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1. 국내민족운동
  • 5) 1910년대 국내민족운동의 성격

5) 1910년대 국내민족운동의 성격

 지금까지 살펴본 바를 중심으로 1910년대 국내민족운동의 특징적인 면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겠다.

 우선 먼저 국내에서 결성된 민족운동단체의 주된 민족운동 논리가 독립전쟁론 혹은 그에 기초한 준비론이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단체로는 혁명적 경향의 대한광복회였으며 그 외에 의병계열의 단체들도 궁극적으로는 이에 동조한 것임을 밝혔다. 독립전쟁론이란 국외에 독립운동기지를 설치하여 독립군을 양성한 후 적당한 시기에 일제와의 혈전을 통해 빼앗긴 국권을 되찾는다는 독립운동상의 방략으로서 이는 구한말 이래 전개된 두 갈래 민족운동의 논리인 실력양성론과 무장투쟁론(의병전쟁)을 하나로 결합시킨 統全的인 운동론이다. 즉 당장 무력을 동원해 독립전쟁을 일으키자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비무장 실력양성론이 지닌 한계점과 무단통치란 현실적 여건하에서 무장투쟁론이 갖는 비현실성을 상호 보완하여 발전시킨 전쟁준비론적인 운동론이었다. 또한 민족의 독립역량을 강화해 나가면서 향후 일본과 러시아 혹은 미국과 일본간의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 기회를 이용해 대일 독립전쟁을 벌인다는 기회포착적 독립전쟁론이기도 하였다. 이같은 방략의 일치는 국권을 상실한 이후 각각 분리된 채 민족역량의 결집을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이끌어갔던 종래의 운동방략상의 차별성과 분파성이 희석되면서 새로운 항일투쟁의 방편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얻어진 것이었다. 그리하여 가장 적극적인 투쟁인 독립전쟁론을 기조로 한 새로운 민족독립운동의 지평을 펼쳐나가기 시작하였으며 바로 이점을 1910년대 국내는 물론 국외에서 전개된 민족운동 상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이시기의 독립전쟁론은 본격적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단계까지 이르지 못했으므로 독립전쟁을 위한 준비단계의 성격이 더 강했다는 점에서 전쟁준비단계로서의 독립전쟁론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대한광복회처럼 무력항쟁이 수행되지만 국지적 일시적이거나 개인적 소규모의 항쟁이므로 본격적인 전쟁수행이라기 보다는 전쟁을 위한 내재적인 역량을 축적하는 단계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296) 윤경로, 앞의 글, 248쪽.

 다음으로 국내의 경우 국외와는 달리 일제의 직접적인 무단통치를 받고 있었으므로 독립전쟁론에 입각한 민족운동을 실현하는 데에는 많은 제약이 따랐다. 따라서 교육·식산·계몽 등의 활동을 통한 실력양성운동도 더불어 이루어졌으니 이를테면 조선물산장려계·조선국권회복단·단천자립단의 활동 그 외에 학생들의 민족의식 고양을 목적으로 한 애국창가집 교수활동 등이 이 부류에 속한 운동들이다. 독립전쟁론이 중요한 경향임은 분명하지만 국내의 특수한 사정상 다양한 방략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고 하겠다.

 이 시기 민족운동이 보여준 두번째 특징은 비밀결사체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현상은 국권을 강탈당한 식민지하에서 그것도 철통같은 감시망이 구축된 무단통치하에서의 민족운동이 갖는 일반적인 특징으로 구한말 조직된 항일비밀결사인 신민회와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강점 직후 신민회의 존재를 감지한 일제는 이들 조직을 비롯한 일체의 항일조직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의도하에 이른바 ‘105인사건’을 조작하여 반일민족세력을 근절시키고자 하였다. 물론 재판과정에서 그 사건의 허구와 피체된 민족지도자에 대한 악랄한 고문사실이 밝혀지면서 오히려 항일민족의식이 더욱 고양되었으며 이후 여러 형태의 비밀결사가 결성되어 민족운동의 중심체로 활약하게 되었다. 물론 이 시기는 당시 민족운동의 주류인 비밀결사란 조직하에서 여러 가지 제약을 갖고 있으며 그 지도인물의 사상적 차이 등으로 인해 복잡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지만 각 계층의 우국지사들과 청년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되며 민족주의사상을 이념적으로 무장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이들은 각 단체의 영향권내에 속한 국내 각지에서 비밀리에 회원을 조직하고 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국권회복을 위한 각인각양의 힘의 결집을 호소하면서 국내 민족역량을 축적코자 하였다.

