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1. 무단통치체제의 확립
  • 1) 총독지배체제의 형성

1) 총독지배체제의 형성

 일제의 한국식민지배장치로서의 조선총독부의 설치는 대한제국의 통치권이 완전히 일본정부에게 인수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소위<韓國倂合條約>(1910년 8월 22일 조인, 동월 29일 공포)을 그 근거로 하였다.

 <병합조약>에 의하여 조선왕조는 개국 519년만에 종언을 고하게 되고 대한제국의 국가상태를 소멸시킨 일제는 자기통치권내에 들어온 한반도에 대한 새로운 통치질서를 제도화하기 위한 입법을 하였다. 이것이 곧 1910년 8월 9일에 발표된 ‘대한제국’이란 국호를 ‘朝鮮’으로 개칭한다는<勅令>(칙령 제318호)과 새로운 통치기구를 설치하기 위한<朝鮮總督府 設置에 관한 칙령>(칙령 제319호)이었던 것이다.

 조선총독부 설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조선에 조선총독부를 두며, ②조선총독부에 조선총독을 두고 조선총독은 일본국 천황으로부터 위임의 범위내에서 陸海軍을 통솔하고 일체의 政務를 통할하는 지위에 있으며, ③통치조직의 급격한 변화를 피하기 위하여 우선 기존 ‘한국통감부’는 ‘조선총독부’로 명칭을 바꾸고 제3대 통감 테라우치는 그대로 계승해서 초대 조선총독이 되었다. ④ 구한국정부 소속관청들을 점차로 축소시켜 흡수하는 방법을 택하였으며 칙령이 공포된 지 약 1개월이 경과하여 식민통치권을 구축하는 제반준비(각종 기관의 통폐합 등)가 완료되는 1910년 9월 30일에는 곧<朝鮮總督府官制>(칙령 제354호)를 공포하였다. 이리하여 동년 10월 1일을 기하여 육군대신겸 통감 테라우치가 육군대신겸 조선총독으로 임명되었다.

 <朝鮮總督府及其所屬官署官制>에 의하여 완성된 조선식민통치조직은 대만과 같은 다른 일본식민지의 경우와는 달리 한국에 있어서는 치열한 항일운동을 배경으로 성립한 정치조직이며 군사상 중요한 의의를 갖는 지역인 만큼 같은 무관총독이되 조선총독의 지위와 권한은 대만보다 우위에 있었다. 특히 1919년 3·1운동까지의 시기는 강대한 헌병경찰권력을 배경으로 폭력적인 군사통치를 자행한 무단통치기로 특징지울 수 있겠으며 그 권력을 뒷받침으로 한국산업경제를 일본에 예속화하고 한민족을 동화·말살시키는 식민지배체제를 본격적으로 편성하는 초기의 제반 기초작업이 수행된 것이다.

 일본국 法制上의 한국의 지위를 살펴보면 일본이 병합 후 추구한 한국에 대한 궁극의 정책기조는 ‘同化主義’, 즉 한국을 “마치 시코구(四國)·큐슈(九州)와 같은 모양을 띠는 지역으로 도달케 하는 일”이었다.006) 大藏省,≪日本人の海外活動に關する歷史的調査≫(朝鮮編) 통권 第2分冊, 2∼3쪽. 그러나 실제의 법제상의 지위는 민족차별정책을 기초로 하는 한국의 屬領化 및 식민지화였다. 병합 후 한국의 구지배층은 전부 정권으로부터 배제하고 국적은 동일하면서도 한국을 일본헌법의 적용범위 외에 두어 참정권의 제2의 형식인 자치는 물론이고 제1의 형식인 일본의회에의 참가나 한국 내 지방행정에 있어서 종래의 전통적인 지방민의 참여까지도 폐지해서 헌병경찰에 의한 무단정치를 강행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對韓政策 중 한국의 법률상 지위에 관하여 규정된 것을 보면<병합에 관한 詔書>나<對韓基本方針>007) 金雲泰, 앞의 책, 143∼144쪽, 제3장 제5절<총독통치의 책정·병합의 기본방책>.
≪日本外交文書≫第四部の二, 昭和 46년 3월, 351∼356쪽.
에서는 소위 ‘一視同仁’을 표방하면서 실제에 있어서는 한국을 헌법적용범위 외에 두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

