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2. 해외민족운동
  • 1) 만주
  • (1) 북간도지역의 민족운동

가. 한민교육회·간민교육회-사우계

 북간도지역은 19세기 후반 이래 함경도 농민들이 대거 이주해와 이미 상당한 규모의 한인사회가 형성되어 있었다. 1910년 일제의 강압적인 국망 이후 이 곳으로 대거 망명해온 민족운동가들은 학교와 교회를 설립하고, 신문과 잡지를 발간함으로써 근대적인 민족교육을 통하여 유력한 독립운동근거지로의 변화를 도모하였다.

 북간도지역에서의 최초의 민족운동조직은 1909년 9월의<間島協約>체결 직후에 이루어졌다.<간도협약>의 체결로 일본은 오랫동안 한·청간에 분쟁이 되어온 간도영유권을 청국에 넘겨주는 대신에(1조), 龍井村·局子街·頭道溝·百草溝 4개 지역의 거주와 무역을 위한 개방, 吉會敷設權(吉林線을 會寧까지 연장한 철도, 6조) 등 이권과 한인들의 재판에 대한 법정입회권을 받아냈다.<간도협약>은 한인들의 지위에 관한 중요한 조항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간도지역에서의 거주권(3조)·토지가옥소유권(5조)의 권리를 받아내는 대신, 재판·납세의무 등 청국의 행정처분을 받도록 되었다. 이처럼 일제는 간도지역의 한인은 ‘한국臣民’으로서 외국인에게 금지되어 있는 諸권리들을 인정받도록 하였다고 평가했으나, 한인들이 청국에 귀화하지 않은 한 통감부 임시파출소(1907년 8월)를 뒤이은 일본영사관 및 분소의 설치를 통하여 한인에 대한 직접통제권을 주장할 수 있는 법률적 근거를 마련하였던 것이다.297) 金正柱,≪朝鮮統治史料≫1(東京:韓國史料硏究所, 1970), 248∼254쪽.

 민족운동가들은<간도협약>의 이러한 독소적 조항에 반발하였다. 瑞甸書塾과 明東書塾의 중심인물이었던 기독교신자 朴茂林(朴楨瑞)이<간도협약> 체결 직후 당시 延吉知府 陶彬의 통역관이었던 李同春의 협력으로 청국관청의 승인을 얻어 韓民自治會를 조직한 것이다.298)<局子街墾民敎育會ニ關スル件(1911. 2. 13)>(≪日本外務省文書≫, MT.11259), 163∼164쪽. 이 한민자치회는 연길현 국자가에 사무소를 두었는데, 그 “內密과 體制가 完備하야 我民의 歸依할만한 단체”였다.299) 尹政熙,<間島開拓史>(≪한국학연구≫3집-별집,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1991년 3월), 22쪽.

 그러나 한민자치회는 일본의 항의를 받은 청국의 명령으로 해산되고 말았다. 청국 역시 간도지역에서 한인들의 독자적인 세력이 지나치게 강화되는 것을 우려하여 주동자인 李鳳雨·尹海 등의 찬동을 받아 1910년 3월, 한인자제들의 교육을 목적으로 한 韓民敎育會300) 계봉우가 후일 ‘墾北集會의 鼻祖’로 평가했던 墾民敎育會는 엄격히 말하면, 이 韓民敎育會를 지칭하는 것이다(四方子,<北墾島 그 過去와 現在>(≪獨立新聞≫, 1920년 1월 1일).를 조직케 하였다. 한민교육회는 북간도 한인동포의 자치권 확보를 추구했던 한민자치회 관계자들과 일본의 외교적 압력을 무시할 수 없었던 청국 당국자간의 타협적 산물로서, 그 이면에는 일본세력의 확대저지라고 하는 공통적인 목표가 깔려 있었다. 그리하여 당시 일제관헌은 한민교육회를 한민자치회의 ‘化身’으로 파악했던 것이다.301)<局子街墾民敎育會ニ關スル件(1911.2.13)>(≪日本外務省文書≫, MT.11259), 163∼164쪽.

