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2. 식민지 수탈구조의 구축
  • 5) 금융·재정의 식민지적 재편
  • (1) 금융의 장악

(1) 금융의 장악

 일제는 1905년 1월 한국의 재정고문 메카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에게 한국의 ‘화폐정리’를 강행시켰다. 이것은 한국과 일본의 화폐제도를 동일한 것으로 만들고, 한국화폐를 일본화폐로 대체시킴으로써 금융·재정을 장악하려는 기도였다. 제일은행 한국지점이 구체적인 실무를 담당한 ‘화폐정리’사업은 제일은행권을 발행하여 한국의 법화로 만들고 이를 종래의 한국화폐와 교환·유통시키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일제는 ‘화폐정리’사업을 통해 일본상품의 유통과 일본자본의 수출을 보증·강화함으로써 한국을 일제의 경제권으로 편입시키는 기초를 닦았다.

 일본의 제일은행은 한국정부에 대해 거액의 대부를 해주는 채권자로서의 위세를 몰아, 은행권의 발행뿐만 아니라 공채의 인수, 국고금 취급 사무의 수탁, 정부 대부금, 海關稅 취급 등의 광범위한 권한을 행사했다. 문자 그대로 한국에서 중앙은행의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한국인이 제일은행권을 배척하자, 1909년 10월에 한국인 주주를 배제한 채 ‘한국은행’을 설립하여 중앙은행으로 만들고, 제일은행 대신 한국은행권을 발행하도록 했다.

 일제는 한국강점 직후인 1911년<조선은행법>을 공포하여, ‘한국은행’을 ‘조선은행’으로 개칭하고, 조선은행권 발행과 금융통제 등 중앙은행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했다. 일본의 대장대신은 조선은행의 중역 임명권과 업무상 감독권을 장악하였다. 조선총독은 특정사항에 대해서만 권한을 행사할 수 있을 뿐이었다. 조선은행은 보통예금도 취급했으며, 그 영업지역도 일본·중국에까지 미쳐, 일제의 중국침략을 금융적 측면에서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조선은행의 영업활동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영업 방식에서 대부·담보의 범위가 넓고, 국채·증권과 상품을 담보로 한 대부가 가능하며, 조선총독의 인가를 얻어 공공단체에 대한 무담보 대부, 다른 은행의 업무 대행도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일본인 거류민의 경제활동과 생활기반을 보장하기 위한 방편이었다.137) 오두환,<일제하 한국의 화폐제도>(≪省谷論叢≫19, 1988).
---,<조선은행의 발권과 산업금융>(≪國史館論叢≫36, 1992).

 일제는 1912년 10월<은행령>을 공포하고, 보통은행의 설립 기준을 강화하여 한국인의 은행설립을 저지하였다. 일제가 금융기관을 식민지적으로 재편해가기 시작한 것은 한국강점 이전부터였다. 일제는 1906년 3월<農工銀行條例>를 공포하여 농공은행을 본격적으로 설립했다. 농공은행은 1906년 6월∼1907년 1월에 한성·평양·대구·전주·진주·광주·충주·해주·鏡城·공주·함흥 등 11군데에 설립되었다. 이들은 1907년 6월∼1908년 8월에 한호·평안·경상·전주·광주·함경의 6군데로 통합되었다. 그리고 1911년 말에는 지점·출장소를 30개로 확장시키고 자본금도 증대시켰다. 농공은행은 조선식산은행으로 합병되는 1918년 10월에는 본점 6개, 지점 및 출장소 41개를 소유하여, 한국내 은행 점포수 112개소의 40%를 차지하였다.138) 鄭昞旭,≪日帝下 朝鮮殖産銀行의 産業金融에 관한 硏究≫(고려대 박사학위논문, 1998), 94쪽.

 한국에서 최다의 지점망을 가지고 있던 농공은행의 업무는 명목상으로는 ‘농공업의 개량·발달’을 위한 자금의 공급이라고 했으나, 장기 부동산담보 대부와 공공단체에 대한 무담보 대부가 주업무였다. 그러나 그 자본금은 일본정부의 출자 및 무이자 대부금이었다. 농공은행은 지주와 비교적 부유한 농민에 대한 고리대적 착취를, 그리고 토지와 원료 등 자원의 수탈과 유통망 장악을 위한 자금을 지원했던 것이다. 나중에는 어음할인 및 보통은행 업무도 겸임했다. 일본정부의 대부금도 증가하여 1912년에는 소액대부까지 하게 되었다. 일제는 1914년 5월에<농공은행령>을 공포하여 보통은행 업무와 생산물에 대한 대부 등 업무를 확장하였다. 농공은행의 점포가 철도역과 항구에 집중적으로 설치된 것은 일본인 상인을 주고객으로 확보하려는 전략 때문이었다.139) 鄭昞旭, 위의 책, 89∼100쪽.

