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Ⅲ. 근대 과학기술
  • 2. 근대 과학기술의 도입
  • 2) 근대 의료기술
  • (4) 주체적인 서양의술의 수용

(4) 주체적인 서양의술의 수용

서의한역서를 통해서 서양의학을 소개했던 실학자들에 관해서는 앞에서 이야기하였다. 이들 실학자들의 사상을 계승한 개화파들도 서양문물의 수용과 함께 서양의술의 도입에 관한 관심이 많았다. 특히 유대치·오경석 등 개화파 형성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사람들이 중인계층의 의관이거나 역관이었다는 사실에서도 이들이 ‘부국강병’과 ‘민생고’를 해결하기 위해 서양의학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503)갑신정변에 참여하였던 서재필이 미국으로 망명 후 선교사가 되라는 주변의 권유를 물리치고 의학을 전공하였던 것도 우연으로 보기는 어렵다. 갑신정변을 주도한 김옥균이 1884년 1월 11일자≪한성순보≫에<치도약론>이라는 글을 기고하여 “현재 구미 각국은 배우는 바 기술과목이 심히 많으며 그 중 의학을 첫째로 삼으니 인민의 생명에 관계되기 때문이다”라고 한 데서도 개화파의 서양의술에 대한 관심을 읽을 수 있다.504)홍순원,≪조선보건사≫(청년시대, 1989), 217쪽.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박영선은 지석영의 스승으로 수신사 김기수 일행으로 일본에 가 종두법을 배워왔으며, 1879년 지석영도 부산의 제생의원을 찾아가 종두법을 배워 실행하였고, 1880년에는 수신사 김홍집을 수행하고 일본에 가 위생국에서 종두기술을 익히고 돌아와 종두를 보급하면서 일본 군의 마에다(前田淸則)로부터 서양의학을 배웠다. 그는 1882년 임오군변으로 피신하여 있으면서도 국왕에게 강력한 개화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1885년에는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한국인이 저술한 최초의 서양의학서라 할 수 있는≪牛痘新說≫을 지었다. 그는 개화파에 속하여 수차 유배를 당하기도 했으나, 그의 서양의학 보급에 대한 노력이 인정을 받아 1899년 관립의학교를 설립하면서 초대 교장에 임명되어 종두보급과 의료인 양성에 큰 공을 세웠다.505)김형석, 앞의 글, 181∼184쪽.

김익남은 한의로서 1893년 일본에 건너가 일본 관립의학교와 도쿄 자혜의원의학교에서 내과·외과·이비인후과를 수련하고 1890년에 돌아와 관립의학교 교관이 되었다. 그는 군의로도 종사하여 1907년에는 육군위생국의 초대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는 한인의사들로 의사연구회를 조직하여 일인의사들로 조직된 경성의사회와 대립하기도 하였으나, 일제의 병탄으로 의사연구회는 해산당하고 국외로 망명하여 길림성 용정에서 교민들을 대상으로 의료활동을 하였다.

이와는 달리 미국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그들을 따라 미국에 가서 서양의술을 수련하고 돌아온 대표적인 인물로는 김점동(박에스터)과 오긍선을 들 수 있다. 김점동은 이화학당을 거쳐 1890년 의료선교사로 내한한 셔우드(Rosetta Sherwood)의사의 통역 겸 조수로 일하다가 1895년 셔우드가 남편 홀(W. J. Hall)을 잃고 귀국할 때 같이 도미하여, 볼티모어여자의과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여 의학석사학위를 받고 돌아왔다. 그는 최초의 한국인 여의사로서 평양의 保救女館(1903년 廣惠女院으로 개칭)에서 의료활동을 하였으나 1910년 33세로 결핵으로 요절하였다.506)김형석, 위의 글, 186∼187쪽.

