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2. 식민지 수탈구조의 구축
  • 3) 임야조사사업과 국유림의 창출

3) 임야조사사업과 국유림의 창출

 한국의 산이 민둥산이 된 것은 일제의 지배자가 말한 것처럼 온돌을 위한 남벌 때문만이 아니었다. 한국의 산림은 조선총독부가 1912년에 조사한 바와 같이 전국의 73%에 달하는 1,620만 정보가 무성·울창했다. 한국이 민둥산으로 뒤덮이게 된 것은 일제의 침략적 벌채정책에 기인하는 바가 컸다. 한국의 산림은 19세기 말 20세기초의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과정에서 일본이 군사상의 수요를 채우기 위해 대량으로 벌채함으로써 수난을 당하기 시작했다. 일제는 한국통감부를 설치한 이후 1906년 10월<압록강 및 두만강 연안 산림경영 협동약관>을 강제로 체결하고 안동현에 營林廠을 설치하여 매년 25만 본에 달하는 대대적인 삼림벌채를 단행했다. 또 일본인 자본가에 의한 산림벌채도 진척되었다. 1910년 12월 현재 일본인이 한국에서 소유한 산림·평야의 면적은 1만 3천여 정보에 달하였다.

 일제에 의한 식민지적 산림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것은 1908년 1월의<삼림법>제정에서 비롯되었다.<삼림법>의 핵심은 “삼림·산야의 소유자는 본 법 시행일로부터 3년 이내에 삼림·산야의 지적 및 면적의 견적도를 첨부하여 농상공부 대신에게 계출해야 한다. 기한내에 제출하지 않는 것은 모두 국유로 간주한다”(제19조)에 있었다.122)≪舊韓國官報≫, 隆熙 2년 1월 24일. 여기에서 지정된 기일내에 삼림·산야의 지적도와 견적도를 계출하라는 것은 임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소위 ‘無主公山’의 국유화, 즉 일반 민중의 공유림에 대한 권리의 박탈을 의미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 한국인 산림 지주나 일본인 산림 자본가들이 자신의 소유라고 계출한 것은 전체 산림면적 1,600만 정보의 13.7%에 불과한 220만 정보였고, 나머지 대부분의 산림은 ‘국유임야’로 편입되었다.123) 朝鮮總督府農林局,≪朝鮮林野調査事業報告≫(1938), 9쪽. 그리하여 한국 민중은 1910년 이전에 이미 많은 사유림이나 공유림을 약탈당하여 임야의 공동이용이 불가능해졌다. 이제 매일 사용해야할 연료 채취에도 곤란을 겪게 된 셈이었다.

 일제는 1911년 6월<삼림령>을 공포했다. 이 법령은 30조로 구성되었는데, 임야의 소유권 재확인 규정, 일반임야에 대한 보안림접수규정, 삼림특별형벌규정, 국유임야에 대한 제3자의 이용규정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124)<삼림령>의 내용과 특징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姜英心,≪日帝의 한국삼림수탈과 한국인의 저항≫(이화여대 박사학위논문, 1998), 50∼53쪽. 일반임야에 대한 보안림접수규정은 “국토의 보안, 기타 필요하다고 인정될 때는 삼림을 보안림에 편입시킬 수 있다”(제1조)고 했다. 이것은 법률적으로 보면 삼림의 소유권에 대한 중대한 제한이며, 일제가 식민지 통치기구를 통해 수시로 임야를 ‘보안림’에 편입시켜 그 소유권을 박탈할 수 있게 한 것이었다. 또 삼림 특별 형벌 규정에서는 방화죄·절도죄·毁棄罪 등을 규정하여, 지주의 사유림을 보호하고 민중의 임야 이용을 단속하였다. 이것은 한국민중의 火田을 박멸하려는 것이었다. 국유임야에 대한 제3자의 이용규정은 특별조림대여에 관한 것이었는데, “조선총독은 조림상 국유삼림을 대여 받은 자에 대해 사업이 성공한 경우에 특별히 그 삼림을 양여할 수 있다”(제7조), “공용·공익사업을 위해서는 양여할 수 있다”(제11조)고 규정하여, 일본인 독점자본(예를 들면 住友·東拓·三井 등)에 대한 대부·양여의 길을 열어 놓은 것이었다. 따라서 이 법령은 일제가 한국에서 추진한 식민지적 林政의 헌법과 같은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125) 朝鮮山林會,≪朝鮮林業逸誌≫(1933), 435쪽.

 일제는 또 1912년 8월에<조선국유삼림미간지 및 삼림산물특별처분령>126) 朝鮮山林會 編,≪朝鮮林務提要≫(1930), 107쪽.(칙령 제6호)을 공포하여 일본인에게 국유림과 그 임산물을 수시로 불하하는 원칙을 확립했다. 이 법에서 말하는 ‘삼림산물’이라는 것은 종이·성냥·무늬목·코르크·탄닌·건류액·칠기·염료·약품 등의 재료, 椎茸·철도 침목·포장 상자 및 그 상판을 의미했다. 그리고 ‘제조업자’라는 것은 자본금 1만 원 이상의 회사 또는 회사가 아닌 경우는 1년 이상 중요 산물 제조업을 경영한 자를 가리켰다. 또 ‘목재업자’라는 것은 자본금 2만 원 이상의 회사 또는 회사가 아닌 경우는 2년 이상 영업을 한 자를 말했다.127) 朝鮮總督府,≪朝鮮總督府統計年報≫(1912年度版), 952쪽. ‘삼림산물’을 다루는 ‘제조업자’와 ‘목재업자’는 대부분 일본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법은 일본인 자본가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일제가 이렇게 국유림을 일본인에게 수의계약으로 대부·불하함에 따라 한국민중은 산에 들어가 연료와 약초를 채취하는 공동 이용권까지 빼앗기게 되었다.

 한편, 일제는<삼림법>으로 손에 넣은 국유림에 대해서 1911년부터<국유림구분조사>를 행하고, 1912년 2월에는<삼림·산야·미간지 국유 사유 구분 표준>등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국유림에 대해서는 임야조사가 불충분하여 소유권을 둘러싼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일제는 1917년 2월부터 임야정리조사를 착수하였다. 그리고 1918년 5월에는<조선임야조사령>과 시행규칙을 공포하였다. 이 법령의 핵심은 “임야의 소유자는 도장관이 정하는 기간내에 성명(또는 명칭)·주소, 임야의 소재 및 지적을 府尹 또는 면장에게 신고해야 한다”(제3조)는 것이었다. 일제는 임야조사위원회를 설치하여, 신고주의에 따르지 않는 임야를 모두 국유지에 편입시켰다. 일제는 1924년까지 임야조사사업을 완료했다. 일제는 국유림의 法認을 확정하는 과정에서 약 160만 정보의 사유림을 강제로 국유지로 만들었다. 이로써 한국에서는 식민지적 임야소유제가 확정되고, 산림 수탈의 기반이 구축되었다.128) 姜英心, 앞의 책, 62∼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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