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2. 식민지 수탈구조의 구축
  • 1) 토지조사사업과 토지수탈기반의 마련
  • (1) 토지조사사업의 전사

(1) 토지조사사업의 전사

 토지조사사업은 일제가 한국에서 근대화라는 미명 아래 토지소유권의 확인과 지세부과체계의 정비를 강압적으로 추진한 것이었다. 그 결과 조선총독부는 방대한 토지를 소유하는 최대의 지주가 되었고 안정적 지세 수입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토지의 상품화가 촉진됨에 따라 자금이 풍부한 일본인의 토지 매수가 급증하고, 영세한 한국 농민의 토지 상실이 가속화하여 농촌은 지주-소작 관계가 강화되는 등 중농층의 몰락이 심했다. 삶의 기반을 잃고 도시와 해외로 이주하는 농민의 수가 급증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일제는 1910년 이전에 이미 한국에서 광범위하게 토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러일전쟁 이래 일본의 회사와 개인은 큰 강 주변의 비옥한 토지를 한국인의 명의로 빌리는 등의 수단을 동원하여 게걸스럽게 매수해 나갔다.

 그런데 일제가 한국에서 토지를 마음대로 차지하기 위해서는 외국인의 토지소유를 공권력이 합법적으로 인정하고 또 그것을 배타적 소유로서 확인해줄 수 있는 법률적·제도적 장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지만 한국정부는 1876년의 국교확대 이래 지정된 지역 이외에서의 외국인의 토지소유를 엄격하게 금지해왔다. 일제가 1906년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대한제국을 사실상 半植民地로서 지배하면서부터 토지에 관한 법령과 규칙을 잇따라 제정·공포한 것은 한국정부의 이러한 정책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063) 각 법률과 규칙의 내용과 성격에 대해서는 崔元奎,≪韓末 日帝初期 土地調査와 土地法 硏究≫(연세대 박사학위논문, 1994)에 잘 정리되어 있다.

 1906년 10월에 발포한<토지가옥증명규칙>은 일제가 외국인(일본인)의 토지소유를 전국으로 확대하고, 또 그 소유권을 법적으로 공인하도록 만들기 위해 마련한 법령이었다. 이 규칙은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종래 民間慣行의 거래제도에 관청의 증명제도를 덧붙인 것으로서, 부동산거래 계약에 대한 公的 증거능력을 제공하고자 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일본인의 토지소유를 합법화하기 위해 마련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의 저항을 우려하여 潛賣土地를 합법화하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이 증명규칙은 잠매토지 합법화의 사전 정지작업이었으며, 일본인의 투자확대를 겨냥하여 제정한 것이었다.064) 崔元奎, 위의 책, 355쪽.

 한국은 국교확대 이래 거류지 및 그 주변 1리 이내 이외에는 외국인에게 토지소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것은 한국에서 토지를 장악하려는 일제의 정책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 그래서 일제는 통감부를 설치하자마자 ‘한국개발’이나 ‘한국민의 복리증진’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한국의 내륙을 개방하여 어떤 지역에서도 일본인이 토지를 소유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토지가옥증명규칙>의 발포는 그것을 국가가 보장하도록 한 조처였다.065) 不動産法調査會,≪土地家屋證明規則要旨≫(1907), 1∼2쪽.

 일제가 말하는 ‘한국개발’이나 ‘한국민의 복리증진’은 허울좋은 구호에 불과했다. 이 규칙의 진짜 목적은 일본인으로 하여금 ‘한국내 어느 지역에서나 토지를 소유하고’ 또 한국정부로부터 그에 대한 ‘공증’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여는 데 있었다. 따라서 일제가 한국강점 후에 본격적으로 실시한 토지 획득을 위한 토지조사사업의 단초는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066) 일제가 한국에서 실시한 토지조사사업의 전사를 논할 때 유의할 것은 대한제국이 추진한 양전·지계사업(토지조사사업)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하나는 한국사의 주체적·내재적 발전을 인정하여 양전·지계사업을 근대적 토지제도 수립의 출발로 위치짓는 한편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은 이것을 이어받아 식민지적 농업구조를 구축하는 계기로 파악하는 것이다(김용섭,≪한국근대농업사연구≫하, 일조각, 1984;이영호,≪한국근대 지세제도와 농민운동≫, 서울대출판부, 2001). 다른 하나는 한국사의 내재적 발전을 인정하면서도 근대적 토지제도의 확립 시점을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에서 구하고 대한제국의 양전·지계사업을 그 전사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김홍식 등,≪대한제국기의 토지제도≫, 민음사, 1990;宮嶋博史,≪朝鮮土地調査事業史の硏究≫, 東京大學 東洋文化硏究所, 1991). 이것은 조선사회의 구조와 성격에 대한 이해, 그리고 조선후기 이래의 근대화 방향을 바라보는 시각 등에 따라 발생하는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가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일본인 지주와 회사는 1905년경부터 토지조사와 토지매수를 시작하여 大倉농장·東山농장·村井농장·態本농장 등을 설립했다. 이러한 추세는 일본의 국가자본이 東洋拓殖株式會社를 설립한 1908년 이후 더욱 활발해졌다. 동척은 한국농업을 개발한다는 미명 아래 국가자본과 국가권력을 이용하여 한국의 국유지·민유지를 매수·약탈하고 일본인 농민을 이주시켜 한국침략의 첨병 역할을 하였다.

