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1. 국내민족운동
  • 3) 계몽운동계열의 단체
  • (2) 조선국권회복단

(2) 조선국권회복단

 朝鮮國權恢復團은 1913년 1월 경북 달성군에서 尹相泰·徐相日 등이 중심이 되어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결성한 비밀결사였다. 즉 1913년 1월 15일에 서상일이 달성군 수성면의 안일암에서 정월대보름의 詩會를 가장해 모인 윤상태·서상일·李始榮·정운일·홍주일 등과 국권회복을 위한 결사체 조직을 협의한 것이 그 출발이었다. 그런데 서상일은 대구출신으로 보성전문학교교 법과에 입학해 신학문을 이수한 후 한말 대구지역 계몽운동단체인 달성친목회를 이끌며 구국계몽운동 일선에서 활동하였던 것이다. 서상일은 이후 재정적인 능력을 갖춘 자산가이면서 항일의식을 겸비한 윤상태를 영입하면서 단의 기초를 다졌다. 1914년 초 의병출신인 김규·황병기 외 무장투쟁적 성향이 강한 홍주일·김재열 등을 합세시킨 뒤에 달성친목회의 기존 조직기반을 적극 활용하면서 단세를 확장시켰던 것이다.

 국권회복단의 결성 초기에는 국내에서의 단세확장, 해외운동세력과의 연계 및 지원, 궁극적으로는 독립쟁취란 목표를 정하였다. 또한 국권을 회복할 것, 단군의 위패 앞에 목적수행을 기도할 것, 단원은 임의탈퇴 엄금, 비밀누설 엄금 및 위반시 단죄 등의 내용을 적은 서약서를 작성하고 각기 연서한 후 단군위패 앞에서 독립투쟁에 진력할 것을 맹세하는 등 강력한 투쟁조직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자 하였다.

 1914년 1월 15일 안일암에서 연례회합을 갖고 조직구성을 구체화하였다. 본부격인 중앙총부와 지부로 편제하여 중앙총부를 대구에 두고 總領 휘하에 외교부·교통부·기밀부·문서부·권유부·결사대를 두었다. 지부가 설치된 곳은 마산 뿐이지만 그 외 지역에는 대구에 태궁상회·향산상회 등을 연락거점으로 활용하고 있었다.265) 양 상회 이외에 서상호의 미곡상(통영) 등이 연락거점 및 재정조달의 기지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 원산의 원흥상회에 윤창기가, 부산 백산상회에는 남형우, 마산의 원동상회에는 마산지부원 이형재가 각각 그 경영에 혹은 관계를 맺고 있어 이 상회들도 그와 유사한 기능을 가졌다고 추측할 수 있다(강영심,<朝鮮國權恢復團의 結成과 活動>,≪한국독립운동사연구≫4, 1990, 150∼151쪽). 총령에는 윤상태, 외교부장에 서상일, 교통부장에 이시영·朴永模, 기밀부장에 홍주일, 문서부장에 서병용·이영국, 권유부장에 鄭舜永, 결사대장에 황병기, 마산지부장에 안확이 각각 선임되었다.266) 국사편찬위원회,≪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7(1988), 국권회복단 1.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8(1989), 국권회복단 2.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9(1989), 3·1운동과 국권회복단.

 기구조직을 완비한 후 구체적인 활동을 전개하기에 앞서 단원확보를 위한 방법으로 종교조직을 적극 활용하기로 협의하고 천도교는 홍주일, 기독교는 정순영이, 불교측은 서상일·서병룡 등이 단원규합에 앞장섰다. 국권회복단의 활동은 대략 결성 이후 1915년 4∼6월 경 군자금모집사건을 계기로 방략상의 갈등이 표면화되어 일부 단원이 이탈하기 전까지와 1919년 3·1운동 발발 이후의 활동으로 구분지을 수 있다.

