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1. 국내민족운동
  • 4) 혁명적 경향의 민족운동단체
  • (1) 대한광복회

(1) 대한광복회

 大韓光復會는 군자금을 조달하여 만주의 독립군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하고 국내에 혁명기지를 확보한 후, 적시에 무력투쟁으로 독립쟁취를 목표했던 1910년대의 혁명단체였다.282) 姜德相,≪現代史資料≫25.
國史編纂委員會 編,≪한국독립운동사≫2, 427∼489쪽.
趙東杰,<대한광복회의 결성과 그 선행조직>·<대한광복회연구>(앞의 책, 1989).
朴永錫,<대한광복회연구>(≪한국민족운동사연구≫1, 국사편찬위원회, 1986).
대한광복회는 1915년 7월에 결성되었는데, 1913년 풍기에서 의병적인 인사들에 의해 조직된 풍기광복단과 1913년 대구의 조선국권회복단 중 일부 과격한 인사들이 노선상의 갈등으로 이탈하여 함께 조직한 것이었다.

 대한광복회는 한말 의병장 許蔿의 제자인 朴尙鎭 주도하에 운영되었다. 박상진은 유가출신으로 척사적인 성리학 공부를 마친 후에 경성 양정의숙의 법과를 졸업하여 판사시험에 합격한 혁신유림이었다. 또한 국권상실 이후 의병거사 계획을 추진한 경험으로 미루어 의병적 기질을 지녔던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척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신교육을 수학한 혁신유림이 되었으며 혁신유림임에도 계몽주의적 성향에 경도되지 않고 의병의식을 모두 겸비한 인물이었다. 박상진의 이같은 기질 때문에 풍기광복단과 국권회복단 일부의 통합을 이끌어 낼 수 있었으며, 이를 더욱 발전시켜 보다 적극적인 민족운동방략으로 전개해 나갈 수 있었다. 대한광복회는 풍기광복단과 국권회복단의 의병적 인사를 주축으로 결성한 무장조직이었던 것이다.

 “우리 조국을 광복하고 우리의 대대 원수를 물리쳐서 우리 동포를 구하는 것이 우리 민족의 천명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의무이다. 이것이 본회가 성패나 利鈍을 생각지 않고 죽음을 무릅쓰고 본회를 창립한 소이로 …”라고 한 광복회의 포고문은 광복회 창립의 취지를 짐작케 한다. 아울러 아래와 같은 대한광복회의<강령>을 살피면 그 취지를 더욱 잘 파악할 수 있다.

① 부호의 의연금 및 일인이 불법 징수하는 세금을 압수하여 무장을 준비한다. ② 남북 만주에 군관학교를 세워 독립전사를 양성한다. ③ 종래의 의병 및 해산군인과 만주 이주민을 소집하여 훈련한다. ④ 중국·러시아 등 여러 나라에 의뢰하여 무기를 구입한다. ⑤ 본회의 군사행동·집회·왕래 등 모든 연락기관의 본부를 상덕태상회에 두고 韓滿 각 요지와 북경·상해에 그 지점 또는 여관·鑛務所 등을 두어 연락기관으로 한다. ⑥ 일인 고관 및 한인 반역자를 수시 수처에서 처단하는 行刑部를 둔다. ⑦ 무력이 완비되는 대로 일인 섬멸전을 단행하여 최후 목적의 달성을 기함.

 이와 같이 대한광복회는 군자금조달-군관학교 및 잡화상 등 혁명기지건설-무기비축, 독립군양성-혁명(독립)달성 이라는 구도의 민족운동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민족운동의 방략을 독립전쟁론에 두고 이를 준비하기 위해 독립군양성에 목적을 두고 군자금모집과 무기구입에 초점을 두었으며 일제통치하에 안일하는 친일부호의 처단 등 의협투쟁을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이러한 목표의 실행을 위해 조직도 총사령·부사령 등의 명칭을 사용해 무장조직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즉 대한광복회는 국내에서 결성된 독립군단체였으며 기존의 의병이나 해외의 독립군과는 다른 혁명을 계획한 점에서 혁명단체였다 하겠다.

 결성 당시의 인사로는 박상진, 국권회복단의 정운일, 풍기광복단의 채기중·유창순·유장렬·韓焄·강병수·김병렬·정만교·김상오·정운홍·정진화·황상규·이각 등과 양 단과 관련없는 金漢鍾·엄정섭·禹在龍·梁濟安·權寧萬·金敬泰 등이 있다. 1916년 이후 충청도의 金漢鍾, 황해도의 李觀求, 전라도의 李秉昊 등이 가입하여 새로운 중심인물로 주목받았다.