 한민교육회는 한인들로부터 기금을 모집하고 延吉縣의 20개 구역마다 보통소학교의 설치를 추진하였다. 또한 한민교육회는 중국의 지방당국자들과의 협력관계를 강화하기 위하여, 1910년 6월 자체내에 硏究會를 조직하였다. 연구회는 청국이 ‘조선인에 대한 시정상의 기관’으로 간주하였으며, 청국 지방관에게 한인통치에 관한 각종의 조사보고와 통치에 관한 의견 등을 건의케 하였다. 아울러 교육회는 한인들 가운데 청국의 ‘腹心의 인물’들을 양성하기 위한 기관으로 교육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민교육회 회장과 부회장에는 이동춘과 윤해가 각각 선출되었고, 연구회 회장으로는 이봉우가 선출되었다. 교육회는 각지에 교육회원을 파견하여 학교 설립과 자금모집에 전력을 기울였다. 1910년 9월, ‘한일합병’ 직후 한민교육회는 조직명칭을 서둘러 墾民敎育會로 바꾸었다. 이러한 명칭변경은 ‘韓’을 ‘墾’으로 바꾼 데 불과하지만, ‘한일합병’ 이후 일본이 ‘대한제국의 신민’은 곧바로 ‘일본의 신민’이 되었다는 주장을 반박하기 위한 정치적인 고려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간민교육회는 한인들에게 중국국적 취득을 적극 권장하는 정책을 취했다. 청국의 지지를 배경으로 합법적이고 공개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기 위함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연구회는 ‘한일합병’ 직후인 9월 이후에는 도빈 지부의 지시에 따라 위원을 각지에 파견하여, 항일유세를 하게 하는 한편, ‘薙髮易服, 辨髮淸裝’을 권유하였다.302)<延吉敎育會及硏究ノ行動ニ關スル情報(1910. 10. 31)>(≪日本外務省文書≫, MT. 11259), 56∼59쪽. 또한 연길현 局子街의 교육회내에 模範學堂을 설립하여 초등학교 과정과 교원양성과정을 설치했다. 모범학당은 한인자제들을 청국식으로 교육하는 관립학교로서, 북간도 한인학교의 모델 역할을 했다.

 간민교육회에는 1909년 말 이후 1910년에 걸쳐 망명한 반일적인 진보적 인물들, 특히 일제관헌에 의하여 ‘排日黨의 소굴’로 지목되고 있던 서북학회 회원들이 대거 회원으로 참여함으로써 점차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리하여 간민교육회는 1911년 2월경에는 북간도 전지역에 걸쳐 200여 명에 달하는 회원을 확보하기에 이르렀다.303)<局子街墾民敎育會ニ關スル件(1911. 2. 13)>(≪日本外務省文書≫, MT.11259), 160∼162쪽.
<局子街墾民敎育會員ノ學校設立ニ關スル件(1911. 5. 2)>(MT.11259), 221쪽.

 당시 간민교육회의 중심인물은 회장 이동춘을 비롯하여 부회장 윤해·朴贊翊 등은 이동휘와 가까운 인물들이었다. 최근에 1911년 초 이동휘의 북간도 방문을 전후하여, 이동휘가 기독교전도와 교육활동을 위하여 불러들인 이동휘의 ‘교육생’ 30여 명이 교육회 회원으로서 맹활약하였다.304) 국사편찬위원회,≪韓國獨立運動史≫2(1983), 544∼545쪽. 회원은 기독교인들이 중심이었지만, 박찬익·백순·현천묵과 같은 대종교도들도 참여하였다. 특히 회장인 이동춘은 20년전에 국내로부터 북간도에 이주해 온 재산가이자 애국지사로서 한인간에 명망이 높았다. 그는 청국당국의 한인관련 고문 겸 통역으로서, 국자가의 모범학당에서 중국어를 가르치는 등 청국 지방관들과 한인들간의 교섭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간민교육회는<간도협약>과 ‘한일합병’ 이후 한인들을 ‘일본의 신민’이라고 강변하며 관할권을 확보하려는 일본에 맞서 반일적 애국지사들이 청국의 보호하에서 교육을 표방하고 북간도 한인사회를 결집하기 위한 조직이었다. 청국 연길지부와 간민교육회간에 합의·제정된 것으로 보이는 간민교육회의<普通條約>과<秘密條約>에 따르면, 간민교육회는 비록 청국의 지방관에 부속하고 활동상황을 보고하도록 되어 있으나, 간부들은 청국의 지방관과 같은 예우를 받게 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교육회는 한인자제들에 대한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한인소유의 교육기관(학당·사숙)들에 대한 관할권을 확보하는 등 자치적 성격까지 구비하게 되었다. 이러한 바탕에서 간민교육회는 창립 이후 중국 지방당국의 ‘원만한 찬동’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1910년 9월 10일에는 “墾北移民의 최유력자로 결성된 72형제파에서 회관을 사서 기부”하는 등 동포들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았다. 그리하여 간민교육회는 간도각지에 학교를 설립하고 교사를 파견함으로써 반일계몽운동을 추진할 인재양성에 주력하며, 후일의 북간도 민족운동의 기초를 쌓았던 것이다.305) 四方子,<北墾島 그 過去와 現在>(≪獨立新聞≫, 1920년 1월 1일). 간민교육회는 매월≪月報≫를 발행하여 북간도는 물론, 노령 연해주와 미주지역 등 다른 지역의 한인들에게도 배포하였다.

