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1. 국내민족운동
  • 2) 의병계열의 민족운동단체
  • (3) 민단조합

(3) 민단조합

 民團組合은 1915년 경북 聞慶새재 주변에 거주하던 유생들이 국권부흥을 목적으로 조직한 결사였다. 민단조합의 중심인물은 한말 의병대장 이강년의 참모장으로 충북·강원·경북지방에서 활동한 李東下, 이강년의 조카 李堤宰, 이강년의 軍資長이었던 崔旭永, 의병대장 李麟榮의 친동생인 李殷榮, 순국의사 金濟欽의 아들 金洛文 등인데 이 중 대부분이 전술한 대한독립의군부에 관여하였던 점이 주목된다.

 이들은 한말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의병투쟁에서 활약하다가 국권상실 이후 재기의 거사를 암중 모색하던 중 1912년 국내에서 조직된 의병계열의 독립운동단체였던 대한독립의군부에도 가담하였거나 독자적으로 모종의 투쟁을 기획하기도 하였다.

 우선 한말 의병대장 이강년의 참모장으로서 경북·충북·강원 각지에서 활동하던 이동하는 이강년이 일경에 피체된 후 강원도 방면으로 도주하였다가 이강년의 군자장 최욱영·이명선 등과 재거를 도모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동하는 국권상실 이후 1912년에도 국권회복운동을 기도했으나 실패하자 음력 12월 중국 안동현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간도 회인현·통화·유하현 등을 주류하다 1914년 9월 귀국하였다. 귀국 후 경북 문경·안동지역, 충청도 충주, 경기도 여주지역을 탐사하며 비밀결사를 계획하였다.

 한편 의병대장 이인영의 친동생인 이은영은 형이 1910년 경성감옥에서 순국하자 형의 유지를 계승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1913년 전북 유생 임병찬이 조직한 독립의군부에 가담하였다. 조직이 발각되어 중심인물들이 피체되자 잠적하였다. 이후 경기·강원·충북·경북지방의 동지를 두루 방문하며 종적을 감추고 있던 중 이동하가 간도로부터 귀래한 뜻을 간파하고 민단조합결성에 찬동·기획하였다.

 이식재는 이강년의 생질로 최욱영으로부터 국권회복을 기획하고 의병을 준비중이니 참가하라는 권유를 받고 최욱영, 그 부하 등과 1914년 12월 충북 제천군 근북면 소재 면사무서를 습격하여 1백여 원을 강탈하는 활동을 전개한 바 있다. 1914년 8월 김낙문의 권유를 받아들여 이동하의 계획에 가맹하였다.

 또한 1909년 9월 국운의 쇠퇴를 개탄하고 단식자살한 김제흠의 아들인 김낙문은 자결한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항일의 뜻을 품고 상복을 벗지 않았던 인물이다. 서당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한편 1912년 이래 이동하와 교제하면서 이동하의 국권회복계획을 위해 자금과 수하를 조달하는 등 이동하의 배하인 노병식·김동연·강병수 외 수십 명과 기맥을 통하며 1914년까지 늘 자택을 비밀회의 장소로 제공하면서 각종 운동을 원조한 바 있다. 일찍이 독립의군부에도 가맹했던 김낙문은 민단조합결성에 가담하게 되었다. 그 외에 이세영은 헌병 정위로 임병찬의 독립의군부사건에 가맹하였다가 중심인물의 피체 당시 다행히 체포를 면하고 간도로 도주하였다가 후에 민단조합에 참여하였다.

 한편 이동하는 민단조합결성에 앞서 이은영과 그 동생 李茂榮, 충청북도 영동군 횡간면에 거주하는 李鍾晃 및 경성 출신으로 횡간에 거주하던 權寧直과 사전에 비밀리에 협의하여 민단조합의 본거를 경성에 두기로 정하고 아울러 자금조달방법도 강구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동하는 권영직과 함께 경성으로 올라가 본거를 정하고 조직구성과 자금모집방안을 협의한 결과 권영직은 경상북도 지역에 동지를 규합하여 단세의 확보에 주력하면서 자금을 조달키로 하였다.