 셋째, 국내민족운동을 이끈 운동단체가 채택한 방략 및 그 실행방법에 따라 특유한 조직체제를 구성하였다는 점이다.

 즉 1910년대의 대표적 혁명단체인 광복회는 總司領·副司領·指揮軍·參謀長 등 군사적인 조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의병적 성격이 강한 독립의군부나 이증연의 비밀결사의 경우도 직제나 직명에서 그런 면모를 찾을 수 있다. 국권회복단은 결사대부장을 설치해 독립군적인 면도 있다고 보이지만 대체로 계몽주의적 성향의 직제를 갖추었다. 그 외 조선산직장려계나 자립단의 조직구성은 각기 계몽주의적 방략에 맞는 체제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 시기 국내 단체들의 경우, 대부분 전국적인 조직확대를 계획하는 한편 해외에도 조직활동을 위한 거점을 마련하는 등 해외 민족운동세력과 연결체제를 구축코자 노력하였던 것에서도 유사성을 찾아볼 수 있다. 먼저 대한독립의군부는 중앙에 순무총장을 설치하고 각도·각군 조직체계를 갖추었으며, 국권회복단은 마산에 지부장을 두고 상회란 상업조직을 각지에 두어 거점으로 구축코자 하였다. 또한 대한광복회도 국내 각지 및 만주·북경·상해 등에 기관설치를 시도하였으며 민단조합도 지부장을 두는 등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각 단체의 계획과는 달리 대한광복회를 제외한 대부분의 경우 중심활동지역이 국내 일부지역에 국한되는 것이 일반적인 양상이었다. 이는 당시 무단정치하에서 혈연·지연, 혹은 종교적 집회에 의한 동지규합이나 조직결성이 가능할 수밖에 없던 어려운 상황을 시사해 주고 있다.

 조직체제와 관련해 또 하나 주목할만한 점이 있다. 즉, 독립운동과 같이 비밀을 요하는 경우에는 자금조달과 연락망 구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런데 1910년대 국내 민족운동결사체들은 그 성격상 공개적인 활동이 어려웠기 때문에 각종 상점과 곡물상회 등을 적극 활용하면서 이를 극복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를테면 조선국권회복단과 연결된 대구의 태궁상회와 부산의 백산상회·대한광복회와 유관한 대구의 상덕태상회와 영주의 대동상점 등은 잡화상이나 곡물상을 운영하면서 연락 거점으로 이용하거나 운동자금을 조달하였던 것이다.

 넷째, 이 시기 민족운동단체의 중심인물은 각 계층의 우국지사들, 한말 구국교육운동의 항일투쟁정신으로 무장한 애국청년·학생들이었다는 점이다. 부연하면 한말 의병출신이나 의병적 성향을 지닌 양반유생들, 계몽운동적 성향이 강한 중산층, 한말 이후 신교육을 이수한 지식 청년들 그 외 일찍이 신학문이나 서구문물을 접하고 간도·중국·연해주 등에 망명해 중국혁명을 경험하고 돌아온 혁명적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민족운동단체를 조직,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한 것이었다. 주목할 점은 주도 인물들 중 간도·연해주·중국·미주 등지로 건너가 그 지역 독립운동 전개상황이나 국제정세 등에 대한 흐름을 파악할 기회를 가졌던 이가 많았다는 사실이다. 각지 독립운동의 전개상황을 보고 국내운동과 연계투쟁의 필요를 절감했거나 당시 국제정세를 파악해 다른 이들보다 신속하고, 적극적인 대응책을 계획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할 수 있겠다.