 광복회의 조직은 1916년 서울을 중심으로 크게 확대되었다. 이 때 노백린·김좌진·申鉉大·尹洪重·신현두·金鼎浩·권태진·임병한·윤형중·김홍두·尹致晟·이현·박성태·명기섭 등이 가입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곧 해외로 망명하여 활동에 크게 참여할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즉 그 해 칠곡의 부호 장승원과 대구부호 徐祐淳에 대한 처단이 실패하고 박상진은 그 여파로 만주에서 무기를 구입하여 귀국하는 길에 서울에서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광복회는 큰 타격을 받았으며, 노백린은 미주로, 김좌진은 만주로 망명하는 등 많은 인사가 해외로 탈출해 갔다.

 또한 대한광복회는 1916년 예산을 중심으로 한 충청도지방 일대와 해주를 중심으로 한 황해도 일대, 보성을 비롯한 전라남도 일대 그리고 삼척·인천 등 국내는 물론 해외의 길림·장춘·안동 등 서간도의 독립군기지로까지 확대되어 갔다. 충청도조직은 김한종·장두환·庾昌淳·김경태 등이 중심인데 그 중 김한종은 예산 유가출신으로 1906년 민종식의 홍주의진에 종군했던 인물이다.283) 광복회의 인사 중 민종식의진에 종군했던 사람은 김한종 이외에도 한훈·유창순·권상석·윤병일·정태복 등이 있다(조동걸,<대한광복회연구>, 앞의 책, 284쪽). 그를 따르는 충청도 회원 중 14명이 상민이었다는 점은 그가 척사적인 의병인식을 어느 정도 탈피했으리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황해도 책임자인 이관구는 황해도 송화 출신으로 유가집안에서 성장하였으며 20세 무렵 평양의 대성학교와 숭실전문학교에서 수학하면서 신학문을 접하게 되었다. 국권상실 이후 중국에 망명해 중국혁명에 참가한 바 있던 혁신유림의 인물이다.284) 조동걸, 위의 글, 286쪽. 이처럼 대한광복회의 구성원은 한훈·유창순·김한종 등 의병출신자가 주류를 이루었고 박상진·김좌진 등 신교육을 받은 인사들도 많았다. 특히 박상진·이관구 등은 중국 신해혁명에 참가한 바 있던 혁명적 인사였다. 광복회의 주도자들은 대부분 구시대의 양반, 유가에서 자란 구시대를 경험한 연령의 인사들이지만 이에 머물지 않고 세대를 뛰어 넘어 새시대의 건설을 위한 변혁적인 성향을 띤 인사들이었다. 아울러 구성원의 연령도 30, 40대를 중심으로 20대와 50대도 함께 참여해 신구세대를 대변한 조직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285) 각종 자료 및 경찰조서에 표기된 연령의 집계를 보면 결성당시의 인사 16명은 30대(5), 40대(8), 50대(3)이며, 황해도는 20대(4), 30대(12), 40대(6), 50대(2)이었고, 충청도는 20대(8), 30대(14), 40대(9), 50대(3), 미상(3)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여준다(慶北警務部,≪高等警察要史≫, 181∼183쪽;≪독립운동사자료집≫10,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109쪽;≪독립운동사자료집≫11, 673∼674쪽).

 조직구성은 총사령에 박상진, 부사령에 이석대로 진영을 이루었으며 뒤에 부사령은 만주에 상주하며 독립군양성을 담당케 하였다. 이석대가 전사한 1917년 이후에는 김좌진이 이를 이어 부사령을 맡았다.

 초기에는 대구를 중심한 경상도 일대에 조직이 결성되었으나 1916년부터 예산을 중심한 충청도·경기도, 해주를 중심한 황해도 일대, 강원도, 보성을 비롯한 전남 일대, 평안도 등지로 확대하여 전국적인 조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그 외에 길림·장춘·안동을 비롯한 서간도의 독립군기지로 확대되고 있었다. 이같은 확대조직은 각지에 혁명기지로서의 거점확보를 토대로 하여 이루어졌다.

 즉 대한광복회는 각처에 혁명기지의 거점을 설치하고자 계획하여 국내의 100여 곳에 거점을 확보하고 무기를 준비하여 신해혁명과 같은 혁명을 달성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대구(상덕태상회)·영주(대동상점)·광주(이명서)·삼척(김동호)·인천(이재덕, 미곡취인소)·인천(황학수, 미곡중개소)·용천(文應極)과 만주의 안동(三達양행)·장춘(상원양행)에 곡물상점을 설치하여 거점으로 삼았다. 그 외에 서울이 魚在河, 경북 안동의 이종영, 고령의 김재열 私家, 아니면 여관이나 음식점 등도 활동거점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조직상의 특징은 광복회<강령>제5항에서 밝힌 연락기관 설치를 실현한 점에서 주목할만 하다. 그리고 각처의 거점에서는 무기도 수십 정 확보하였고, 만주에 인재를 보내 훈련하게 하였고, 그에 필요한 군자금을 수합하였다. 또한 행동지침으로서 비밀·폭동·암살·혁명의 4대 요강이 시달되고 있다.