 병합 당시 일본군부는<합방 후 한반도통치와 제국헌법과의 관계>008)<寺內正毅 關係文書>書類, 439∼455쪽.라는 문서에서 양국통치자의 ‘합의’에 의하여 성립한<병합조약>에 의하여 일본국이 된 한국이기는 하지만 “한반도의 민정·풍속 및 관습 등은 帝國內地와 판이하고 其文化程度는 內地와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 다른 속령과 같이 일본헌법의 적용범위 외에 두어 조선총독의 ‘명령’으로 통치하여야 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 또한 공법학자 야마다 산료(山田三良)는 테라우치에의 答申書에서 “합병 후에 있어서 조선인의 법적 지위는 외견상은 일본국적을 취득하나 이 때문에 조선인이 전적으로 일본인과 동일하게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국내법에서는 차별대우가 가능하다. 다만 외국에 대해서만 일본인이 되는 것에 불과하다”고 하였다.009)<寺內正毅 關係文書>, 山田三良 答申書.

 이와 같은 법이론은 병합 후 대내적으로는 한국인에 대한 민족차별정책을 당연한 것으로 제도화하는 동시에 대외적으로는 해외에서 항일민족독립운동을 하던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체포·압송하는 데 이용하였다.010) 小松外事課長,<間島及鴨綠江沿岸ニ於ケル領事裁判ト朝鮮總督府裁判トノ關係ニ關スル意見>, 위의 書類 二八(ハ) 및 秋山參事官, 위의 書類. 二八(ホ). 이와 같이 병합 후의 한국인의 법적 지위는 의무에 있어서는 ‘일본인’으로 취급되고 권리에 있어서는 ‘일본인’이 아닌 일종의 특이한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단통치시기에 한국민중은 주권의 회복을 최대의 염원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만큼 일본국적편입을 큰 수치로 생각하였을 뿐만 아니라 거족적인 반일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던 만큼 참정권 문제가 논의될 시기가 아니었다.

 다음 조선총독부의 기구를 간략히 살펴보면 조선총독부는 總督官房 외에 총무부·내무부·탁지부·농상공부·사법부의 5부로 구성되고 각 부의 長을 長官이라 칭하고 또 각 부에 局을 두어 勅任의 局長을 두었다. 그리고 外局으로 取調局·철도국·통신국·임시토지조사국·전매국·인쇄국을 두되 취조국·철도국·통신국에 장관을, 그리고 임시토지조사국에는 총재·부총재를 두었다. 이밖에 조선총독부의 所屬官署를 살펴보면 중추원, 각도 警務總監部 재판소·감옥·세관·전매국·인쇄국·營林廠·의원·평양광업소·勸業模範場·工業傳習所·土木會議·중학교·성균관·법학교·官立師範學校·官立高等學校·官立外國語學校·官立實業學校·官立高等女學校 각 直轄普通學校 등이 있었다. 이와 같이 기구의 규모가 팽창하고 특히 상층관리부에 고급관리가 급증한 데 반하여 실제 사무를 담당하는 사무관·判任官급은 비교적 적은 기형적 구조를 띠게 되었다. 이는 오로지 총독부 직속의 5부가 한국정부의 각 부를 계승하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조선총독부의 통치체제를 기능별로 중앙행정기관·지방행정기관·탄압기관·자문조사기관·통화정책기관 및 경제약탈기관 등 제 구조로 분류하고 그 직원수를 보면 다음<표 2>와 같다.011) 朝鮮總督府 官制(勅令 354호).
