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1. 국내민족운동
  • 3) 계몽운동계열의 단체
  • (1) 기성볼단

(1) 기성볼단

 기성볼단은 1914년 5월 평양에서 대성학교 학생 및 대성학교와 관련된 청년, 학생들이 조직한 비밀결사이다.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지방은 역사적으로 보아 정치적으로 소외된 지역이었으나 일찍부터 상업활동과 신문화 도입에 적극적이어서 서구문물과 기독교의 수용이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따라서 민족교육을 담당할 교육기관이나 각종 단체가 조직되었다. 그 결과 구국계몽운동이 활발히 전개될 수 있는 제반여건이 조성되었으며 아울러 새로운 민족운동의 중심지로 부상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일제는 이 지역을 항일의 소굴로 여겨 민족운동의 근거지를 없애고자 ‘안악사건’·‘105인사건’ 등을 날조하여 서북지방의 지도층인사 및 민족운동조직을 뿌리뽑았던 사실은 주지한 대로이다. 이처럼 계몽운동 및 국권회복운동의 중심지인 서북지방은 안악사건·105인사건 등으로 인해 민족운동조직이 파괴당한 후 그 활동이 미미해졌다. 그 대신 이 지역에서는 신민회의 구국운동의 정신적·물질적 기반을 계승해 직접 교육을 받은 지식청년들을 중심으로 비밀결사가 결성되는 양상을 띠게 되었다.

 대체로 1910년대 국내에서의 비밀결사는 1915년을 전후한 시기에 다수가 결성되는 추세였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아울러 일본의 중국 山東지역 출병으로 중일전쟁의 開戰說이 널리 전해지던 당시의 국제정세변화를 독립운동의 適機로 포착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나타난 결과였다. 그런데 국내에서 최초로 발각된 기성볼단의 경우는 이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 결성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들은 조직결성 이후 단시일내에 일제측에 발각된 까닭에 조직확대나 활동상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기는 어려웠던 한계점을 갖고 있었지만 청년학생들이 국권회복을 위해 발빠른 대오정비에 앞장선 것은 높이 평가할만 하다.

 기성볼단은 1914년 5월 평양에서 金永胤이 뜻을 같이 하는 여러 동지와 함께 결성한 비밀결사조직이었다. 조직 당시 동지들의 협의에 따라 김영윤이 총무가 되었다. 기성볼단은 대개 평양 대성학교 출신자 및 학생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결사체인 까닭에 주도 인물들이 당시 대성학교 교사였던 동암 車利錫과 협의하여 그에게 고문직을 위임하였다. 이후 김영윤을 비롯한 주무자들은 우선 단원확보에 총력을 기울이는 한편 일제와의 투쟁을 위해 가장 시급한 것이 바로 무력양성이란 판단하에 구체적인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우선 총무인 김영윤 등은 단원을 독려하면서 애국청년에게 “지금 우리는 안일을 탐할 때가 아니라 해외에 유학하여 우국지사와 일을 함께 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설득하면서 미국의 네브라스카(Nebraska) 무관학교나 서간도 무관학교에서 배워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솔선수범으로 姜原燮 등 수 명을 이끌고 만주로 건너가 무관하교에 입학하였다. 이들은 무관학교 외에 북경·상해 혹은 노령 방면 또는 미국 등지로 건너가 학업에 전념하면서 후일 국권회복운동에 투신할 준비를 위해 투쟁역량을 키우는데 그 목적을 두었다. 대성학교 출신자 이외에 평양지역 청년 약 25명 정도가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결성 이후 비밀리에 단원확대와 준비론적인 운동역량 강화에 노력하던 중 불행히도 1915년 3월에 일경에 의해 피체되었다. 이들 단원들의 피체 당시 일제측에 압수된 증거물 중 무관의 계급·복제를 帝國제도와 대조해서 기재하거나 미국 네브라스카 무관학교의 교과목을 기재한 수첩과 中文으로 된 군대교육에 관한 문답서가 들어 있었다.264) 姜德相,≪現代史資料≫25, 1∼4쪽. 이러한 면은 기성볼단이 신민회의 독립전쟁론적인 운동방략을 이어받아 독립만회를 위해 선택한 투쟁방법이 무엇이었나를 짐작케 해 준다.

 기성볼단은 동시기에 결성되어 활동하던 다른 비밀결사처럼 합방 이전의 의병투쟁적 전통이나 애국계몽운동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으며 동단의 경우 계몽적인 성향도 보이나 단원들에게 군사교육을 강조하고 군사조직 등에 지대한 관심을 나타내고 있던 흔적들이 엿보이므로 투쟁적인 성향도 갖추고 있다고 하겠다.

 동단이 존립했던 1910년대는 일제의 폭압적인 무단통치와 주밀한 감시체제하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해야 하는 어려움으로 인해 비밀결사 중심의 투쟁이 주류를 이루었다. 물론 기성볼단을 위시한 여타의 비밀결사운동은 활동상 여러 가지 제약을 갖고 있고 그 지도인물의 사상적 차이 등으로 인해 복잡성을 내포한다는 한계점도 가진다. 그렇지만 각 계층의 우국지사들과 청년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민족주의사상을 이념적으로 무장한다는 점과 각단체의 영향권내에 속한 국내 각지에서 비밀리에 회원을 조직하고 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국권회복을 위한 각인각양의 힘의 결집을 호소하면서 국내 민족역량을 축적코자 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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