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1. 국내민족운동
  • 2) 의병계열의 민족운동단체
  • (1) 대한독립의군부

(1) 대한독립의군부

 1912년 고종황제로부터<密詔>를 받은 낙안군수를 역임한 林炳瓚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결사체였다. 임병찬은 1906년 순창에서 최익현과 같이 의병을 일으켜 항전하던 중 피체되어 대마도에 유배되었던 의병장이었다. 유배에서 풀려나 귀국한 후 재기를 모색하던 중 1912년 9월 충청도 공주유생 이친이 전해온 고종의 밀조를 받게 되었다. 이 밀서에는<교지>와<칙령>제3호로서 비밀리에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255) 교지의 내용은 “從二品嘉善大夫林炳瓚命獨立義軍府全羅北道巡撫大將者”라고 되어 있다. 임병찬은 독립의군부 전라남도 巡撫大將의 직함으로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고 격문을 발표하는 한편 동지를 규합하였다. 곧이어 잠적한 호남지방의 의병 및 유생들과 접촉하여 고종의 밀조에 의한 독립의군부 결성의 취지를 전달하여 이들의 적극적인 호응으로 그 조직을 확대 강화시켜 나갔다. 1913년 1월 전참판 李寅順이 또<밀칙>을 받들고 찾아왔는데 밀칙에서 임병찬을 다시 단체의 전라남북도 순무대장으로 임명하여 독려하였다. 이에 임병찬은 아들 임응철을 경성으로 급파해 前참판 이인순·李明翊·郭漢一·田瑢圭 등과 활동방략을 구체적으로 협의케 하는 한편 전라남북도의 의병조직 결성에 착수하였다. 2월 4일 아들 응칠이 다시 고종황제로부터<황칙>을 받아 왔는데 임병찬을 전라남북도 순무총장겸 사령장관으로 격상시킨 밀지였다. 이로써 임병찬은 호남지방의 조직구성을 완료하고 이듬해 2월 서울로 올라와 이명익 등과 독립의군부의 편제를 완결지었다.

 독립의군부의 편제는 중앙 元首府에 兵馬都總將과 參謀總約長을 두고 서울을 비롯하여 강화·수원·개성·광주에 5영을 설치하여 사령총장과 참모부약장을 두었으며, 각도에는 순무총장과 참모약장을, 각부에는 관찰사와 도약장을, 각군에는 군수와 군약장을 두되 그 휘하에 약장·면장·이장·통장을 배치하여 동지를 규합하기로 하였다. 마침내 1914년 2월 23일 각도·각 군 대표를 선정하고 곧바로 항일투쟁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총대표는 임병찬·민정식·민정식·채상덕·전용규 등 27명과 각도 각군 대표 302명을 합쳐 329명에 달하였다. 각도 대표는 경기도에 崔永卨, 충청도에 柳濬根, 경상도에 權鎭遠, 전라도에 李曾翊·崔永豊·吳啓曄·朴在球·李權濟, 강원도에 徐相烈, 함경도에 金性文, 황해도에 柳應斗·吳昌根·宋洛善이 각각 선정되었다.

 조직구성을 완비하는 한편 투쟁방법으로 의병의 무력항거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항일투쟁을 모색하였다. 우선 총독부·각국공사·일본정부에 각각 국권반환요구서를 제출하여 일제 관헌들에게 한일합방의 부당성을 설명하고 한국통치의 곤란함을 인식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국외에 한국민이 일본의 통치에 계속 항거하면서 국권회복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해 전국민 투서운동을 준비하였다. 이후 거사준비가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조직원이 일경에게 체포되어 조직의 실체가 드러나고 말았다. 1914년 5월에 사전 발각되어 독립의군부 조직은 봉쇄당하고 말았으니 항일의병을 일으켜 거사를 도모하기 전에 유림세력이 큰 타격을 입게 되었던 것이다. 의군부 조직의 민족운동계획이 결실을 맺지 못하게 되자 임병찬은 총독 테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에게 단독 면회를 요청하였다. 5월 29일 총독대리로 온 경무총감에게 한일합병의 부당함을 통박하고 국권반환과 철병을 요구하였으며 일본의 한국독립과 원조만이 동양평화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임을 역설하였다.

 임병찬은 이 사건으로 일제에게 피체되었는데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보안법 위반으로 1년 감금형을 선고받고 거문도로 이송되었다. 그런데 일제는 1년 간의 감금이 끝난 뒤에도 그의 민족운동 재개를 우려해 다시 2년간 유배기간을 연장하여 임병찬을 격리시켰다. 임병찬은 유배 중인 1916년 5월 순국하였다.256) 國史編纂委員會 編,≪韓國獨立運動史≫2, 85∼93쪽.
慶尙北道警察部,≪高等警察要史≫(1934), 177∼179쪽.
申圭秀,<大韓獨立義軍府에 대하여>(≪변태섭박사화갑기념사학논총≫, 삼영사, 1988).

 의군부의 중심지도세력은 임병찬을 비롯한 유생, 의병출신과 대한제국의 전직관료들로서 고종황제의 밀명에 따라 항일투쟁을 모의하였던 점 등으로 보아 척사적 성격의 단체였다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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