≪朝鮮總督府 施政二十五年史≫(京城, 昭和 10년), 27∼29쪽.
≪朝鮮總督府施政年報≫1910(京城, 1912), 34∼36쪽(직원수 통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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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2>조선총독부 및 소속관서 분과일람 (1911년 3월 31일 현재)
<표 2>조선총독부 및 소속관서 분과일람 (1911년 3월 31일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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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 같이 1910년<조선총독부 시정연보>에 나타난 조선총독부 관서 직원통계(<표 3>참조)에 의하면 총직원 15,113명 중 다음<표 3>에서 보다시피 그 3분의 1 이상인 5,707명이 경제약탈기관에 종사하고 탄압기관인 치안기관(2,600명)·사법기관(1,617명)에 4,217명이 종사하고 지방행정기관에 4,097명, 그리고 중앙행정기관에 974명이 각각 배치되고 있다. 이 통계를 보면 경제약탈기관이 위주인 것 같으나 실은 탄압기관에 헌병 11,143명, 경찰 5,698명, 계 16,342명이라는 압도적 수의 직원을 두었다.012) 朴殷植,≪韓國獨立運動之血史≫, 40쪽. 여기에 탄압기관으로서 군대를 포함한다면 그 인력은 방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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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3>조선총독부 기능별 통치체제
<표 3>조선총독부 기능별 통치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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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로써 조선총독부의 성격을 개평한다면 탄압적 치안위주, 약탈본위의 武斷統治組織 또는 軍政組織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政務總監은 총독의 지휘하에 일체의 政務를 사찰·감독하는 최고통제기관의 구실을 하고 문관은 보조기관에 불과하였다. 이와 같은 무단통치조직은 한민족에 대한 극한적인 억압·刑獄·유린·수탈을 자행한 전체주의적 탄압과 그리고 경제적 수탈 및 민족문화의 말살과 동화정책을 강요하였다. 이와 같이 한국의 근대화와는 역행하는 반동적 식민정책을 수행하는 한편 일제의 대륙침략정책을 구축하는 군사적 기능을 담당한 것이다.