 대한광복회는 우선 군자금조달을 위한 활동은 부호의 의연금이 대종을 이루지만 그외에 세금탈취와 일인광산습격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광산습격은 풍기광복단의 상동광산건이 있었으나 광복회의 광산습격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다만 우재룡·권영만이 경주에서 우편차를 습격하여 세금일부를 탈취한 적이 있었다.286) 조동걸,<대한광복회연구>(앞의 책), 293쪽. 그런데 광복회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군자금이 필요하였으므로 이를 충당하려면 각지의 부호를 대상으로 의연금을 수집하는 것이 최선책이란 입장에서 전국의 부호명단을 작성하여 각각 배당액을 산정해 자발적인 모금과 강제모금의 방법을 택하였다. 그리하여 1917∼18년경 광복회 등의 이름으로 군자금모금을 통고하는 포고문을 발송하였는데 당시 일제측에 보고된 수만도 100여 통이 넘는 것을 보아도 전국적으로 포고문이 송달되었음을 짐작케 한다.287) 姜德相,≪現代史資料≫25, 33∼34·58∼59쪽.

 이러한 군자금모금과 더불어 광복회가 주력한 것이 혁명군의 기지건설이었으며, 이는 전국에 1백 곳에 1만 원씩의 자금으로 건설하려던 잡화상이 바로 그 기지로 무기구입과 혁명군집결지로 만들고자 계획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군자금 조달이 용이하지 않게 되자 국내에 설치된 곡물상은 연락장소의 역할에 그칠 뿐이었다. 그러므로 광복회는 반민족적인 의식과 태도가 심화되기 전에 친일부호를 처단하여 지주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고자 하였다. 더불어 조선총독 암살계획을 추진시켜 의협투쟁방법도 활용코자 하였다. 황해도 책임자 이관구가 1916년 6월부터 추진한 암살계획은 추진과정에서 차질을 빚어 성공하지 못했으며 이후 이관구는 군자금 수합에 열중하던 중 뜻하지 않게 1918년 6월 밀고로 일경에 체포되어 황해도 조직이 파괴당하고 말았다.

 광복회는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1917년과 1918년 군자금모금에 응하지 않는 칠곡의 부호 장승원·아산군 고면장 박용하 등의 악성부호를 처단하기도 하였다. 이들 악성부호의 처단현장에<宣告狀>을 두었기 때문에 광복회의 소문이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그 결과 일제의 수사도 강화되어 1918년 초부터 관련자들이 드러나면서 박상진·채기중·김한종·장두환 등의 인사들이 피검되었으며 이를 면한 이들의 이탈로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파괴되었던 것이다.288) 피검된 인사중 박상진·채기중·김한종은 사형이 언도되어 순국하였고 이후 1920년 피검된 한훈·우재룡·이병온 등 대부분의 회원들은 무기나 장기형의 옥고를 치루었다.

 그리고 체포를 면한 회원은 한훈·우재룡·김상옥처럼 만주로 망명하여 암살단·疇備團 등을 결성하여 1920년 義俠鬪爭을 전개하여 그 운동의 맥을 이어가거나, 혹은 의열단의 일원이 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볼 때 의협투쟁의 측면에서 보면 대한광복회가 암살단과 의열단으로 이어지는 그 선구적인 조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대한광복회는 국내외에 기지를 건설하여 혁명군을 양성하고 일본이 국제적으로 고립하게 될 경우 일시에 혁명을 일으켜 독립을 쟁취하려던 계획을 추진했던 강력한 무력투쟁단체였다. 이런 면은 1910년대 국내민족운동전선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광복회만의 특징이라 하겠다.

 끝으로 대한광복회는 그의 목적이 “국군을 회복하여 공화정치를 실현하는 데 있다”라고 박상진 등이 주장한 바와 같이 공화주의의 건국이념을 표방한 단체였다는 점에서도 이미 1910년대에 엄존하고 있던 척사이념이나 복벽주의를 탈피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성리학적인 민족주의에서 벗어나 단군의식을 주류로 한 자주적 민족의식을 표방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광복회 주도층의 자주의식은 1910년 전후 단군 정통의 역사의식 계승을 현실 독립운동상의 요구에 따라 대종교로 발전시킨 당시의 상황하에서 혁신유림을 비롯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대종교에 귀의하였던 점과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즉 단군정통의 역사인식, 단군의 ‘중광’과 국권의 ‘광복’을 일치시키는 논리, 민족 不祧位로서의 윤리의식 등이 대종교적인 사상의 특징이며 이것이 민족운동의 현실적 요구에 부응되면서 당시 민족운동가들의 민족주의로 체계화된 것을 대종교적 민족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대한광복회의 이념이었으며 더 나아가 1910년대 결성된 국내의 비밀결사나 해외 일부 단체들의 이념이었던 점은 1910년대 민족운동의 특징 중 하나였음을 짚어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대한광복회는 혁명적인 방법의 민족운동전개, 혁신유림의 근대국가지향과 대종교적 민족주의, 의협투쟁의 방략 등을 그 특징으로 하였으며 특히 의협투쟁이 운동론으로 이론적 틀을 마련하면서 이후 민족운동의 중요한 방략으로 정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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