 일제는 1907년 7월 ‘臨時帝室有及國有財産調査局’을 만들고, 같은 해 12월<제실재산정리국관제>에 따라 제실재산을 정리한다는 명목 아래 역둔토(驛土·屯土 : 驛吏·鎭營의 급여에 해당하는 토지로서 국유지의 주요 부분을 이루었다), 궁장토(1司 7宮에 속하는 궁실의 토지) 등의 관리를 통감부에 이관했다. 일제는 한국강점 이후 이 토지를 조선총독부 소유로 만들었다.

 일제는 한국에서 토지를 수탈하는 데 갖가지 기만적 방법과 교묘한 수단을 동원했다. 한국인의 명의를 차용하는 것, 관리에게 청탁하여 자기 명의로 등록하는 것, 반영구적인 토지의 사용수익권을 획득하는 것, 매수인의 이름이 없는 文記를 제작하는 것, 저당증서와 매매문기를 이중으로 제작하는 것067) 全國經濟調査機關聯合會朝鮮支部編,≪朝鮮經濟年報≫(1939년판), 38쪽. 등 다양한 수법이 그것들이다. 또 한국인에게 토지를 담보로 돈을 빌려 준 후에 이를 기한내에 갚지 못할 경우 토지를 압류하는 방법도 애용하였다. 당시 금리는 높고 토지는 쌌기 때문에 일본인은 적은 자본으로도 몇 년만에 많은 토지를 취득할 수 있었다.068) 農商務省,≪韓國土地農産調査報告書≫(慶尙道·全羅道)(1906), 545∼546쪽. 반면에 일본인으로부터 돈을 빌려 쓴 한국인은 대부분 토지를 팔아 이를 상환할 수밖에 없어서, 한국의 많은 땅은 일본인의 수중으로 옮겨가게 되었다.069) 農商務省, 위의 책, 279쪽. 전라남도에서는 일본인이 권총과 망원경을 휴대하고 시골을 휘젓고 다니면서 농장지로서 유망한 토지를 매수하고 다녔을 정도였다.070) 久間健一,≪朝鮮農政の課題≫(1943), 15쪽.

 전라북도에서 소자본을 들여 단기간내에 방대한 토지를 집적하여 대농장을 경영했던 쿠마모토 리헤이(熊本利平)의 경우는 일본인이 한국에서 어떻게 땅 부자로 성장해갔는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態本君은 壹州勝本 출생으로 … 37년(1904) 러일전쟁 중에 현금 3천 원을 주머니에 넣고 군산에 파견되어 온 것이 조선 생활의 제1보였지만, … 당초부터 의형 松永安左衛門씨와 大每사장 本山彦一씨의 후원에 힘입어 토지브로커를 하였던 것인데, … 대정 원년(1912)에는 재계가 다소 상승세를 타 地價도 점차 높아지고, 계속하여 대정 3년(1914)에는 세계 대전의 서막에 들어가 조선의 재계도 세계적 팽창의 추세에 자극되어 호전되자, 그 기세를 타고 아침에는 東郊에 천 畝의 토지를 겸병하고 저녁에는 西邊에 만 頃의 논을 겸병하는 기세로 결국 3천 2백 정보라는 대지주가 되었던 것이다(保高正記·村松祐之,≪群山開港史≫, 1925, 122쪽).

 일본인이 한국에서 토지를 매수하는 가격은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일본에 비해 대체로 10분의 1내지 30분의 1에 불과했다. 게다가 소작료는 고율이었기 때문에 지주는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그리하여 한국에서 일본인 지주는 1909년 현재 692명, 소유면적은 52,426정보, 지주 1인당 소유면적은 75.8정보였던 것이 1년 후인 1910년에는 각각 2,254명, 69,311정보, 38.6정보로 급증했다. 1909년 6월 현재 30정보 이상을 소유한 일본인 지주는 135명이었는데, 그 중 85명이 100정보 이상을 소유한 대지주였다. 30정보 이상 지주의 창업연대를 보면 1903년 이전이 13명, 1904년 27명, 1905년 25명, 1906년 34명, 1907년 23명, 1908년 18명, 1909년에 1명이었다.071) 淺田喬二,≪日本帝國主義と舊植民地地主制≫(御茶の水書房, 1982), 68쪽. 이처럼 일제는 한국강점 이전에 이미 한국에서 광대한 면적의 토지를 집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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