 이 통제체제는 1912년 4월과 1915년 4월의 두 차례의 관제개정으로 그 통치기능의 확장·강화를 꾀하였으며 편제상으로는 감원과 기구간소화를 기하였을 뿐 큰 변동은 없었다. 그리고 직원숫자 중 치안기관의 인원수는 자료에 따라 일정하지 않으나 여기에는 헌병(헌병대 본부 이하 653개 기관에 1910년 12월 현재 2,019명, 그리고 1911년 현재는 7,749명으로 격증되었음)과 순사보(한국인으로 3,131명), 그리고 探偵(3,000명) 등 상당수의 기관원이 빠져 있는 것이다.013) 朴慶植,≪日本帝國主義の朝鮮支配≫上(東京:靑木書店, 1973), 40∼41쪽(조선총독부 동계연감자료) 참고. 이 치안담당의 경찰 및 헌병인원은 매년 격증하고 있어014) 1910년에는 헌병기관 653, 인원 2,019명, 경찰기관 481, 인원 5,881명이었으나, 1911년에는 경찰관서 678, 인원 6,222명과 헌병대 935, 헌병인원 7,749명으로 증가하고, 다시 1918년 말에는 경차관서 738, 인원 6,287명, 헌병대 1,048, 헌병인원 8,054명으로 증가하고 있다(朴慶植, 위의 책, 41∼42쪽). 총독부 전체직원 중 압도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다음으로 경제약탈기관과 지방행정기관·사법기관 및 중앙행정기관 등의 순위로 직원수 비중이 배정되어 있어 결국 총독부 통치체제의 기본성격이 무단적 치안유지와 경제적 침탈에 중점을 두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다음 무단통치체제의 특성으로 헌병경찰제도와 직접통치방식을 들 수 있겠다. 즉 헌병경찰제도로서 상징되는 일제의 전대미문의 강압정치는 테라우치가 “조선인은 우리 법규에 복종하든지 아니면 죽음을 각오하든지 그 어느 것을 택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공갈한 말에서도 단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본래 한말 일본의 헌병경찰제도 그 자체는 의병토벌의 과정에서 창설된 ‘소지역 완전군사점령체제’를 전국적 규모로 적용한 것이었다. 1907년에 전국의 總因人數가 불과 400명이었던 것이 1911년에는 18,100여 건, 1913년에 21,400여 건, 1918년에는 82,121건으로 급증한 것015) 姜德相,≪現代史資料≫25, 朝鮮Ⅰ(みすず書房, 1966), 12쪽.으로 미루어 보아 한민족의 항일독립의 志向이 얼마나 강렬하고 한편 일본의 탄압이 얼마나 가혹하였던가를 증명하는 좋은 증거라고 하겠다. 일본은 후발자본주의 국가로서 원시적 축적을 위하여 무단정치를 강행하여 한국의 富를 철저히 수탈한 것이다. 이와 같은 사정에서 일본은 러일전쟁 후 형식상 보호정치체제로 왕조권력을 종속화시키는 과정을 거쳐 병합 후 총독부 체제에서는 조선의 구지배층을 헌신짝처럼 내버리고 어떤 계층에도 정치권력을 나누어주지 않고 모든 중요 관직을 일본인이 독점하는 직접통치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이러한 일제의 지배방식은 3·1운동의 충격을 받은 후에도 기본적으로 큰 변화가 없었다.016) 한국인 관리임용상황은 3·1운동 직전의 1918년도 조선총독부 및 소속관서의 직원(囑託·雇員 포함) 총수는 21,302명이었다. 그 중 한국인은 8,437명(39.6%), 일본인은 12,865명이었다(조선총독부,≪조선총독부 통계연보≫, 1918년도, 제597표). 그러나 1920년 말에는 총수 36,540명 중 한국인은 14,157명(38.5%)으로서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약 1% 감소로 나타나고 있고(위의 책, 1920년도, 제7편, 제70표), 1922년에는 총수 41,803명 중 한국인은 16,464명(39.4%)(위의 책, 1922년도, 제7편, 제78표), 1925년에는 총수41,458명 중 한국인 14,771명(35.6%)(위의 책, 1925년도, 제22편, 제438∼439표), 1926년도에는 총수 42,544명 중 한국인은 15,293명(35.9%)(위의 책, 1926년도, 제439표)로 감소하였다.
위의 1920년 말과 1922년 이후의 官公吏 총원수의 증가는 3·1운동 후 헌병경찰제도의 폐지와 보통경찰제도의 신설에 따르는 경찰관의 증원(헌병보조원의 순사채용 등)과 지방제도 개정(1921년 이래 시행)에 따르는 府·郡·面 등 지방청의 기구확장에 기인하는 것이며 증원된 한국인 대부분은 判任官 이하의 囑託·庫員으로서 소수의 친일분자를 제외하고는 정책직위에 충원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일본이 총독정치 초기부터 철저한 직접통치방식으로 한민족을 지배한 원인은 첫째, 뒤늦게 제국주의 국가대열에 뛰어든 일본자본주의의 미숙함으로 인해 한국의 정치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고 한국의 부와 이권을 철저히 수탈하기 위해서였다.