 간민교육회 회원들은 근대적인 교육과 기독교를 전파하고, 청국의 의복과 머리모양을 한 때문에, ‘維新派’·‘신학패’ 또는 ‘新輩’로 불렸다. 또한 반대파들은 이들을 냉소적인 의미가 담긴 ‘薙髮패’라 부르기도 했다.

 간민교육회의 활동이 북간도 한인들에게 전적으로 환영받았던 것은 아니다. 이들 교육회 회원들이 근대적 교육에 적대적인 농민들의 반발로 농촌으로부터 축출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심지어는 보수적인 한인들이 교육권유차 방문한 교육회 회원들을 구타하거나 잡아서 용정에 있는 일본영사관에 넘겨주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던 것이다.

 간민교육회에 대한 강력한 저항은 전통적인 유학자들로부터 왔다. 이들은 1908년 여름 함경북도 경성에서 항일의병투쟁을 이끈 바 있는 金貞奎·池章會·車鎬均 등이었다. 노령 연해주의 ‘한일합병’ 반대투쟁의 지도자인 柳麟錫·李南基와 가까운 인물들로, 이들은 1908년 말에서 1909년 중반에 이르는 시기에 북간도지역으로 망명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간민교육회와 이를 후원하는 청국 지방당국의 정책에 강력히 반발하였다. 이들은 간민교육회의 서구적이며 기독교적인 근대교육과 중국 입적 장려 및 ‘치발역복 변발청장 정책’에 반대하였다. 특히 청국당국이 간민교육회에 전통적 교육을 행하고 있는 자신들의 私塾을 폐지할 권한을 부여한 데 대하여 큰 위기감을 갖고 있었다. 鄭安立·김정규·차호균·지장회 등 24명의 유학자들은 私塾改良會를 발기하였다. 이들은 발기문에서 사숙을 개량함으로써 ‘신학패’들의 탄압을 피하며 유학경전 강독에 의한 유학교육을 견지할 것을 선언하였다. 1912년 9월에 개최된 창립총회에서 이들 유학자들은 사숙개량회는 근대적 교육을 반대하고 전통적인 사숙을 옹호하는 데 그 목적이 있으며, ‘신학패’들로부터 북간도지역의 교육 주도권을 빼앗기 위한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을 선언하였다.306) Byung Yool Ban(반병률),<Korean Nationalist Activities in the Russian Far East and North Chientao, 1905∼1921>(Ph. D. Dissertation, University of Hawaii, 1996), pp. 159∼160.

 그러나 이 사숙개량회의 창립총회는 중국당국의 사전허가를 얻지 못하였다. 더구나 간민교육회는 창립총회 의장이었던 南哲朋 등 그 지도자들이 친일조직인 일진회 회원이라는 사실을 비판하였고, 중국 지방당국 역시 이들 배후에 일본당국이 있다는 의구심에서 그 해산을 명령하기에 이르렀다. 중국지방당국의 공인획득에 실패한 사숙개량회 주도자들은<呂氏鄕約>에 기초한 유학이념의 옹호라는 목표를 가진 비밀조직 士友契를 조직하였다. 사우계는 비밀리에 회원을 확충한 결과 1913년 가을에는 100여 명의 회원을 확보하였다.307) Byung Yool Ban, ibid., pp. 160∼161.

 간민교육회에 대한 보다 체계적이고 강력한 파괴공작은 일제당국에 의하여 진행되었다. 조선총독부와 간도 일본총영사관은 일진회 회원인 이희덕·최남기 등에 대한 재정적 지원과 지도를 통하여 朝鮮人會를 조직하였다. 조선인회는 한인들을 중국당국의 보호로부터 떼어내어 “조선인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고, 궁핍한 인민들을 구제한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조선인은 또한 간민교육회가 북간도의 한인사회에 분쟁을 야기하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일본당국 역시 조선인소학교·서당·노인회·불당·일진회의 종교인 侍天敎에 자금을 지원함으로써 조선인들의 친일화를 도모하였다.308) Byung Yool Ban, ibid., pp. 161∼162.

 현재 간민교육회가 언제 어떻게 해산되었는가는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간민교육회가 내부적으로 지방파쟁을 겪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당국의 외교적 압력을 받은 중국당국의 명령으로 해산된 것만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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