 초기의 활동으로는 講遊園懇親會란 청년단체를 조직하여 달성친목회와 더불어 동단의 표면단체로 활용하여 단세를 확대시켜 나갔던 것과 군자금모집활동이 있다. 간친회는 1913년 3월에 서병용·윤창기·홍주일 등의 발기로 이루어졌는데 독립운동가들과 기맥을 통하고 해외유학생 및 조선내 학생을 대상으로 항일사상을 고취시켜 이들을 단결시키는 것이 진정한 목표였다. 이를 위해 매주 1회씩 집회를 열고 학술강의를 통한 지식계발, 체육활동을 통한 신체단련을 도모해 독립운동역군으로서의 자질을 향상시키고자 한 것이다. 회원수가 40∼50명에 달했던 점으로 미루어 활동이 활발했음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달성친목회가 중견인사들의 단체였다면 간친회는 혈기왕성한 청년들의 조직이었다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양 단체는 1915년 정운일·김재열의 군자금모집활동이 발각난 이후 그해 9월 일제에 의해 강제해산당하였다.

 국권회복단은 또한 만주나 노령 등 해외 동지에게 군대양성과 무기구입을 위한 군자금 조달을 통한 독립군지원에 역점을 두었다. 그리하여 1915년 4월에 정운일과 김재열은 최준명·최병규 등과 대구의 부호를 대상으로 군자금모집활동을 전개한 바 있다. 하지만 목적달성에 실패하고 조직이 발각될 위기에 처하자 단 내부에서 운동방략을 둘러싼 갈등이 심화되어 갔다. 이에 무력투쟁적 성향이 강한 정운일·김재열 등이 단을 이탈하여 박상진의 대한광복회에 합세하였으며 이후 의병출신의 김규와 황병기·정순영·이시영도 단을 떠나게 되었다.

 이렇게 국권회복단의 거점의 하나였던 강유원친목회나 달성친목회가 해산당하면서 단의 조직력에 타격을 입은데다가 1916년 9월 대한광복회의 군자금모집사건의 영향으로 단의 조직과 활동도 더욱 위축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국권회복단은 운동실행계획에 일대 차질이 생겼고 주위상황도 여의치 않아 이후 사태를 관망하면서 단세를 보존하던 중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비로소 활동을 재개하게 된 것이다.

 3·1운동이 발발한 이후 윤상태·서상일을 중심으로 안확·이형재·김기성·南亨祐·卞相泰·申相泰·金應燮·배중세·이순상 등이 모여 거족적인 이 운동에 적극 동참하기로 결의하고 구체적으로 협의하였다. 우선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는 한편, 국권회복단의 활동지역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결행하고 마산지역은 지부장인 안확을, 신상태·변상태는 경상남도 통영과 창원지역의 3·1운동 확산을 담당케 하였다.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일환으로 군자금을 모집할 것과 아울러 외교적인 방법으로 파리강화회의에 보낼<조선독립청원서>를 작성하기로 계획하였다. 군자금모집은 서상일과 김재열이 담당하였고<독립청원서>작성은 윤상태가 주도하기로 결정하였다. 군자금모집을 담당한 서상일은 서상환을 통해 통영의 대부호인 친척 서상호에게 자금지원을 종용하여 일정금액을 지원받았으며 서창규·배상연 등으로부터도 일정액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한편 김재열은 달성친목회원으로 친분이 있던 김유덕을 통해 그의 친척인 김유경으로부터 자금지원을 약속받는 등 두 사람의 활약으로 적지 않은 군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렇게 수합된 자금은 남형우와 김응섭이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한 것으로 추측된다.267) 강영심, 앞의 글(1990), 161∼162쪽.

 또한 서상일은 임시정부에서 정부수립사실을 일반 민중에게 알리고 그 협조를 종용케 하는 포고문의 배포활동도 전개하였다. 이 문서는 안동현의 박광이 경영하는 곡물상의 고용원인 文相直이 임정 통신원으로부터 전달받은 것으로 국내 남부지방에 반포할 임시정부 선포문과 강령이었다. 이 문건에는 임시정부의 설치를 선포하면서 조선민족은 일본통치를 벗어났으니 일본의 명령을 따를 필요가 없으며 또한 이후로 유혈의 참상을 보더라도 독립운동을 수행하여 완전한 정부를 조직할 때까지 조세 등 일체를 납부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268) 국사편찬위원회,≪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7, 197쪽. 임시정부의 선전문을 전달받은 서상일은 이를 경상도 일대 동지들을 통해 배포하는 한편 통영의 서상호에게 배포를 부탁하였다.