 더구나 학생층의 경우를 보면 일제의<조선교육령사립학교규칙>(1917)·<서당규칙>(1918) 발포 등을 통한 민족교육 탄압책은 오히려 학생들에게 항일민족의식을 더욱 고양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그 결과 협성학교의 학우회, 숭의학교와 紀全學校의 송죽형제회, 경성고보의 조선물산장려계, 숭실학교의 조선국민회 등 비밀결사체가 조직되어 학생 중심의 민족운동이 추진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민족운동의 중심세력에 관한 문제와 관련하여 민족운동 참여 계층의 저변 확대란 점도 지적해야 할 부분이다. 즉 1910년대 초반에는 구한국군 출신 채응언이 주도한 의병부대 및 척사유림들이 중심이 된 독립의군부와 민단조합, 그리고 풍기광복단 등 의병 계열의 단체가 주로 활동하였으나 계몽주의계열의 지식인과 유산가들이 설립한 조선국권회복단, 기독교계 청년 및 학생들이 조직한 조선국민회, 교사와 지식층 청년들이 참여한 조선산직장려계, 혁신유림층과 평민계층이 함께 결성한 대한광복회 등의 출현으로 그 참여 계층의 저변이 점차 확대되었던 것이다. 또한 혁신유림과 평민출신들이 공화주의를 표방한 대한광복회의 출현은 1910년대 민족운동이 기존의 사회·경제적 차이와 이념을 극복한 새로운 민족운동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었다.

 다섯째로, 이 시기 민족운동은 합방 이전의 의병투쟁적 전통이나 구국계몽운동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켜 한 차원 높아진 국권회복운동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전자를 계승한 것이 독립의군부·민단조합 등이라면 후자를 이은 것은 기성볼단·조선산직장려계·자립단 등이 대표적이다. 이에 비해 대한광복회는 의병적 무력투쟁과 계몽주의적 노선을 접목·발전시킨 독립군적 단체라 할 수 있다. 국권회복단의 경우나 이증연의 비밀결사 등도 계몽적인 방략과 의협투쟁적인 측면이 병행되었던 예로 들 수 있다.

 여섯째, 민족운동단체의 활동은 물론 의병계열·계몽운동계열 그리고 혁명적 경향의 단체 중 어느 유형에 속하는가에 따라 중점을 둔 활동상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조선산직장려계나 애국창가집 활동의 경우를 제외하면 대체로 ①조직확대 및 동지규합, ②일본군에 대항할 군사력준비 및 군자금모집, ③친일파 등 일본주구와 총독 이하 일인고관암살, ④국권반환요구서 송달, ⑤실업진작 및 구국교육활동, ⑥해외독립운동세력과 연락도모 및 지원활동 등을 주된 활동으로 꼽을 수 있다. 이처럼 이들은 주로 군자금을 수합하고 무기를 구입하며, 국외 독립운동단체들과의 연대를 강화하는 등 독립전쟁론에 입각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데 주력하였다.

 일곱째, 민족운동단체의 결성이 1915년을 전후한 시기에 급증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당시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일본의 산동출병으로 인한 중일전쟁 개전설의 고조 등 국제정세변화와 관련지어 볼 수 있다. 일본이 전란에 처할 때를 독립운동의 적기로 포착하기 위한 전략을 실천코자 비밀결사가 조직된 것이었다. 물론 이들은 조직결성 이후 단시일내에 일제 측에 발각된 까닭에 조직확대나 군자금모집 활동상에 있어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기는 어려웠던 한계점을 갖고 있었다.

 이 시기 민족운동단체가 보여준 또 하나의 특징은 종교적 배경과 성향을 띤 조직이 적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구한말 대종교의 민족운동이나, 기독교인들의 신민회 활동 등을 계승하였다는 측면도 있겠지만 일제의 종교계에 대한 탄압도 중요한 동인으로 작용하였다. 일제가 종교계 탄압을 위해 제정 반포한 1915년의<포교규칙>및<사립학교규칙>으로 순수한 종교활동마저 감시받게 되자 종교인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그 결과 민족문제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게다가 일체의 집회결사가 허용되지 않는 무단통치하에서 활용될 수 있는 조직은 종교단체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자연히 종교단체의 정치사회적 위상과 기대치를 높여주었고 따라서 종교조직을 활용한 독립운동의 가능성과 방법론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단체로 단군태황조를 봉사한다고 표방한 조선국권회복단과 대한광복회는 대종교계열의 결사였고 기독교도가 중심이 되어 조직된 조선국민회나 단천자립단은 기독교계열이다. 그 외 흠치교나 청림교는 민족종교인 동학의 전통을 이은 종교조직을 이용한 비밀결사였다.

