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2. 식민지 수탈구조의 구축
  • 6)<회사령>과 기업활동의 억압
  • (1) 한국강점 이전의 일본자본 침투

(1) 한국강점 이전의 일본자본 침투

 일본자본은 한국강점 이전부터 한국에 침투하여 막대한 초과이윤을 획득하였다. 즉 값싼 地價, 풍부한 노동력, 저렴한 임금, 값싼 원료, 취약한 한국자본의 경쟁력 등 유리한 조건이 널려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자본은 한국을 일본상품의 판매시장, 원료와 식량의 공급기지로 재편하는 동시에 직접 투자를 감행하여 한국민중을 착취하였다. 일제는 특히 러일전쟁을 계기로 한국의 교통·운수·통신기관, 시장, 금융 기관 등을 장악하여 식민지적 경제지배체제를 확립했다.

 1910년 이전의 한국의 주요 공업은 면포·絹布·麻布 등의 직물, 염직, 제지, 도자기 제조, 금속제품, 編細工, 화문석, 정미, 종이, 인쇄 등이었는데, 외국상품이 유입됨에 따라 압박을 받으면서도 일부는 자본주의적 공업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대한제국도 근대공업을 발전시키는 데 일정한 노력을 기울였다. 예컨대 1902년 한성전기회사, 1904년 인쇄공장, 1906년 마포 煉瓦공장, 영등포 土管제조공장 등을 설립했다. 또 염색·도기·목공·金工·응용화학·토목 등의 관립 공업교습소를 설립하여 기술혁신을 꾀하였다 1905∼1910년간 한국인이 설립한 회사수는 금융업 36개, 농림업 37개, 제조업·광업 96개, 상업 116개, 운수업 45개, 수산업 9개, 청부·토건업 24개, 기타 62개 등 모두 425개였다.154) 全遇容,≪19世紀末∼20世紀初 韓人 會社 硏究≫(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7), 205쪽.

 그렇지만 직물·염직·도자기·금속제품 등 외국상품의 수입 증가가 수공업적인 한국의 공업 생산에 미친 타격은 컸다. 더욱이 한국통감부의 설치 이래 한국자본에 대한 일본자본의 압박이 급속히 강화되자, 한국인이 경영하는 회사와 공장은 역경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한국인 회사와 공장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置廢를 거듭하면서 양적·질적 성장을 거듭해나갔다.155) 全遇容, 위의 책, 204∼210쪽.

 일본자본은 한국의 간선철도를 부설·지배하고, 바다와 강의 교통·운수도 장악했다. 일본정부는 보조금·대부금의 형식으로 이들을 적극적으로 원호했다. 러일전쟁 이후 개항장과 철도연선에는 일본인의 중소공장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특히 정미업·식료품가공업·피혁·연초제조업 등이 활발했다. 일본자본은 1905년의 이른바 화폐정리사업을 계기로 국가권력의 적극적 원조 아래 은행업에도 진출하였다. 제일은행이 지폐를 발행하여 중앙은행에 맞먹는 역할을 하면서부터 대한천일은행·한성은행 등 한국인의 금융기관은 종속적 지위로 떨어졌다.

 일본의 상업자본도 각 도시 개항장에 진출하여 한국인 상업을 압박하였다. 일본상인은 사금·소가죽·인삼·미곡을 값싸게 사들이고, 일본산 면사·잡화를 비싸게 팔아 넘겼다. 일본인 중에는 잡화상·여관·운수업·음식점 등을 경영하는 자가 많았고, 그들은 고리대·지주를 겸하는 경우도 있었다.

 1908년 현재 한국에 거류하는 일본인의 직업별 인구 구성은 상업이 약 47,000명, 雜業이 약 17,000명, 관공리가 약 15,000명, 공업이 약 11,000명, 농업이 약 4,800명, 무직 약 4,400명, 기생·작부 약 4,200명, 어업 약 3,000명, 의사·산파가 1,100여 명 등으로 되어 있었다.156) 朴慶植, 앞의 책, 1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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