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2. 식민지 수탈구조의 구축
  • 2) 수탈을 위한 농업정책과 한국농민의 고난
  • (2) 면화재배의 강요

(2) 면화재배의 강요

 일제는 일본에서의 미곡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한국에서 식량증산을 획책하는 한편, 면화·양잠 등 일본 자본주의 공업의 원료를 싼값으로 얻기 위해 강제적인 수단을 동원하였다. 1906년에<勸業模範場官制>를 공포하고 수원에 권업모범장을 개설하여(목포에 출장소를 둠), 쌀·면화·양잠·과실·축우의 증산을 독려하였다.

 일제는 1905년에는 ‘면화재배협회’를 설치하고, 주로 한국의 남부지방에서 육지면 재배를 강제하였다. 일제가 육지면 재배를 강요한 이유는, 한국이 일본과 인접하여 운수·교통이 편리한 데다가 면화재배에 적합하여 生産棉의 품질이 아주 양호했기 때문이다. 물론 더 근본적인 목적은 한국에서 저렴한 면화를 가져감으로써 원료수급의 안정을 기하고 국제수지를 개선하려는 데 있었다. 일본의 면방직 공업이 독자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값싸고 품질 좋은 면화가 필요했던 것이다.103) 鈴木武雄,≪朝鮮の經濟≫(日本評論社, 1942), 157쪽.

 일제는 한국에서 면작을 강요하기 위해 지극히 난폭한 방법을 동원하였다. 헌병이나 순사까지 나서서 면화를 재배하지 않고 보리나 콩을 심은 농가에 대해서는 콩과 보리를 발로 밟아 부러뜨리는 일도 자행했다.104) 久間健一, 앞의 책, 8∼9쪽. 일본인의 강제적인 소위 농사지도는 한국인에게 원성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의병은 곳곳에서 일본인을 공격했다. 그리하여 일본인은 총이나 칼을 휴대하고 다니며 면화재배를 강요했다.105) 久間健一, 위의 책, 6쪽.

 일제는 한국을 강점한 이후에도 면작을 장려하는 방침을 고수했다. 일제는 한국의 기후와 풍토에 알맞는 품종 선정, 종자 개량, 비료 증시 등의 기술적 방면의 개선에 힘을 쏟았다. 조선총독부는 권업모범장을 설치하고 지방청의 종묘장(種苗·種畜·種禽) 등에 일본인 기사·기수·조수를 파견하여 강권적인 ‘지도’를 하였다. 이것은 테라우치 총독의 무단통치에 필적할만한 것으로서, 무단적 농정이라고 일컬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106) 大藏省管理局,≪日本人の海外活動に關する歷史的調査≫朝鮮篇, 제4분책(1946∼1948), 52쪽.

 일제는 면화가 일본의 국책상 긴요한 것이라 하여, 1912년에 ‘육지면장려제1기 계획’을 세워, 1918년까지 경작면적 10만 정보를 대체로 달성하였다. 연이어 1919년에는 제2기 10개년 계획을 세워, 경작면적 25만 정보, 생산분량 약 2억 5천만 斤을 목표로 내걸었다.107) 權泰檍,≪韓國近代綿業史硏究≫(一潮閣, 1989), 103∼114쪽. 총독 테라우치는 훈령<육지면 장려에 관한 건>(1912년 3월)에서 면화재배가 일본 방적공업의 원료인 외국산 면화의 수입을 대체함으로써 국가경제의 신장에 기여하는 바가 다대하다는 것을 강조했다.108) 朝鮮總督府,≪朝鮮農務提要≫(1931), 10쪽. 총독이 이렇게 독려했으니 총독부 관리가 보리를 밟아버리는 등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면화재배를 강요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109) 久間健一, 앞의 책, 67쪽.

 일제는 면화의 유통에도 간섭하였다. 즉 일제는 한국에서 생산된 면화를 전량 흡수하기 위해 공출제도를 시행했던 것이다. 총독부 관리들은 목표한 수매량을 달성하기 위해 면화 재배 농가를 점검하고 숨겨진 면화까지도 수색하였다. 그리고 일제는 한국농가의 자가 소비를 억제하기 위한 조치로 繰綿機 사용을 금지하였다.110) 久間健一, 위의 책, 10쪽.

 한국농민은 면화의 증산을 기뻐하지 않았다. 수매독점권을 가진 면화업자나 면방적업자만 이익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수매하기 위해 면화의 품질을 평가할 때도 1등을 2등이라 하고, 2등을 3등이라 하는 등의 전횡을 일삼았다. 또 면화재배 농민이 애써 2∼3일을 걸려 먼 곳에서 면화를 판매소로 운반해 와도 관권을 휘둘러 시간이 늦었다거나 등의 핑계를 대어 값을 후려 깎았다. 더구나 당시는<회사령>이 시행되고 있어서 기존의 면방적업자는 이익을 더욱 독점할 수 있었다.111) 中野正剛,≪我が觀たる滿鮮≫(1915), 23∼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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