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1. 국내민족운동
  • 1) 1910년대 국내민족운동의 배경과 경향
  • (2) 국내민족운동의 경향과 특징

(2) 국내민족운동의 경향과 특징

 1910년 국권을 강탈한 일제는 전대미문의 무자비한 감시와 탄압으로 식민정책의 기초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더구나 일제는 앞서 살핀대로 경찰과 군대는 물론 유사조직을 활성화시켜 한민족의 항일민족운동이 확대·발전되는 것을 사전에 억제하고자 한반도 전체를 창살없는 감옥과 같은 ‘병영국가’로 만들어 놓았다.246) 윤경로,<1910년대 독립운동의 동향과 그 특성>(≪한국독립운동의 이해와 평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5), 245쪽. 그러므로 최소한의 기본적인 생존권조차 박탈당한 한국인은 한민족의 자존을 위한 투쟁이 더욱 어려운 상황하에 놓여 있었다.

 그러므로 1910년대 민족운동은 이같은 현실을 직면하면서 이전까지의 민족운동에서 노정된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방략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한말의 의병전쟁과 계몽운동으로 전개된 구국운동을 정비하는 작업으로 시작되었다. 즉 1910년 8월 식민지라는 상황변화에 따라 非武裝 實力養成論에 기초한 구국계몽운동 계열의 운동노선과 武裝鬪爭을 주창하였던 의병계열의 운동론 모두가 그 한계를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를 반성하며 의병전쟁을 독립군적 조직으로 발전시키거나 계몽운동을 독립군양성교육으로 개편하려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였으나 기존의 노선을 고집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물론 전체적인 흐름을 살피면 국권을 상실당한 상황은 민족운동가들에게 이전시대의 구국계몽운동계열의 비무장·실력양성론적인 운동노선 일변도나 의병전쟁계열의 무장투쟁노선만으로는 식민지체제를 극복할 수 없다는 점을 인식케 해 주었다. 노선상의 대립을 반성하고 상호보완하려는 방향으로 추구된 방략이 바로 독립전쟁론이었다. 독립전쟁론은 국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구축하여 독립군을 양성한 후 적당한 시기에 일제와의 혈전을 통해 빼앗긴 국권을 되찾는다는 방략이다. 물론 이 방략은 준비론적인 성격이 강한 것이어서 즉각적인 독립전쟁을 목적한다기 보다는 향후 발생할 전쟁에 대비해 전쟁에 필요한 인적·물적자원을 축적해 독립역량을 강화시키려는 운동론이다. 또한 일본이 러시아나 미국과 일전을 겨루어야 할 경우 이 기회를 이용하려는 기회포착적인 성격을 띤다. 이처럼 독립전쟁론은 기존의 민족운동론인 실력양성론과 무장투쟁론을 상호보완한 통전적인 운동론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1910년대 민족운동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큰 특징은 과거의 운동체간 차별성과 분파성이 점차 희석되면서 독립전쟁론을 기조로 한 새로운 민족운동의 장을 열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앞서 본 바와 같은 일제의 무단통치하에서는 독립전쟁론을 실천에 옮기는 데에는 많은 제약이 따랐으므로 교육·계몽활동을 통한 실력양성론적 방법과 형태를 취하기도 하였다.

 또 하나의 특징은 민족운동의 공간을 해외로 확장하면서 한편으로 민족운동의 전열을 정비하고 역량을 축적하는 방향으로 전개해 나갔다. 이를테면 한말의 의병전쟁계열은 1910년을 전후해 근거지를 국내에서 활동이 자유로운 만주나 연해주로 이동해 갔다. 계몽운동계열은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 등 일제의 노골적인 침략에 직면하면서 좌우로 분화되었고, 신민회를 중심으로 한 계몽운동좌파 인사들은 해외독립군기지 개척을 추진해 갔다.247) 趙東杰, 앞의 글, 387∼389쪽.

 우선 의병투쟁의 흐름을 보면 1909년 소위 ‘남한대토벌작전’으로 쇠퇴해 가던 의병의 유격전은 전과 같은 규모는 아니라도 1910년 합방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이 시기의 의병은 주로 황해도·강원도·함경도·평안도 등 중부 이북지역에서 10여 명 혹은 7∼8명 정도 소부대의 전력으로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공격대상으로 일부 친일지주나 부호 등도 목표로 했으나, 대개 헌병분견소·경찰서·국경수비대를 습격하면서 1915∼16년까지 투쟁하였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한말의 계몽운동을 계승한 계열은 민족의 근대적 역량향상을 도모하고 독립운동에의 인적자원을 공급하면서 독립전쟁구현을 위해 국외독립운동의 발판을 구축해 갔다. 이러한 움직임은 헌병경찰체제의 철통같은 감시하에서 그나마 민중이 모일 수 있는 종교조직이나 학교, 그외 친지간의 친분을 이용한 비밀결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경향이 강했다.