 다음으로 이 시기 민족운동의 변화 중 중요한 점은 복벽주의를 극복하고 공화주의가 정립되었다는 것이다. 즉 복벽주의를 표방하고 의병투쟁을 목표로 했던 대한독립의군부나 민단조합 등의 운동이 빛을 보지 못하고 좌절되고 공화주의를 표방하는 조선국민회가 결성되면서 국내민족운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이후 더 이상 복벽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단체의 출현이 없었으며 대한광복회 단계에 이르면 공화정치를 단체의 조직목표로 표방하면서 복벽주의의 완전한 탈피와 공화주의의 정립으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공화주의가 1910년대의 민족운동의 주된 경향으로, 한국민족운동상의 하나의 특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처럼 전국 각지에서 빈번하게 전개되던 비밀결사 및 민족운동단체 활동들을 압살하려 한 일제측의 탄압 또한 끊임없이 가혹해져 갔다. 일제는 보안법위반·방화·살인·상해·절도·강도·사기 및 공갈·횡령·범인은닉·총포 화약류취체령위반 등의 죄목을 적용하면서 탄압을 한층 강화시켰다. 그에 따라 민사·형사소송 예심 및 검사수사사건 등 접수 건수가 증가하여 1910년에 총 59,000여 건 이었던 것이 3·1운동 직전인 1918년에 이르면 100만 건이란 경이적인 수치를 기록하게 되었다. 아울러 경찰에 의해 卽決事件으로 刑을 받은 이가 1911년에 21,000명이더니 1918년에는 무려 94,000명에 달하였다. 또한 검사에 의해 형이 집행된 사람은 1911년 11,000명·1916년 28,000명·1918년에는 35,000명으로 각각 증가했다. 이처럼 재판이나 형벌관련 통계치의 수적인 증가는 일제당국이 독립운동 및 일체의 민족적 행위에 대해 자행한 가혹한 탄압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증거가 되며 한편으로 당시 국내의 항일투쟁활동이 결코 수그러들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특히 조선민족을 공갈·위협해 일체의 비판이나 저항을 단연코 압살하려는 폭압적 수단으로 실시된 태형은 “응징적 효과가 매우 현저한” 까닭에 매년 증가하였다. 이를테면 재판 및 범죄 즉결사건을 포함, 1911년 17,400인의 수형인원이 1916년에는 전 수형인원의 47%인 52,500명으로 刑中의 刑이 되었다. 더구나 1917년에 이르면 62,500명이 되는 등 태형의 남용은 이루 형언키 어려울 지경이었다. 이점은 당시 일제의 식민지였던 대만과 비교해 보면 보다 극명해진다. 1913∼15년의 평균치를 보면 재판사건에서 태형의 비율은 대만 34.4%, 조선 36%, 범죄 즉결사건에서는 그 비율이 24%와 45.3%로 조선이 대만의 2배나 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일제의 가혹한 탄압은 1일 평균 수감인원이 1911년 9,500명에서 1918년 12,200명으로 급증하는 수치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이상과 같은 일제의 폭압적인 법적제재, 극악무도한 헌병경찰의 불법적인 탄압에도 불구하고 1910년대의 민족운동은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으며 1919년 3·1운동에 이르러 각 계열의 방략과 조직체계·활동상의 특성에 따라 일정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다. 천도교인과 기독교인 등의 종교조직은 3·1운동의 전개 확산에 활용되었으며 그 외 의병계와 농민층은 격렬한 시위를 주도하거나 적극적인 투쟁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또한 계몽적인 성향의 국권회복단조차 만세시위를 주도하는 등 3·1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음에서도 그 역할을 찾아볼 수 있다. 이같은 1910년대의 민족운동단체의 활동이 민족내부역량을 성숙시켜 나갔음으로 인해 3·1운동 이후 국내에서 임시정부 후원을 위한 연락망 구축이나 군자금 수집활동이 신속하고 광범위하게 수행될 수 있었다.

<姜英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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