 아울러 국권회복단은 독자적으로<독립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전달하는 한편 국내외에도 배포하여 조선민의 독립의지를 전세계에 천명코자 한 것이다. 청원서는 월탄면의 유생 張錫英에게 작성을 의뢰하였으며 작성된 청원서는 상해 임시정부로 파견되는 김응섭이 비밀리에 반출키로 하였다. 상해로 가져가 이를 번역·인쇄하여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였으며 아울러 국내외 각지에도 배포할 수 있었다.

 창원지역의 독립운동을 주도한 변상태는 진전면 진동리로 돌아왔다. 이에 단의 계획을 실현하고자 변상섭·권영대 등과 협의하여 4월 3일 삼짇날을 기해 독립만세운동을 협의하여, 인근 각리의 구장을 통해 면민들에게 거사의 취지와 실천방법을 주지시키도록 하였다. 마침내 거사당일인 4월 3일 아침 양촌리 천변에 대형 태극기가 세위지자 일암리·양촌리·봉암리의 군중들이 운집하기 시작하였다. 변상태의 독립당위성에 대한 선포를 시작으로 변상섭의<독립선언서낭독>에 이어 독립만세를 불렀다. 시위군중이 읍내로 전진하면서 인근 진북 진동면의 면민까지 합세해 1천 수백 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2시 경 진동주재 헌병 및 보조원 재향군인들이 무장한 채 시위군중을 향해 발포하여 8명이 순국하고 20여 명이 부상당하였으며 시위대는 무력으로 강제 해산되었다. 진동·진북·진전면민이 함께 의거에 참여한 삼진의거는 수원·선천·수안의거와 함께 4대 의거로 일컬어질 만큼 규모가 컸던 투쟁이었다. 이렇게 삼진의거는 국권회복단의 활동의 일환으로 3·1운동 시기 남부지방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려던 계획에 의해 추진되었으며 단원들의 신속한 활약으로 대규모 항일투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국권회복단의 이념은 뚜렷이 드러나지 않지만 독립실현의 당면과제를 해결키 위해 민족이 聖祖인 단군을 奉仕하는 대종교의식을 빌어 단원의 일체감을 형성코자 하였다. 즉 단군교가 새롭게 태어났다는 重光 속에서 단군이 세운 조국의 국권을 되찾아야 한다는 논리적인 근거를 찾는 대종교적 민족의식을 국권회복단의 강령처럼 받들고 있다.269) 강영심, 앞의 글(1990), 156쪽.

 이렇게 국권회복단은 1910년대 망국으로 인한 독립운동의 주객관적인 변화 속에서 새로운 독립운동방략을 정비키 위한 일환으로 경상도 일대의 계몽주의적인 중산층과 의병적 성향이 강한 인사들을 중심으로 독립쟁취를 목적으로 결성되었던 것이다. 대구를 거점으로 결성되었지만 점차 경북 서남부와 경남지방에 분포되어 있었던 조직이다. 활동도 계몽활동과 상업활동이나 무력에 의한 군자금조달 등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동단은 후자가 주류를 이룬 상황 속에서 노선상의 갈등이 표면화하자 의병계열이 이탈함으로써 무장투쟁적인 측면은 약화되고 점차 계몽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단체로 변모되어 갔다.270) 국사편찬위원회,≪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7∼9. 이후 활동을 재개한 3·1운동 시기에는 독립운동 자금조달과 임시정부 선전문 배포를 통한 임시정부 지원활동, 외교적 방략으로 파리강화회의에 보낼<독립청원서>작성, 남부지방의 독립운동 결행계획의 일환으로 三鎭義擧주도 등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국권회복단의 변화 모습 속에서 1910년대 국내민족운동이 새로운 이념과 전략을 모색하면서 무단통치란 극한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가는 면모를 살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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