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3. 식민지 지배체제의 특질
  • 1) 일제의 조선침략과 식민주의
  • (3) 민족말살을 통한 전시강제동원기(중일전쟁∼패전)

(3) 민족말살을 통한 전시강제동원기(중일전쟁∼패전)

 1937년 중일전쟁 이후 패전까지의 전시강제동원기는 조선의 총체적 해체와 완전한 일본화를 목적으로 ‘황민화’ 정책 곧 완전한 민족말살정책을 전개하는 시기였다.207) 제7대 총독 미나미 지로(1936∼1942)는 부임하자마자 최고통치이념으로 ‘내선일체화’를 내걸어 “물심양면에 걸쳐서 반도민중을 황민화하고 반도를 완전한 황토이게끔” 하는 철저한 민족말살정책을 시행하였다(≪朝鮮年鑑≫, 1945년도판, 28쪽).

 1936년에 부임한 미나미 지로(南次郞)총독은 ‘내선일체화’를 내걸어 ‘무차별의 황국신민화’라는 미명 아래 총체적인 민족말살정책을 전개하여 모든 영역에서 ‘전통’과 ‘민족’을 해체시켜 나갔다.

 일제는 戰時期임을 빙자하여 廢姓奪名을 단행하였다(사회적 동화). 조선민족에게 姓관념은 언어나 종교 혹은 지연성보다도 더욱 중시되는 민족구성원으로서의 필요충분 조건이다. 그런데 이 성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여 새롭게 일본 가족주의의 氏제도를 강제한 것은 혈통주의에 의한 민족공동체로서의 조선을 해체하여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가부장적 국가체제 속에 조선인을 편입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폐성탈명을 단행하면서<민사령>개정, 호적 개정, 壻養子제도의 도입 등을 통하여 전통적 가족제도를 파괴하기도 하였다.

 신사참배와 황국서사를 강제하였다(종교적 동화). 천황을 신앙의 대상으로 하는 일본의 종교체계에 조선인을 세뇌시켜 포섭하기 위한 종교적 동화정책이었다.

 조선어 사용을 금지하고 일본어를 강제하여 언어공동체로서의 조선민족을 해체시켰고 조선의 역사를 왜곡하여 편입시켜버린 일본사를 주입시켰다. 그리고 조선의 관습과 문화를 파괴, 해체하면서 일본화시켜 나갔다(문화적 동화).

 일제는 중일전쟁의 도발과 함께 교육제도를 대대적으로 개혁하여 학교와 학생 수를 늘리고 교과과정도 개편하였다(정신적 동화). ‘충량한 황국신민을 육성’하기 위한 이 조치는 조선인을 정신적으로 동화시키는 것을 전제로 하여 일본어 습득률을 제고시키고, 전시동원이라는 현실적 필요성에서 기술교육을 강화시켜 전시 노동력으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결과 일본어 습득률은 크게 제고되었다.208)≪朝鮮年鑑≫, 23쪽.

 이상과 같은 동화책에도 ‘만족’하지 못하여 그들은 완전한 ‘내선일체화’의 최종의 완결책으로 ‘통혼장려’라는 혼혈정책을 권력적 차원에서 입안·전개하였다(생물학적 동화).209) 종래에 양 민족간의 결혼에 대하여 방조 내지 억제적이었던 일제가 1937년부터는 이를 ‘내선일체화’의 완결로 자리매기고 이를 정책적 차원에서 추진하고 있음이 확인된다.≪(秘) 朝鮮に於ける敎育に關する方策≫(1937)에서, “(7) 내선인 결혼의 장려-내선융합의 근본적인 것은 혼인에 의한 결합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렇지만 그 실제에 있어서는 곤란한 사정이 많고 그 중 특히 언어·풍속·관습이 다르기 때문에 그 실행에 어려움이 많다. … 내선인 결혼자의 우대의 방법을 고려하려고 한다”라고 하고 있다.
朝鮮總督府 警務局長,≪內鮮-體の理念及其實現方策要綱≫(1942)에서는, “내선일체의 인구정책상 실현의 방책으로, 첫째 반도 주재 일본인의 증가책, 둘째 조선인의 내지 이주 규제책(우량한 이주자는 도항을 장려하고 조악한 만성적인 도항자는 엄히 제한하는 것), 셋째 내선통혼의 장려책(내선일체의 완성)”이라고 하고 있다. 이 정책의 결과로, 실제로 혼인 수가 증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36년까지 조선내에서 혼인수가 1,192쌍에 지나지 않았는데 1942년에는 2,015쌍에 달하고 있고, 일본에서는 1944년 3월 말 현재, 10,700쌍(조선남자와 일본여자 10,428쌍, 조선여자와 일본남자 272쌍)에 이르고 있다(<朝鮮·臺灣人と內地人の通婚狀況>,≪朝鮮·臺灣人の參政權に關する參考資料≫).
상세한 것은, 강창일, 앞의 글(1994)을 참조할 것.
이 혼혈정책은 ‘조선의 황토화’를 목적으로 하는 혼거정책과 함께 매우 주목되는 부분이다. 종래에 일본인과 조선인과의 결혼에 대하여 소극적 내지는 억제적이었던 총독부 당국이 중일전쟁 이후 이를 정책적 차원에서 장려하고 있는 것은 전쟁으로 인한 남성감소와 상대적 여성과잉의 현상에 대응한 일본인 여성구제의 필요성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민족말살주의의 통치이념 속에서 이것은 ‘내선일체’의 완결로 자리 매겨졌다.

 이상과 같은 제 방면에서 ‘일본화’를 통한 민족말살정책은 더 나아가 조선인을 군인·군속·노무자·군위안부로서 강제 연행하여 전쟁소모품화함으로써 민족학살적인 말살책을 취하기도 하였고, 지역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개인을 유리시켜 비자립적 개인들을 양산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민족말살정책을 수행함에 있어서 총독부는 특히 지원병을 비롯하여 일본 천황제 군대에서 ‘충량한 신민’으로 개조된 자들을 ‘황민화’ 및 전시 강제동원의 중추적 핵심세력으로 재활용하고자 하였다. 국가 총동원체제에서 급증하는 동원관료의 수요를 이들로 충당하여 판임관(동 대우) 및 고원이라는 최하위 식민지 관료로 ‘우대’하는 대책을 강구하는가 하면, 이들을 ‘향군’ 및 ‘총력연맹애국반의 추진분자’로 조직하여 나갔던 것이다.210) 조선총독부,<朝鮮人志願兵の入營後の狀況及退營後の指導>(≪朝鮮の狀況≫), 267 ∼268쪽.
橋谷弘, 앞의 글.

 이상과 같이 민족말살주의에 입각하여 ‘조선의 영원한 그리고 완전한 지배’를 수행함에 있어서는 강력한 권력과 철저한 통제체제를 구축하지 않으면 불가능하였다. 이를 위하여 어떠한 제도적·법적 장치를 마련하였는가, 그리고 지배권력과 통치구조를 어떻게 구축하여 나갔는가 하는 문제를 살펴보기로 한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