 둘째, 일제지배층의 사기행위와 친일지배층의 매국반역행위로 주권이 찬탈당한 데 대하여 분격하고 궐기한 의병투쟁과 3·1독립운동 등 치열한 반침략항일투쟁에 대항하기 위해서 모든 요직을 일본인이 독점하는 절박한 지배방식을 택하였던 것이다.

 셋째, 한민족사회가 ‘복합사회(plural society)’017) J. S. Furnivall은 서구제국주의의 식민지였던 熱帶植民地 사회를 plural society라고 특징지웠다. 한국사회는 구조상 인종적 복합성이나 사회계층간의 신분상 장벽 또는 종교상의 대립 등 분립화나 할거화가 없는 사회이기 때문에 구미제국주의가 흔히 이용한 분할통치정책을 운용하기 곤란하였다(板垣與一,≪アジアの民族主義と經濟發展≫, 4∼9쪽)고 보는 학자도 있었다.가 아닌 역사적·문화적 전통을 계승한 통합적 단일민족사회로서 분할통치정책을 운용하는 데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인 직접통치하에서 친일파를 육성·이용하는 민족분열정책을 구사한 것이다.

 넷째로, 일제의 대한식민정책의 기본적 방침으로 소위 동화정책 또는 內地延長主義 정책을 관철하여 한민족을 말살 또는 만주대륙으로 추방하고 그 대신 그들의 과잉인구를 한반도에 이식시켜 점령하기 위해서였다.

 다섯째로, 일본인의 대륙문화에 대한 역사적·전통적 열등의식018) 田中正俊,<アジア硏究におはる感性と理論>(幼方直吉 編,≪歷史像再構成の課題≫), 268∼269쪽.은 일본인의 직접통치를 통한 문화적 침식을 촉구하는 동기가 되었다.

 다음 朝鮮總督의 지위와 권한에 관하여 살펴보자. 조선총독은 일본천황을 제외한 누구로부터도 일반적 행정감독을 받지 않는, 환언하면 천황에 直隷하는 최고의 행정관으로서 초연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정부에서는 일본천황에 직접 상소하는 권한은 법률상으로 총리대신만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 조선총독의 경우에도 내각총리대신을 거쳐 상소하여 재가를 받는다고 형식상 규정했지만, 특히 ‘朝鮮總督은 천황에 直隷해서 조선을 관할’하며 제반 정무를 통리하는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대체로 조선관할에 관한한 개별적으로 내각총리대신과 동등한 권한을 가지고 천황에 직접 보고하여 재가를 받는 지위에 있었다고 해석된다.019) 萩原彦三,≪朝鮮總督府施政の法制上の基礎≫(昭和 37년 11월 21일, 朝鮮史料硏究會講述).
友邦協會,≪朝鮮總督府官制とその行政機構≫(昭和 44년), 2쪽.

 이와 같이 조선총독은 일본천황에 직례한 특별한 지위로서 한국에 있어서 全權을 위임받은 통치자였다. 총독은 親任官으로 육해군대장 중에서 임명되며 한국에 있어서의 행정·입법·사법권은 물론 육해군을 통솔하여 한국방비의 군사기능을 관장하였다.020) 朝鮮總督府官制(1910년 9월 30일) 제1∼3조.

 따라서 조선총독은 일본정부에 있어서도 내각총리대신과 거의 동격이었는 바 역대총독이 거의 총리대신으로 승격되었음이 그 지위를 단적으로 말해 준다. 아울러 육해군대장이므로 일본의 軍部統帥權 독립에 따라 정치적 지위에 있어 더욱 安固하였다. 그리고 조선총독은 법제상은 내각총리대신을 거쳐 상소·재가받게 되었으나 사실상 총리대신의 지휘·감독을 받지 않는 것이 관례였으며 천황 이외의 다른 기관의 통제를 받지 않는 초연한 독립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고 그 지위에 상응하는 광대한 권한이 부여되었다.021) 朝鮮總督府 官制 및 同 分掌規定(1910년 9월 30일).

 이상 논급한 바와 같은 일본의 식민지 통치체제의 특징과 조선총독의 지위의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조선총독은 다음과 같은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政務統理權이다. 식민지 조선의 통치는 원칙적으로 총독에 위임되어 있으며 총독은 식민지 조선에 대한 ‘제반의 政務’를 통할한다(관제 제3조). 이 ‘제반의 政務’ 속에는 행정뿐만 아니라 입법·사법 등의 모든 사항이 포함되는 것이며, 따라서 조선총독은 식민지 한국에서 統合行政權을 보유하고 있었다.

