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2. 식민지 수탈구조의 구축
  • 1) 토지조사사업과 토지수탈기반의 마련
  • (3)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토지 집적

(3)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토지 집적

 일제는 러일전쟁을 틈타 한국의 황무지개간권을 요구한 바 있다. 이것은 전 국토의 4분의 1에 해당한다고 일컬어질 정도로 광대한 면적이었다. 그러나 개간이라는 그럴듯한 명목으로 한국의 토지를 수탈하려던 일제의 기도는 보안회 등을 중심으로 한 한국인의 열렬한 반대에 부딪쳐 뜻을 이루지 못했다.090) 윤병석,<일본인의 황무지개척 요구에 대하여>(≪歷史學報≫22, 1964). 그 후 일제는 한국에 통감부를 설치하여 실질적 지배권을 확립하자, 1908년 12월 마침내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으로 약칭)를 설립하여 본격적인 토지 수탈에 나섰다.

 일본정부는 1907년 “한·일의 정치적 관계를 공고히 하고 경제적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한 방책으로는 拓地殖民을 제외하고는 다른 좋은 방책이 없다”라는 뜻의 동척 설립안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 3월 “한국 농업의 개량·진보를 촉진하고 한국의 토지를 개척함으로써 그 富源으로 한·일 양국의 화친을 두터이 하고, 양 국민간의 경제적 관계를 발달시키기 위해 당장 필요한 조치임을 인정한다”라는 취지서와 함께<동양척식주식회사법>을 제24회 제국의회에 제출하여 가결시켰다. 같은 해 8월 東京에서 열린 동척 설립위원회 총회는 회사의 定款을 결정하고, 설립위원(한국인 23명, 일본인 82명)을 임명하였다. 동척의 처음 자본금은 1천만 원(납입자본 250만 원)이었다. 한국정부도 대주주로 참가하여 토지(역둔토 5,700정보, 당시의 평가액 300만 원)를 출자했다. 일본정부는 동척에 대한 보조금으로 매년 30만 원을 8년간 지출하고, 정부의 원리보증 아래 社債 2천만 원을 발행하였다. 동척의 총재로는 현역 육군중장 宇佐川一正를 임명하고, 부총재 2명, 이사 4명을 두었다. 한국인으로는 민영기(부총재)·한상용(이사)이 여기에 포함되었으나, 이들은 허수아비에 불과하였다.091) 朴慶植, 앞의 책, 75쪽.

 동척의 설립목적은 ‘한국에서의 척식사업의 경영’이었다. 동척의 업무는 농업은 물론이고, 척식을 위해 필요한 토지의 매매와 貸借, 토지의 경영과 관리, 건축물의 축조와 대차, 한·일 이주민의 모집과 분배, 이주민과 한국 농업자에 대한 물품의 공급과 그 생산 및 획득물품의 분배, 자금의 공급 등이었고, 부대사업으로는 수산업, 기타 척식을 위해 필요한 사업의 경영 등이었다.092) 東洋拓植株式會社,≪東拓十年史≫(1918), 8쪽.
<東洋拓植株式會社法>(≪日本外交文書≫41-2, 1908), 297∼301쪽.
여기에서 언급되고 있는 ‘한국’이라는 단어는 일본의 수탈을 은폐하기 위해 동원한 修辭에 불과했다.

 일제가 동척을 설립하면서 내세운 명목상의 목적은 “內鮮人 교류의 역사는 유래가 극히 오래된 것이지만 명치 37·38년(1904·5) 전승의 결과 및 명치 39년(1906, 사실은 1907)<한일신협약>의 체결을 계기로 일본은 정치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한국을 지도·인도해야 할 중책을 맡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먼저 한국의 부강을 꾀하고 일반 민생이 문화의 혜택을 입을 수 있는 가장 유효 적절한 방법으로 한국의 산업을 개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093)≪農務要覽≫(東拓). 라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한국을 지도·인도한다거나, 한국의 부강을 꾀한다는 것은 한국을 완전히 장악하여 경제적 富源을 지배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동척이 한국을 이롭게 한다고 이해하는 사람은 극히 적었고, 오히려 동척이 한국의 토지를 빼앗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094) 靑木香代子,<東洋拓殖株式會社の設立>(≪朝鮮近代史料硏究集成≫3), 121∼122쪽. 한국의 흉흉한 분위기에 두려움을 느낀 동척의 사원은 모두 제복에 권총을 차고 경영활동에 임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095) 靑木香代子, 위의 글, 123쪽.

