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2. 식민지 수탈구조의 구축
  • 5) 금융·재정의 식민지적 재편
  • (2) 재정의 재편

(2) 재정의 재편

 한국정부는 1894년 갑오개혁 때 근대적 재정제도를 수립했다. 즉 내각의 한 부서인 탁지부가 司稅·司計·출납·회계·서무의 각 사무를 담당하고, 국가의 회계·출납·납세·국채·화폐·은행 및 지방재정을 관장하도록 했다. 그러나 왕실과 정부의 재정이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는 등 전근대적 요소가 다분히 남아 있었다.

 일제는 한국에 대해 정치적·군사적 침략을 진척시키는 동시에 재정을 식민지적으로 재편했다. 일제는 1904년 10월<財政顧問傭聘契約>의 체결을 강요하여, 재정고문으로서 메카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 대장성 主計局長)를 한국에 파견했다. 그는 이른바 화폐정리, 宮中·府中 재정의 정리, 금고의 설치, 국고금 취급에 관한 계약, 예산 편성, 外劃 금지, 재정고문 지부설치, 일반회계법규 정비, 회계검사국 신설, 특별회계법규의 제정, 일본국채의 도입 등을 단행했다. 이러한 모든 조치는 일본이 한국의 재정을 장악하는 것은 물론이고, 일제가 한국을 침략하는 데 필요한 막대한 비용(예를 들면 철도 등 사회간접자본의 확충)을 일본의 국고지출을 삭감하는 대신, 한국인의 호주머니를 털어서 충당하려는 음모의 일환이었다.148) 이윤상,<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 재정의 형성과정>(≪韓國史論≫14, 서울大, 1986).

 일제는 한국통감부를 설치한 후<조세징수규정>을 만들어 징세기관을 확장하였다. 각 도의 재정고문지부 아래 분청을, 서울·평양·대구·전주·원산 등 중요지역에는 재무감부를 설치하고 재무감사관을 배치하였다. 1907년 7월에는<한일신협약>을 강제로 맺어 한국정부에 일본인 관리를 임명하도록 하고, 전국에 231개의 재무서를 설치하여 재정기관의 집행권을 직접 장악하였다. 이리하여 한국정부는 징세와 세입·세출의 처리, 금전출납 사무 등에 대해 아무런 권한도 갖지 못하게 되었다. 일제는 이와 병행하여 황실재정과 국가재정의 분리·정리사업을 추진했다. 일제는 이를 통해 막대한 토지, 금·은, 문화유산들을 수중에 넣었다. 일제는 1906년 이후 한국통감부의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종래의 稅目을 정리하고 새로운 稅種을 설정하여 세입 원천을 확대시켜갔다. 소위 징세체계의 정비가 그것이었다. 일제는 또 한국정부에 막대한 차입금(1908∼10년에 1,968만 원)을 빌려주어, 1910년 8월 현재 국채 및 차입금 합계는 4,559만여 원에 달했다. 그리하여 한국의 재정은 일제에 완전히 종속되고 말았다.149) 堀和生,<日本帝國主義の朝鮮植民地化過程における財政變革>(≪日本史硏究≫217, 1980).

 일제는 한국강점 직후인 1910년 9월<조선총독부 특별회계에 관한 건>(칙령 제406)이라는 법령을 발포하여 새로운 회계제도를 만들었다. 이 법령의 제1조는 조선총독부의 회계는 특별회계로 하고, 그 세입 및 일반회계의 보충금을 가지고 그 세출에 충당한다, 제2조는 전조의 수입지출에 관한 규정은<칙령>에 의해 결정한다고 되어 있었다. 일제는 이를 통해 한국 재정을 법적으로 완전히 장악하였다. 조선총독부의 세입·세출은 한국 민중의 의사와 관계없이 일제의<칙령>에 따라 마음대로 처분되는 식민지 재정으로 변한 것이다.

 일제는 곧 ‘일반회계로부터의 보충금 배제를 목적으로 한 독립재정계획’을 마련하고, ‘재정 自營의 방침’을 표방하였다. 그것은 조선총독부가 일본 정부로부터 받는 보충금을 1914년부터 5개년 간에 걸쳐 매년 체감하여 1919년에 전면적으로 종식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한국내에서 조선총독부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서는 세입 원천을 확대·증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세입의 대부분을 점하는 조세수입(약 27.4%)의 확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조세수입 가운데는 지세의 비중이 컸으므로(1914년, 60.2%), 한국인의 세 부담은 자연히 무거워질 수밖에 없었다.150) 禹明東,≪일제하 조선재정의 구조와 성격≫(고려대 박사학위논문, 1987).

 지세는 1914년의<지세령>에 의해 1913년부터 14년까지 44.7%나 증가했지만, 반대로 쌀값은 떨어져 1914∼17년의 3년간 지세 체납으로 차압을 당한 자가 36,061명에 달했다. 그리하여 자작농으로부터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자가 증가하였다. 지세는 지주·자작농 등 토지소유자의 부담이었는데 그것이 소작농에게 전가되는 경우가 많았다. 1918년 6월에는 새<지세령>이 만들어져 지가의 1,000분의 13을 지세로 납부하게 했다. 그리고 지가가 오르면 지세도 오르게 만들었다. 1911∼19년 사이에 지세는 1.6배 인상되었다.151) 배영순, 앞의 책, 201∼216쪽.

 일제는 재정수입을 확대·증강하기 위해 지세 외에 소비세를 인상하고 공채 등을 발행했다. 조세수입의 내용을 보면 지세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지만, 간접세 중심의 임시 조세로 옮겨가는 추세였다. 1910∼1919년 사이의 세입구조를 보면, 총세입 6천 9백 23만 7천 원 중에서 조세는 27.8%, 관업·관유재산은 24.3%, 공채수입 16%, 보충금 10%, 기타 21.8%, 전년도 잉여금 16.4%이었다. 1910∼1919년 사이의 세출 구조는 총세출 5천 4백 70만 1천 원 중에서, 통치비 34%, 관업사업비 43.1%, 산업경제비 6.4%, 공채상환비 8.0%, 기타 2.8%이었다.152) 禹明東, 앞의 책,<표 3-4>·<표 4-1>.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일제가 말한 ‘조선 재정의 확립’이라는 것은 한국에 대한 정치적·경제적 지배를 관철시키기 위한 비용을 한국민중으로부터의 수탈로 충당하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또 일제는 제철업·광업 등을 육성한다는 명목으로 조세를 감면해 주고 보조금까지 지출하였기 때문에, 한국민중의 세금으로 일본인 기업을 살찌웠다고 할 수 있다.153) 鄭泰憲,<식민지시대 조선의 자본제적 조세제도 성립에 관한 연구>(≪經濟史學≫11,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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