 둘째, 軍隊統率權이다. 총독은 ‘위임의 범위내에서 육해군을 통솔하며’(관제 제3조 제1항) 군대통솔권이라고 하여 군대편제나 군정 등을 제외하고 광범한 범위내에서 군대지휘권과 아울러 치안상 필요에 따라 出兵請求權을 가지고 있었다. 이 출병청구권은 1919년의 관제개정에 의하여 총독에 대한 병권위임(1911년)이 해제되면서 새로 부여된 권한이었다. 역대 총독이 육해군대장의 현역에 있는 자였기 때문에 이 권한은 사실상 효율적으로 발휘되었다. 總督官房 武官室에는 무관 2인과 전속부관 1인을 두고 이들이 군사참모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총독은 필요에 따라서는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군인과 군속을 만주와 연해주에도 파견할 권한을 부여받고 있었다. 그들은 “당시 조선이 대륙에 대한 국토방위의 제1선에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군사상 커다란 권한을 부여하고 있었다”022) 田保橋潔,≪朝鮮統治史論稿≫復刊(성진문화사, 1973), 52쪽.고 하나,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의 진압도 그 한 목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朝鮮駐箚憲兵隊는 신분상 육군대신의 관할에 속하나 그 직무집행에 있어서 총독의 지휘·감독을 받게 되어 있는 것이다(<朝鮮憲兵條例(1910)>제1조). 즉 조선총독은 육해군의 통솔권과 駐箚憲兵의 지휘권을 갖고 한국방비와 치안의 책임을 가진 軍事統師權者였다.

 셋째, 立法權이다. 조선총독에게는 大權의 위임에 의하여 법률과 동일한 효력을 가진 법규명령, 즉 制令을 발포하고(1911년 법률 제30호 제1조) 아울러<朝鮮總督府令>을 발할 권한이 있었다. 조선총독의 制令權은 일본헌병질서의 예외적인 특권으로서 일본천황의 재가를 필요로 하나 긴급할 때는 절차를 생략하고 制令을 발할 수 있었다. 더욱이 행정권에 속하는 府令은 하등의 승인이나 절차가 필요 없이 입법할 수 있었다. 또한 부령으로 1년 이하의 자유형이나 200원 이하의 재산형을 恣意로 정할 수 있었으니 총독은 구한국의 국왕보다도 훨씬 강력하고 사실상 절대군주국의 帝王을 방불케 하는 입법권이 보장된 셈이었다.

 넷째, 司法權이다. 조선총독은 자신이 발한 制令으로<朝鮮總督府 裁判所令>(1910년 제령 제6호),<조선총독부 判事及 검사의 임용에 관한 건>(1911년 제령 제5호) 및<조선총독부 판사징계령>(1911년 제령 제5호) 등을 제정하였다. 이들을 통하여 총독은 식민지 한국에 있어서 재판소의 新設改廢와 판사의 임면·징계를 자기재량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여 사법기관은 총독부 예하의 행정관서와 같은 위치에 있었으며 사법관의 신분도 일반행정관리와 다를 바 없었다. 따라서 사법권의 독립이 한국에서는 완전히 무시되었다.

 다섯째, 李王職 및 朝鮮貴族에 대한 특별권한이다. 조선총독은 행정기관으로서 광범한 권한을 보유하고 아울러 특별한 위임에 의하여 한국에 있어서 입법권을 비롯하여 군대통솔권, 사법권을 보유할 뿐만 아니라 이왕직 및 조선귀족에 관한 황실기관으로서의 특별권한도 보유하고 있었다.

 이상의 조선총독의 지위와 제권한으로 미루어 보아 조선총독은 본국 정부의 통제를 거의 받지 않고 오로지 천황에게만 책임을 지는 지위에서 행정·군사·입법·사법·이왕직 및 조선귀족 등의 모든 정무에 대하여 독재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조선총독은 하나의 독립왕국의 전제군주와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023) 朴殷植, 앞의 책, 32쪽. 특히 그의 제령 제정·발포권은 한반도에 있어서 그의 지위와 권한을 절대화시키기 위한 중요 법적 수단이었던 것이다.

 다음 中央行政組織을 요약하면 조선총독의 독재적 권한은 조선총독부 통치체제의 근간을 이루는 중앙 및 지방행정기관을 통하여 행사되었다. 그 중 중앙행정기관은 文武 양면에서 총독을 보필하는 總督官房을 비롯하여 外事·인사·회계를 관장하는 총무부, 지방·學務를 관장하는 내무부, 세관·司稅·司計를 관장하는 度支部, 殖産·상공을 관장하는 농상공부, 민사·형사를 관장하는 사법부 등 1房·5部·9局으로 구성되었다(앞의<표 2>참고).