 일제는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하여 일본의 금융자본이 확립됨에 따라 1918년 6월<조선식산은행령>을 공포하여, 농공은행을 조선식산은행으로 개편하였다. 조선식산은행은 지주·자본가의 농민 수탈, 식민지적 공업에 대한 자금지원을 담당하였다. 또한 조선총독의 감독 아래 부동산 혹은 농공업을 대상으로 한 장기금융을 하고, 조선총독부·일본대장성의 적극적 보호와 지원 아래 보통·저축·권업·흥업은행의 역할을 담당하는 종합은행으로 성장하였다. 특히 조선식산은행은 채권을 발행하고, 그 자금을 대지주·농업경영회사,<산미증식계획>의 ‘토지개량’·‘수리조합’, 금융조합연합회 등에 대부하여 막대한 이익을 거두었다.140) 鄭昞旭, 위의 책, 112∼170쪽.
배영목,<조선식산은행과 농업>(≪國史館論叢≫36, 1992).

 한편 금융조합은 농공은행의 보조기관으로서 중소농민을 대상으로 한 금융업무를 담당했다. 일제는 1907년에<금융조합규칙>을 제정하여 지방금융조합을 만들었다. 이것은 1914년<지방금융조합령>에 의해 한층 더 확장되었다. 일제는 1918년 6월에<지방금융조합령>을 개정하여 지방금융조합을 금융조합으로 개칭하고, 道金融組合聯合會와 都市金融組合을 설립했다.141) 정용욱,<1907∼1928년 지방금융조합활동의 전개>(≪韓國史論≫16, 서울大, 1987).

 금융조합은 한국 민중을 장악하려고 한 조선총독부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각별한 보호를 받았다(무이자 자금 대부, 경비 보조). 그리고 조합원에 대해 “경제의 발달에 필요한 자금을 대부한다”는 명목 아래 농촌의 중류계급으로부터 고리대적 착취를 했다. 금융조합은 하층농민의 금융을 표방했지만, 조합원이 되려면 1인당 10원의 출자 의무가 있었기 때문에 한국농민이 가입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금융조합은 조합원수에서는 자소작농·자작농이 많았으나, 운영의 실권과 자금 배분은 지주를 비롯한 지역 유지에 편중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당시 금융조합은 ‘전당포 또는 고리대업자’,142) 車田篤,≪朝鮮協同組合論≫, 56쪽. ‘망국적 착취기관’,143) 阿部薰,≪朝鮮統治の解剖≫, 83∼84쪽. ‘조선농촌의 吸血管’144) 靜田均,<朝鮮に於ける金融組合の發達>(京城帝國大學法學會,≪朝鮮經濟の硏究≫第3卷, 1937). 등등의 통렬한 비판을 받았다. 일본인의 눈에서조차 금융조합은 이렇게 비치고 있었다.

그들은 곤궁한 때에 자기가 지은 곡물을 모두 먹어버릴 뿐 아니라, 볍씨까지도 팔아 조나 보리·오이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런 모습을 본 대지주들은 열심히 볍씨를 매점한다. 매점에 착수하여 돈이 부족하면 금융조합에서 인출하는 일까지 있다. 물론 금융조합에서는 1구좌 당 50金까지만 대출해주지 않지만, 대지주는 一族一門·下僕·使喚의 이름까지 이용하여 몇 구좌라도 빌릴 수 있다. 거기다가 모내기 전이 되면 벼와 쌀은 매우 등귀한다. 5할 오르는가 하면 배가 오르는 일도 있다. … 이미 벼와 쌀을 살 때에 5, 6할이나 지나치게 돈을 더 내고, 그 돈을 빌리는 데에 연리 7, 8할을 지불하고, 생산한 쌀을 반액으로 팔고 있기 때문에, 소농의 고통이라는 것은 참으로 참담한 것이다. 그런데 소농에게 자금을 융통해 줄 목적으로 세워진 금융조합은 소농의 구제는 하지 않고, 도리어 소농의 생피를 빨아먹는 大農에게 흉기를 주는 상황이 되어 있다(久間健一,≪朝鮮農政の課題≫, 1943, 381∼382쪽).

 일제는 “조선은행·동척회사·식산은행은 우리 정부가 이들에 의거하여 조선의 진흥과 발달을 도모하려는 기관임에 틀림없는데 조선인은 이들을 가리켜 조선인을 몰아내는 무기·흉기라 말하고 있다”145) 同光會本部,≪朝鮮民情視察報告書≫, 18쪽.고 푸념했다. 일본은 한국의 발전을 위해 애쓰고 있는데 한국인이 이것을 알아주지 않고 오히려 매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일본인이 볼 때도 지방 금융조합들은 조선총독부에 기생하면서 빈농에게 자금을 융통하는 게 아니고 중농 이상의 부자들에게 빈농을 괴롭힐 고리대 자금을 융통해주고 있었다. 금융조합은 사실상 고리대업의 두목격이었던 것이다.146) 中野正剛, 앞의 책, 378∼380쪽. 그 위에 조선은행과 식산은행이 버티고 있었으니 일제의 금융은 조선은행→식산은행→각도 금융조합연합회→금융조합의 체계를 갖추고 한국농민에게 고리대 조직으로서 군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여기에 동척마저 가세하였으니, 어느 지역에 동척이 토지를 매입하고 1戶의 일본인 이민을 유치하면 5호 이상의 한국인이 홀연히 衣食의 방도를 잃고 만주나 연해주 방면으로 정처없이 떠나게 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147) 同光會本部, 앞의 책, 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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