 따라서 1910년대 국내민족운동의 일반적인 경향은 비밀결사의 결성 및 그와 유사한 결사체를 통한 활동이란 형태를 띠게 된다. 이러한 모습은 식민지 상황에서 전개되는 일반적인 민족해방운동의 특징이기도 하다. 우리 나라의 경우 비밀결사의 원류는 구한말에 조직된 신민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런데 조선총독부는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이전부터 이같은 비밀결사 결성의 위험성을 감지하고 있었다. 1910년 7월 당시 통감부의 警務總長 겸 헌병대사령관인 아카시 겐지로(明石元二郞)가 헌병대장에게 행한 훈시를 보면 그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248) 그의 훈시내용은 아래와 같다.
“고등경찰에 대하여 약간 말해 두어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되어 … 대체로 보아 今日은 폭도봉기(의병전쟁)의 시기는 지났다. 물론 다시 봉기하는 일이 없다고 보증키는 어렵지만, 내가 살핀 바로는 장래의 위험은 인민의 문명진보에 따라 일어날 無政府主義·社會主義 등의 위험한 사상에 빠지는 것이다. 원래 한국 사람은 우리 일본 사람의 성질을 닮아 학문을 좋아하고 관리가 되는 것을 바라며, 堅實한 實業에 종사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 성질이 있는데, 이러한 풍조는 국가 變遷의 시기에 있어 더욱 심하고 많은 사람이 배운 문학, 법률학은 국가의 수요공급에 맞지 않고 이를 사용할 길이 없어 학식은 있는데 지위를 얻지 못한 인재가 많이 생겨난다. 이 많은 失意者는 곧 不平分子가 되어 歐美에서 社會主義者·無政府主義者 또는 혁명을 꾀하는 음모를 품은 무리들도 모두 이러한 사람이며, … 그러나 그 불평분자가 폭도로 나타나 활동하는 경우 오히려 제어하기 쉬우나 그 제어하기 어려운 것은 비밀결사의 발생이다. … 현재 한국에서 달아나 블라디보스톡·상해·芝罘에 있는 망명자들은 항상 이 나라의 惡政을 비판하고 있고 또 한국내에서도 學才가 있는 한국 사람 3명만 모이면 언제나 政事를 논의하는 형편이다. 실로 한국은 人心攪亂의 소질을 지닌 나라이다. … 때문에 諸氏는 오늘부터 철저히 管內의 인물에 주의하여 連絡의 保持를 확실히 하여 틀림없도록 하라(姜德相,≪現代史資料≫25 朝鮮1, みすず書房, 1966, 11∼12쪽).
통감부시절부터 계몽운동과 의병전쟁을 직접 경험한 바 있던 아카시 사령관은 향후의 항일투쟁 방향을 통찰하고 무력투쟁인 의병전쟁은 앞선 대대적인 토벌작전에 따라 그 세가 수그러져 고비를 넘겼으며 앞으로는 비밀결사의 결성이 가장 우려되는 투쟁방법이 되리라는 예상하에 이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는 방침을 밝힌 것이다.

 이러한 방침을 민족운동 탄압에 적용한 일제는 곧바로 신민회의 존재를 탐지하게 되었다. 이에 일제는 무단통치하에서 일체의 항일조직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입장에서 1910년 전후 평안도·황해도지역을 중심으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던 新民會 및 이 지역 민족운동의 조직기반을 파괴하기 위한 음모를 획책하였다. 그리하여 1910년 12월 ‘安岳事件’을 필두로 ‘梁起鐸 등 保安法違反事件’ 등을 날조하여 애국투사·청년학생 등 수백여 명을 체포해 국내 항일민족운동의 맥을 압살하려 하였다. 이어 1911년 이른바 ‘105인사건’을 조작하여 그 회원들을 체포, 고문함으로써 반일민족세력을 뿌리뽑고자 한 것이다. 그 결과 민족운동을 주도할 중심적 지도자 및 그 실행 조직기반도 철저히 파괴시켜버렸고 이를 기화로 예비검속도 더욱 강화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의 의도와는 달리 이 사건에서 드러난 일제의 잔악성으로 인해 일제에 대한 적개심은 더욱 커졌으며 이후 다양한 형태의 민족운동단체, 특히 비밀결사의 결성을 촉진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즉 일련의 탄압 이후에도 전국각지에서 국권회복, 항일독립투쟁을 목표로 한 민족운동 및 비밀결사투쟁은 끊임없이 전개되면서, 민족운동의 명맥을 유지해 나갔던 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조직은 대체로 지연·혈연적인 모임이나 종교단체 혹은 학교 등을 활용하여 결성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런 양상은 당시 일체의 집회결사가 허용되지 않는 무단통치하에서 활용될 수 있는 조직은 그나마 지연·혈연적인 모임이나 집회가 허용된 종교단체 혹은 학교 뿐이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따라서 소규모의 지역·혈연위주의 조직이나 종교조직, 및 학교를 활용한 민족운동의 가능성과 방법론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1910년대의 민족운동단체들이 지닌 조직상의 특성에서도 이런 측면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이 시기는 다양한 정치사상이 전개되었으나 주목할 만한 것은 한말 공화주의 이념의 전통을 이었고, 또 신해혁명의 영향이나 해외동포와의 교류 그리고 러시아혁명의 영향도 받아 성장한 민주공화주의 사상이다. 공화주의 사상의 성장에 따라, 大韓光復會나 朝鮮國民會 같은 혁명단체도 일어나 활동함으로써 독립운동의 근대국가 이념을 심화시켜 갔다.249) 趙東杰, 앞의 글, 388쪽.

 물론 1910년 8월 국권을 상실당한 초기에는 의병계열의 무장투쟁이 주된 흐름을 이루었다. 한말에 활약하던 의병들 중 국외로 근거지를 이동하지 않은 세력들을 중심으로 지역분산적으로 게릴라식 의병투쟁이 명맥을 이었으며 특히 채응언의 의병부대는 1915년까지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했던 것이다.250) 윤경로, 앞의 글, 248쪽. 그러나 점차 일제의 강력한 탄압 및 현실적 상황의 어려움으로 의병계 투쟁은 서서히 비밀결사조직체로 탈바꿈해 갈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지금까지 살핀 바와 같이 1910년대 민족운동은 독립전쟁론을 주된 방략으로 한 비밀결사의 활동을 그 특징으로 하지만 그 밖에 교육·계몽활동을 통한 실력양성론적 방법과 형태를 취하는 단체들도 한 몫하였으므로 크게 의병계열·계몽운동계열 그리고 혁명적 경향의 운동으로 대별하여 그 특징을 정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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