 총독부의 행정사무는 총독의 최고의 보좌관으로서 제2인자인 政務總監에 의해 통리·감독되었다. 그러나 정무총감은 문관의 親任官으로 무관총독제하에서 그 권능이 제약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직책은 “총독을 보좌하며 府務를 통리하고 각 部局의 사무를 감독한다”024) 朝鮮總督府 官制(1910년 9월 30일) 제8조 3항.는 정도의 극히 행정적인 권한에 불과하였다.

 일본은 ‘통치방법’025) 朴殷植, 앞의 책, 31쪽.
金雲泰, 앞의 책, 143∼144쪽.
에서 “조선에 있어서 관리는 그 계급에 따라 될 수 있는 한 다수의 조선인을 채용하는 방침을 취할 것”을 선언하였으나 실은 다음과 같은 한국인 임용제한의 불문법이 있었다.026) 朴殷植, 위의 책, 31쪽.

① 가급적 한국인 관리의 등용을 요하지 않는다. ② 부득이한 사정으로 임용할 경우에 과학·기능소유자를 반드시 배제한다. ③ 한국인 관리는 아예 중요 지위에는 충원하지 않는다. ④ 한국인 고등관의 봉급이 100원, 그리고 판임관의 봉급이 履歷者로서 30원에 이르면 반드시 퇴직시킨다. ⑤ 재판소 검사에는 한국인을 임용하지 않는다.

 朴殷植은 당시의 사정을 “이상의 불문법에 의하여 총독부의 관제가 실시되자 구한국정부관리는 전부 해산되고 그 일부나마 임용된 자는 겨우 287인이었으나 총독부 행정기관에 참여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고 오직 李王職員, 중추원 및 經學院 직원, 지방청 장관, 군수와 소속관서원, 하급관리, 서기, 통역들뿐이었다. 그리고 이들 287인은 전혀 지식의 수양과 과학기능을 갖고 있지 않았던 자들이었고 단지 순종하는 노예의 자격을 가진 자들 뿐이었다”고 술회하고 있다.027) 朴殷植, 위의 책, 31∼32쪽. 이로써 중앙행정기관 속에는 한국인 관리는 거의 채용되어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911년 조선총독부 발행의 직원록에 의하면 1,000명에 가까운 총독부 내 직원 중 한국인은 44인 뿐이었고, 그것도 대개 屬·技手·통역생 등의 말단직위였다.028) 朝鮮總督府 編,≪朝鮮總督府及 所屬官署 職員錄≫(서울:1911) 참조. 다시 박은식에 의하면 “일본인 관리의 보수액수는 한국인 관리보다 3배 이상으로 많았으며 일본인의 봉급액은 1,600만 원을 헤아리나 한국인은 불과 100만 원이었으니 이로써 행정기관은 우리 한국인 생활을 침탈하여 일본인을 양육시킨 것”이다.029) 朴殷植, 앞의 책, 30쪽. 다시 말하면 총독통치의 모든 주요행정은 일본인만으로 독점적으로 결행되었고 설혹 한국인이 간부직원이 되어도 李王職 長官·參議 같은 유명무실한 직위에 소외시키거나 극소수의 친일 한국인을 地方道長官이나 군수 같은 對民接觸의 직위에 전시효과를 노려 등용하는 데 불과하였다. 말단 한국인 관리도 기계적인 업무 외에는 접근시키지 않았고 신분·보수·대우 등 모든 면에서 한국인의 차별대우는 극심하였다. 이와 같은 일본의 對한국식민통치방법을 ‘직접통치’라고 특징지을 수 있는데, 이것은 가령 戰前 영국의 對印度 간접식민통치방식과 대조가 된다고 본다.