 문경으로 내려온 이동하를 비롯한 전술한 중심인물들이 모여 민단조합을 결성한 뒤 충청남도·충청북도·경상북도 지역을 총괄할 조합장을 선임하여, 이동하는 충청남도 민단조합장, 이은영은 충청북도 민단조합장, 이세영은 경상북도 민단조합장을 맡기로 하였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 각지에 격문을 교부하여 동지규합에 주력하면서 활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민단조합의 주된 활동은 주로 경상도와 충청도 지역의 유력자를 포섭하는 한편 운동자금수합이었다. 경성에서 이동하와 협의를 마치고 경상도로 내려간 권영직은 경상남도 밀양군에 거주하는 朴仁根·金康年·柳永奉을 찾아가 ‘李太王殿下’의 칙명이라 칭하고 경성으로 誘出하여 박인근에게 義軍府正尉, 김강년에게 義軍府參尉, 유영봉에게 義軍府參領에 임명한다는 辭令을 교부하고 거사에 찬동케 하였다. 그런데 이 사령에는 ‘德壽宮’이란 인장이 날인되어 있었다. 사령을 받은 3인은 자금제공을 약속하고 귀향하였다.

 이동하는 1915년 12월 귀향한 3인의 자금제공약속을 완수케 하기 위해 박인근을 방문하여 자금 2백원을 조달케 하여 함께 경성으로 올라오는 도중 충남 성환역에서 헌병대의 검문에 박인근이 소환당하자 이동하는 이를 피해 도주함에 자금조달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그 뒤 1916년 6월 이동하는 자신의 명의로 군자금 2백원을 제공하라는 취지의 격문을 작성하여 단원 이식재로 하여금 경상북도 예천군에 거주하는 부호 朴尋洙를 대상으로 군자금조달계획을 실행케 하였다. 이식재는 이 격문을 휴대하고 박심수를 찾아가 군자금제공에 협조하도록 수차례에 걸쳐 청하였으나 목적을 달성치 못하였다. 그 밖에도 경상북도 안동군에 거주하는 부호에게 수백원의 군자금을 제공하라고 위협을 가했지만 역시 목적을 달성치 못하였다.

 이처럼 자금조달계획이 어려움에 처하자 김낙문은 1916년 10월 중 강원도 영월군내에서 중석광을 경영하는 일본인의 경영자금을 강탈하고자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경남 함창군의 채기중 외 부하 10여 명을 坑夫로 위장시켜 광산으로 파견하는 한편 이식재와 경북 영주군 풍기면의 趙禹卿도 영월로 파견하여 자금모집 활동케 하였으나 목적을 달성치 못하였다.259) 國史編纂委員會 編,≪韓國獨立運動史≫2.

 민단조합의 활동이 드러나면서 조직의 실체도 발각나고 이동하를 비롯, 이은영·김낙문·이식재·최욱영 등 중심인물의 피체로 사실상 해체되었다. 이동하·이은영·이식재·김낙문은 제천경찰서에서 취조당한 후 보안법위반으로 재판에 회부되었다.260) 姜德相,≪現代史資料≫25 朝鮮 1, 50∼53쪽.
朝鮮總督府 慶北警察部,≪高等警察要史≫, 259∼260쪽.
國史編纂委員會 編,≪韓國獨立運動史≫2.

 문경에서 결성된 민단조합의 중심인물들은 60대와 40, 50대의 양반 유림들로서 구체적인 투쟁을 전개하기보다는 의병재기를 위한 자금조달에 주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군자금 모집시 고종황제의 칙명을 빌어 낸 사령에 ‘의군부정의’·‘참의’·‘참령’ 등을 칭하여 독립의군부조직과 그 투쟁방략을 계승하려 한 면모를 엿 볼 수 있다. 대체로 독립의군부가 전라도와 충청남도 등 서남부지방의 복벽주의적 유림의 단체라고 한다면 민단조합은 충청북도와 경상북도 등 동남부지방의 유림조직이라 할 수 있다.261) 姜德相,≪現代史資料≫25, 50∼53쪽.
朝鮮總督府 慶北警察部, 위의 책, 259∼260쪽.
趙東杰,<大韓光復會硏究>, 367∼368쪽.
양자의 차이는 전자가 의병활동의 재기에 중점을 둔 단체인데 비해 후자는 주로 의병활동을 위한 준비론적인 입장에서 군자금모집을 주된 활동계획으로 세운 점이며 이는 1910년대 독립운동론의 가장 기본적인 방략이던 준비론과도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군자금 모집 도중 발각되고 말았는데 이처럼 척사적 복벽주의가 계획단계에서 봉쇄되고 만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복벽운동이 이미 대중적 기반을 상실하고 있음을 의미한다.262) 姜德相,≪現代史資料≫25, 3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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