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2. 해외민족운동
  • 1) 만주
  • (3) 북만 밀산부지역

(3) 북만 밀산부지역

 민족운동가들간에 또 하나의 유력한 독립운동근거지 건설의 후보지로 선정된 곳이 중국과 러시아의 접경지역인 密山府의 蜂密山지역이었다. 우선 헤이그밀사였던 李相卨은 1909년 李承熙와 협의하여 밀산부 봉밀산현에 12팍지(1팍지는 32 日耕)의 토지를 구입하고 농민들을 이주시켜 한인촌락 韓興洞을 건설하였고 한민학교를 세웠다.351) 尹炳奭,≪李相卨傳≫증보판(一潮閣, 1998), 119쪽. 이상설은 당초 국민회 원동전권위원으로 파견되어왔기 때문에 그의 이러한 활동은 국민회의 봉밀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시작되었지만, 이후 이승희 그리고 블라디보스톡의 자산가 金學萬과 함께, 별도로 기지개척사업을 추진해나간 것이다. 국민회의 봉밀산 기지개척 사업은 鄭在寬·金成武 등이 북미 국민회가 원동에 파견한 간부들에 의하여 추진되었다. 특히 김성무는 독립운동근거지 건설을 후원하기 위해 설립한 泰東實業株式會社(1910년 3월 조직)의 자금모집에 힘입어, 1910년 봄 봉밀산현에 들어와 30팍지의 토지를 구입하여 만주·노령의 한인농민들을 이주시켜 개간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352) 李明花,<1910년대 재러한인사회와 대한인국민회의 민족운동>(≪한국독립운동사연구≫11,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7), 82∼83쪽.

 후일 봉밀산지역에는 홍범도가 독립군들을 이끌고 들어왔다. 홍범도는 ‘우리동무회’라는 청년단체를 조직하고 야학과 체력단련 등을 통해 후일을 도모했다. 홍범도는 한흥동 한민학교의 교장, 교감으로 활약했으며, 이승희와 이상설의 후원으로 봉밀산에 설립된 밀산무관학교의 교관으로도 활약했다.353) 한국독립유공자협회 엮음, 앞의 책, 230·373∼380쪽.

<潘炳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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