 다음 지방행정조직은 전국의 행정구역을 13道로 구획하고 그 밑에 府·郡·島가 있으며 말단행정단위로 邑·面을 둔 3단계 조직이었다.030) 朝鮮總督府 地方官制(1910년 9월 29일 칙령 제357호). 조선총독부의 설치에 따라 ‘倂合’전의 지방제도인 13道·11府·317郡과 이 밖에 理事廳·財務監督 및 財務署 등을 지방 일반관청에 통합개폐하고 중앙의 직원을 감축하여 지방기관에 이동배치하고 중앙과 지방행정체계의 통합을 꾀하였다.

 道에는 구한국의 관찰사를 道長官으로 개칭하고 勅任 또는 奏任官인 도장관 밑에 서무와 회계를 담당하고 장관을 보좌하는 長官官房과 지방·勸業·학교를 담당한 내무부, 세무·理財를 담당한 재무부로 조직되었으며 道事務官인 部長을 두었다. 특히 지방경찰제도를 도장관에 부속시키지 않고 경무총장에 직속시켜 독립시킨 것이 특징이며, 이는 이미 병합 전에 경찰권이 일본에 넘어가 헌병경찰조직이 지방행정기구와 별도로 경무총장에게 직속되어 지방치안을 담당하고 있었던 제도를 승계했기 때문이다.

 지방통치기구의 한 특징으로 관직구조가 철저한 직급제에 입각한 階序制를 이루고 있었다는 점이다. 위로는 최고의 親任官으로부터 高等官 1∼2등급의 勅任官과 3∼9등급의 奏任官이 있었고, 아래로는 하급관리로서 1∼4등급의 判任官이 있었으며, 제일 밑에 雇員이 있었다. 이들 상하계급간에는 엄격한 차별을 두었으며, 전체적으로 철저한 중앙집권주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도장관의 자문기관으로 각 도에 한국인으로 임용하는 參與官 1인을 두었으며 또한 도내에 거주하는 한국인으로서 학식과 명망 있는 자로서 參事 3인을 명예직으로 임명하여 臨時命으로 도청사무에 복무하는 동시에 도장관의 자문에 응하게 하였다.

 도 밑에 府·郡·島의 중앙행정기관을 두고 부에는 府尹, 군에는 郡守, 도에는 島司가 도장관의 지휘·감독을 받아 施政하였다. 부는 舊理事廳所在地를 그대로 개칭한 것이며 경성·인천·부산·원산·대구·평양·목포·군산·마산·진남포·신의주·청진의 12개소에 설치하였다. 원래 개항장이었던 관계로 주로 일본인이 집단거주하는 특수행정구역이 되었다. 따라서 부윤은 대개 전이사관이었던 일본인이 임명되고 자치적인 특권을 누렸다.031) 府·郡은 제2급 지방행정구역으로서 종래 1首府·11府·317郡이었으나 신관제에서는 종래의 漢城府를 京城府로 개정해서 이를 경기도의 관할에 소속시키고 그 밖에 대구·평양·청진(宣寧)의 3郡을 府로 성진·경흥·용천의 3府를 郡으로 개정한 결과 府·郡의 수는 12府·317郡이 되었다. 각 府·郡에도 道와 같이 부윤·군수의 자문기관으로서 각 관내에 거주하는 학식과 명망 있는 한국인 중에서 참사 2인을 임명하고, 이들은 일반행정에는 관여하지 못하되 지역의 산업·토목·수리 등 직접적 이해관계사항에 한하여 그 자문에 응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말단 행정기관인 면장은 종래 민선 또는 관선으로서 군수를 보조하고 지방행정, 특히 收稅에 관여하였다. 신제도에서는 지방관 관제 속에 면 및 면장에 관한 규정을 설치하여 부·군 밑에 면을 두고 면장은 判任待遇를 하고 부윤 또는 군수의 지휘·감독을 받아 면내 행정사무를 보조집행하는 하급행정기관으로 규정하였다.032) 1910년 칙령 제357호 제25조 및 同條에 의거한 1910년 11월 1일 부령 제8호로 면에 관한 규정을 제정·공포하여 면장은 도장관이 임면하고 면의 명칭 및 구역의 변경은 총독의 인가로 道長官이 정하는 등의 사항이 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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