989), 140쪽.

대구에는 1898년 북장로교 소속의 의사 존슨(W. O. Johnson)부부가 파송되어 대구제일교회 안에 제중원이라는 진료소를 운영하였다. 이 진료소는 얼마 후 동산동으로 옮겨 1903년 새 병원을 짓기 시작하여 라이트기념병원이라 하였는데 이것이 대구동산기독병원의 전신이다.

평북 선천에는 1901년 샤록스(A. M. Sharrocks)의사가 파견되어 의료선교 활동을 하였는데, 이것이 발전하여 미동병원이 되었다. 이 병원에는 1905년부터 병원 안에 의료원양성소를 부설하여 1910년 5명의 의료인을 졸업시켰다.

황해도 재령에도 1906년 화이팅(H. C. Whiting, 黃浩里)의사에 의해 의료 선교가 시작되어 1908년 재령병원으로 발전하였고, 여기서도 의료반을 편성하여 의료조수 유몽택을 비롯한 학생들을 한문으로 번역된 서양의학서로 화이팅이 직접 지도하였다.

이 밖에도 북장로교 선교부는 1907년 청주에 널(M. M. Null)의사가 파송되어 진료소를 운영하고, 1909년 강계에 밀즈(R. G. Mills)의사가 파송되어 의료선교를 개시하여 1911년 케네디병원(桂禮知病院)으로 발전하였다.

호남지방의 선교를 맡고 있던 미국남장로교 선교부도 1895년 드루(A. D. Drew)의사가 군산에서 의료선교를 시작한 이래 이듬해에는 진료소를 개설하고 2천여 명을 진료하였으며, 이것이 군산야소병원으로 발전하였다. 전주에는 1896년 해리슨(W. B. Harrison)목사가 파송되어 시약소를 운영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잉골드(Miss M. E. Ingold)의사가 부임하여 진료소를 개설하였다. 그러다가 1904년 포사이드(W. Forsyth)의사가 부임하여 의료선교가 활기를 띠었으며 이것이 전주야소병원으로 발전하였다. 광주에는 1904년 오웬(Owen)의사에 의해 진료소가 개설되고 이것은 광주야소병원으로 발전하였다. 이 밖에도 목포·순천 등지에도 진료소들이 개설 운영되었다.

북감리교 선교부는 서울과 평양 이외에도 공주에 맥길(McGill)과 반버스커크(J. D. Van Buskurk) 의사에 의해 진료소가 개설되었고, 영변에 노튼(A. A. Norton)·밀러(I. M. Miller) 등이 진료소를 개설 운영하였으며, 황해도 해주에는 1909년 켄트(E. W. Kent)에 의해 진료소가 개설되었는데, 이것은 해주구세병원으로 발전하였다.

남감리교 선교부는 1898년 하디(R. A. Hardie)의사를 파송함으로써 송도와 원산을 중심으로 의료선교를 시작하였다. 송도에는 1899년 진료소가 개설되어 1908년에는 아이비기념병원으로 발전하였으며, 원산에는 북감리교의 맥길이 1900년에 진료소를 개설하였으나, 1902년 이 지역이 남감리교 선교지역에 편입됨으로써 1903년부터 남감리교의 로스(J. B. Ross)의사가 의료선교를 맡아 원산구세병원이 되었고, 1915년에는 원산연합기독병원으로 발전하였다.

캐나다장로교 선교부는 원산·성진·함흥 등 함경남북도와 간도를 선교구역으로 하였는데, 1898년에 내한한 그리어슨(R. Grierson, 具禮善) 의료선교사가 이듬해부터 원산에서 의료선교를 하다가 1900년에는 성진으로 옮겨가 시약소 형태의 소규모 의료사업을 하였는데 이것이 1907년 제동병원으로 발전하였다. 함흥에는 1903년 맥밀란(K. McMillan, 孟美蘭)의사가 진로소를 개설하였으며, 이것이 함흥 제혜병원으로 발전하였다. 캐나다선교부는 간도의 용정에도 제창병원을 설립하여 이 지역의 한국인 교포들을 진료하였다.

영국성공회도 1890년 한국선교를 개시하면서 의료선교부터 시작하였다. 한국주재 주교로 서품된 코프(C. J. Corfe)는 해군 동료들이 조성한 ‘해군의료기금’의 지원을 약속받고 동역자로 미국 랭카스터공립병원에서 전문의과정을 마친 내과의사 랜디스(Landis)와 함께 내한하였다.498)이재정,≪대한성공회백년사≫(대한성공회 출판부,1990), 45쪽. 그들은 도착 직후 인천에 진료소를 꾸미고 진료를 시작하였다. 이듬해에는 새 건물을 지어 성누가병원(St. Luke's Hospital;樂善施病院)이라 하였다. 서울에도 1891년 정동에 은퇴한 군의관인 와일스(Julius Wiles)의 책임하에 성베드로병원을 설립하였고, 낙동에 성마태병원을 세워 운영하였다. 성베드로병원은 1891년 여의사 쿡크(Lois Rosa Cooke)와 간호원인 히스코트(Gertrude Heathcote)가 내한하여 이듬해 3월부터 산부인과와 소아과병원으로 전문화되었다.499)이재정, 위의 책, 46∼47쪽. 성마태병원은 1893년부터 발독(Edward H. Baldock)이 내과 겸 외과의사로서 진료를 담당하였는데 12개의 병상을 가지고 있던 이 병원의 진료통계는 다음의<표 3>과 같다.500)이재정, 위의 책, 48쪽.
Record for the 10 Years from 1892 to 1902, Morning Calm, No. 97, Aug. 1903), p. 68.

연도 1893 1894 1895 1896 1897 1898 1899 1900 1901 1902
외래 4,924 12,815 19,275 15,214 17,210 12,891 17,469 12,606 12,118 13,459
입원 112 271 263 104 208 161 162 91 87 138
수술 14 102 113 29 95 41 75 56 43 60

<표 3>성마태병원 진료환자 통계(1893∼1902)

이 밖에도 성공회는 1898년 강화도 온수리에 진료소를 세워 운영하였고, 1909년 충북 진천에 제중원이라는 진료소를 개설하였으며 이 진료소는 후에 애인병원으로 발전하였다.501)조영렬, 앞의 글, 138쪽.

천주교에서도 샬트르바오로수녀회가 1898년 서울에, 1900년 제물포에 진료소를 개설하였고, 1915년 대구에 시약소를 개설하였다. 메리놀수녀회는 1926년 의주와 영유에, 1928년 비현에 시약소를 개설하였고, 베네딕트수도원은 1926년 덕원과 1927년 원산에 각각 시약소를 개설 운영하며 간이진료를 하였다. 병원들은 1930년대에 들어서야 설립되는데, 1931년 원산의 마리아의 도움병원, 1935년 안주성모병원, 1936년 서울의 성모병원과 대구의 해성병원이 설립되고, 그 밖에 진남포·재령·청진·함흥 등지에도 천주교계 병원이 설립되었다.502)≪한국가톨릭대사전≫(한국교회사연구소, 1985), 9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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