 동척의 토지는 한국정부가 출자한 토지와 동척이 매수한 토지로 구성되었다. 한국정부의 출자지는 전술한 것처럼 역둔토 전답 5,700정보였다. 이것은 역둔토·궁장토 10만 정보 중에서 사업경영상 가장 유리하고 우량하다고 하여 선정된 토지였다. 동척은 1913년까지 이미 소유하고 있던 역둔토에 근접한 민간인 소유 토지를 대량으로 매수했다. 매수지는 1913년 현재 47,000여 정보(1,076만여 원)였다. 일제는 매수과정에서 국가 권력을 배경으로 하여 불법행위를 저질렀다. 예를 들면 전라남도 영산포 부근의 宮三面에서는 사실상 민유였던 토지를 동척이 慶善宮이라는 宮家로부터 매수하여 문제를 일으켰다. 동척이 목포라는 개항장을 배후지로 가지고 있는 영산강 주변의 토지를 집중적으로 매수한 것은 일본인 이민을 유치하기 위함이었다. 동척은 1913년 이후에도 매수를 계속하여 1919년 현재 소유한 토지는 78,520정보나 되었다.096) 이규수,<전남 나주군 ‘궁삼면’의 토지소유관계의 변동과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토지집적>(≪한국독립운동사연구≫14,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0).

 동척의 사업의 하나는 출자지와 수매지에 일본인을 이주시켜 지주경영을 하는 것이었다. 일본 의회는 매년 1만 명 이상을 농업이민으로 내보내야 한다고 떠들어댔다. 일제는 1910년<이주민취급규칙>을 정한 이래 매년 농업이민을 모집하였다. 1910∼20년 동안 모집호수 10,995호, 응모호수 19,483호, 승인호수 8,508호, 정착호수 약 3,500호였다. 이주민은 처음 갑종(자작), 을종(소작)으로 구분되었는데, 1914년 이후로는 자작(2정보)을 목표로 하는 제1종과 소지주(10정보)를 목표로 하는 제2종으로 나누어졌다(1921년 이후는 제2종만으로 모집했다). 동척은 이들이 지주로서 성장하도록 자금이나 이주비 등을 지원하고 그밖에도 다른 보호와 원조를 많이 베풀었다.097) 君島和彦,<朝鮮における東拓移民の展開過程>(≪日本史硏究≫161, 1976).

 동척은 또 자금의 융자를 비롯하여 수리·토목·산림 등을 경영하였다. 일제는 1917년 동척의<회사법>을 개정하여, ‘한국에서의 척식사업’이라는 항목을 ‘조선 및 외국에서의 척식자금의 공급, 기타 척식사업의 경영’으로 바꾸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제 영업활동의 범위가 중국을 비롯한 필리핀·남양제도·말레이반도 등으로 확장된 것이다. 그리고 사업의 제1목표가 농업에서 금융으로 바뀌어, ‘척식은행’의 형태로 자금을 공급하는 데 주력하였다. 1919년 현재 동척은 7천만 원의 대부금을 보유하였다. 같은 해 동척의 자본금은 5천만 원으로 증자되었다.098) 朴慶植, 앞의 책, 78쪽.

 동척의 수익은 대부금 이자, 유가증권 수입, 농지·산림의 수입 등 세 가지였다. 그 중에서도 토지를 저당잡고 대금업을 하거나, 저당에 잡힌 토지를 수탈하는 것이 주요 이익원이었다. 동척은 일반은행과 같이 예금을 취급하는 금융기관이 아니었다. 따라서 농민이 돈을 빌릴 때는 토지를 저당으로 잡혀야 했다. 당시 한국에서 저당을 잡힐 만한 물건으로는 토지밖에 없었다. 그런데 토지를 저당잡히고 돈을 빌린 한국농민은 이 돈을 상환할 수 없었다. 따라서 저당 잡힌 토지는 대개 동척의 수중에 들어갔다. 동척은 이러한 수법으로 토지를 집적했다. 이와 비례하여 한국농민의 원한도 쌓여갔다.099) 水田直昌·土屋喬雄 編述,≪財政·金融政策から見た朝鮮統治とその終局≫(1962), 51쪽.

 동척이 세운 이주식민계획은 실패한 감도 없지 않았지만, 대륙침략정책의 측면에서는 성공적이었다. 그 이유로서는 동척이 한국내에서 최대 지주이자 금융기관으로서 한국의 농촌과 농민을 지배하고 있었던 점, 1917년 이후 사업의 범위를 확대하여 奉天·大連에 지점을 설치하고 만주와 몽고 방면으로 진출한 점을 들 수 있다.100) 靑柳綱太郞,≪總督政治史論≫(1928), 194∼2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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