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1. 국내민족운동
  • 3) 계몽운동계열의 단체
  • (3) 조선산직장려계

(3) 조선산직장려계

 朝鮮産織獎勵契는 1915년 3월 京城高等普通學敎員養成所에 재학중인 李用雨가 중심이 되어 조직한 경제사상 운동조직이었다. 경성 교원양성소 학생들은 1914년 10월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갔다가 당시 일본의 현대적 문물제도의 발달을 살펴보게 되었으며 이제 우리 민족도 상당한 각오를 하지 않으면 영구히 일본의 노예로 전락하게 될 것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귀국하자마자 이를 실천에 옮기고자 방법을 강구하던 중 1915년 1월 학생들의 회합에서 이용우는 양성소를 수료하고 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게 된 후에도 경제사상운동을 펼쳐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어서 학동 및 청년층에 대해 조선혼을 고취시키고 정신적 결합을 도모하며 일본인에게 빼앗긴 각종 사업을 조선인 스스로 흥하게 할 조직을 결성하여 민족부흥의 길을 도모할 것을 결의하였다. 또한 이들은 일본에 탈취당한 경제권을 다시 탈환하기 위하여는 각종 사업을 전개하여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여야 한다는 점도 결의하였다.

 이를 실현하고자 이용우는 당시 휘문중학교 교사인 南亨祐와 상의하였으며 다시 그의 소개로 崔南善에게 자문을 구하여 찬동을 얻었다. 그러나 취지에 걸맞는 조직구성은 경성훈련원 생도들의 힘만으로 설립에 한계가 있다고 인식한 후 남형우가 중심이 되어 각 중등학교 교사들 중 조직결성의 취지에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협의하였다. 마침내 1915년 3월 학교 교사가 주주가 되어 조선산직장려계를 조직하였다.

 창립 당시의 임원으로는 계장에 중앙학교 교사인 崔奎翼, 총무에 尹昶植, 회계에 최남선·閔溶鎬, 서기에 李鎭石(보성중학 졸업)·嚴柱東(보성중학 졸업), 協議員에 柳瑾·남형우·金昌德(직물업)·吳相鉉(한성병원 주인)·金枓奉·白南雲(청년회원)·安鍾建(청년회원)·李康現(중앙학교 교사)·金馹(보성학교 교사)·朴重華(휘문의숙장) 등이 선임되었다. 계의 운영은 주식제도를 채택하여 1주에 20원으로 하였으며, 계원 한 사람이 10명의 주주를 모집하기로 하였다. 회원은 각지의 학생과 교사로 구성되었는데 그 수가 130여 명에 이르렀다.271) 朝鮮總督府 慶北警察部, 앞의 책, 260∼264쪽. 130명 중 44명이 보통학교 혹은 사립학교 교원이었고 17명이 경성양성소 학생이었다. 특히 최규익·김덕창·이강현은 직물업에 대한 지식과 실무경험을 가진 인물들로서 산직장려계를 이끌 수 있는 중추적인 인물들이었다. 또한 이 장려계에는 당시 국내의 이름있는 신지식청년층은 거의 망라되었다고 할 정도로 많은 인사들이 일반계원으로 참여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유근·白南奎(중앙학교 교사)·李用雨(興海公立 보통학교 훈도)·金成洙(중앙학교 설립자)·安在鴻(중앙학교 학감)·張志暎(경신학교 교사)·申錫雨·朴勝喆 등이 있다.

 이들은 해외에서 간행되는 독립운동신문인≪國民報≫를 비밀리에 반입하여 구독하게 하였으며, 일본에 수학여행을 다녀와서 보고 느낀 것을 기록한≪東遊誌≫90부를 비밀리에 만들어 배포함으로써 민족적 토론의 광장을 마련하였다. 이강현이 산직장려계의 창립동기를 “조선의 원료로 조선에서 조선인이 방적하여 조선인이 製織하여 조선인이 착용하자”라고 언급한 바와 같이 自給自作을 통해 한국인 민족자본의 성장을 궁극적인 목표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272) 李康賢,<朝鮮産織獎勵契에 대하여>(≪學之光≫6, 1915). 따라서 조선산직장려계는 1920년대 초에 경제적 실력양성운동으로 전개된 물산장려운동과 그 취지와 목적에서 궤를 같이하고 있다고 하겠다.273) 박찬승은 일부 연구자들이 조선산직장려계를 1910년대 각종비밀결사 가운데 포함시키는 경우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 단체는 어디까지나 공개된 단체였음을 지적하였다(박찬승,≪한국근대정치사상사연구≫, 역사비평사, 1992, 142∼145쪽).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서북지방의 중산층 지식청년이 큰 타격을 받은 뒤 여타의 청년들은 산직장려계로 일단 연락망을 갖춘 셈이었다. 105인 사건의 관련인사가 대개 한말 신민회와 관련이 깊었다고 보면 한말 계몽주의의 좌파적 인사였다고 할 수 있는데 1915년의 산직장려계의 조직은 계몽주의 우파모임이었다고 할 수 있다.274) 趙東杰, 앞의 책, 380∼381쪽.
이 글에서 ‘우파’란 개인적으로 민족적 양심과 민족독립을 지향하지만 직접적으로 체제부정적 혁명전략을 취하지 않는 온건파라고 할 수 있으며 일제와 타협하는 개량주의와는 다르나 개량주의로 변질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부류로 그 성격을 규정하고 있다.
이들은 1916년 3월 보안법위반으로 고생하였지만 대부분이 교원이었으므로 일선에서 남긴 민족교육의 영향은 3·1운동에도 미쳤다고 보아야 한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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