吳兢善도 배재학당을 나와 미국인 선교사 스테드만(F. W. Steadman)의 어학선생으로 있다가, 1901년 그가 한국을 떠나면서 소개해 준 군산야소교병원장 알렉산더(Alexander)의 어학선생을 하다가 그의 권유로 같이 도미하여 의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는 센트럴대학을 거쳐 루이빌의과대학에 편입하여 의학을 전공하였다. 1907년 이 학교를 졸업하고 의학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그곳 시립병원에서 인턴과정을 거치고 남장로교 파송 의료선교사로 위촉되어 귀국하였다. 그는 순종의 전의와 대한의원 근무 제의를 거부하고 군산야소병원에 부임하여 의료활동을 하였다. 1912년부터는 세브란스의전 교수로 임명되어 교장까지 지냈으며, 의료인 후진양성에 힘썼다.507)오긍선의 생애에 대해서는 오긍선선생기념사업회 편,≪海觀吳兢善≫(연세대 출판부, 1977) 참조.

정부에서도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위생국을 신설하고 의료·위생사업을 실시하였다. 특히 당시에는 각종 전염병이 유행하였으므로 그 때마다<전염병 예방규칙>을 공포하여 이에 대처토록 하였다. 1895년부터 1910년 사이에 발포된 주요 규칙들을 들면 다음의<표 4>와 같다.

연 도 법령 호수 규정 이름
1895 칙령 제125호 검역규칙
1895 내부령 제2호 호열자 예방규칙
1895 내부령 제4호 호열자 예방소독 진행규칙
1895 내부령 제8호 종두규칙
1895 칙령 제180호 종두의 양성규칙
1898 내부령 제12호 종두소 세칙
1899 내부령 제17호 각 지방 종두규칙
1899 내부령 제19호 전염병 예방규칙
1899 내부령 제20호 호열자 예방규칙
1899 내부령 제21호 장질부사 예방규칙
1899 내부령 제22호 적리 및 디프테리아 예방규칙
1899 내부령 제23호 발진티프스 예방규칙
1899 내부령 제24호 두창 예방규칙
1899 내부령 제25호 전염병 소독규칙
1899 내부령 제26호 검역정선규칙
1900 내부령 제27호 의사규칙
1900 칙령 제25호 한성종두사 관제
1900 내부령 제28호 한성종두사 세칙
1902 조 칙 임시 위생법을 특설하여 유행병을 예방하는 건
1904 주의(奏議) 한성대청결법 시행규정
1909 경시청 고유 1호 콜레라예방에 관한 건
1909 경시청 고유 2호 콜레라예방책으로 청결법을 시행하는 건
1909 한성부 고유 2호 위생에 관한 건
1909 경시청령 제7호 전염병의 예방에 관한 명령의 위배 벌칙

<표 4>전염병 예방과 검역에 관한 규칙(1895∼1910)

이 밖에도 정부는 서양의술의 교육을 위해 1899년 3월 의학교관제를 제정 공포하고, 지석영을 교장으로 임명하여 그 해 8월에 신입생을 선발하였다. 이 학교는 수업연한이 3년이었으며, 1902년에 그 첫 졸업생 19명을 배출하였다.508)첫 졸업생은 金敎準·金明植·洪種旭·劉秉珌·李濟奎·金性集·孫昶秀·韓景敎·許均·崔鎭協·蔡永錫·朴熙達·金鳳觀·崔益煥·崔國鉉·李基正·姜文永·洪錫厚·洪種殷이다(김형석, 앞의 글, 202쪽). 이 의학교는 함께 설립되었던 관립병원이 1900년 광제원으로 개칭되면서 광제원의학교로 불리다가 1907년 3월 광제원이 대한의원으로 통합되면서 의학교도 폐지되고 말았다.

민간차원에서도 1909년 8월 한의들이 대한의사회를 만들어 여기서 이듬해부터 동서의학 강좌를 실시하여 한의학과 함께 서양의학을 강의하였다.509)김형석, 위의 글, 208∼209쪽. 그리하여 일제 치하에서도 서양의술이 널리 보급되었다.

<金承台>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