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2. 해외민족운동
  • 2) 러시아
  • (2) 러시아혁명 이후의 독립운동

가. 2월혁명과 고려족중앙총회

 러시아 2월혁명 이후의 노령 한인사회를 결집하려는 시도는 원호인 즉 入籍 한인들의 주도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1917년 6월 4일, 니꼴리스크(소왕령)에서 이르쿠츠크 以東의 각지 대표 96명이 참가한 가운데 全露韓族代表者會가 개최되었다.393) 金正柱,≪朝鮮統治史料≫10, 45쪽.

 대회는 S.L(사회혁명당) 계열의 원호인 지식인들이 주도하였다. 대회는 러시아 임시정부 지지를 결정하고, 임시정부에 축전을 보내는 한편, 임시정부의 정책인 ‘승전할 때까지 전쟁지속’을 지지하였다. 대회는 ①입적한인은 헌법제정의회에 대표를 파견할 것, ②입적한인에 의한 한족대표회의 조직, ③농업용 토지문제 해결 요구, ④교회로부터의 학교 독립, ⑤정기간행물 출판(니코리스크:≪靑邱新報≫, 블라디보스톡:≪韓人新報≫) 등을 결의하였다. 이처럼 대회는 러시아내에서의 원호인들만의 자치와 권리신장에 비중을 두었던 만큼, 여호인들의 ‘한족대표회’ 참여가 배제되었고, 항일적인 주장이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394) 金正柱,≪朝鮮統治史料≫10, 45∼46쪽.

 이러한 대회의 성격은 어느 대표가 이동휘를 비롯한 한인 정치망명자들의 석방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였으나 의제에 포함되지 않고 폐기된 사실에서도 명백하게 드러났다. 결국 대회에서는 다수파인 원호인 70여 명과 소수파인 여호인 30여 명의 대표들간에 합동이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대회의 취지였던 ‘한인의 일대단체’의 조직에 실패하고, 원호인만으로 高麗族中央總會를 조직하는 데에 머물렀다.395)<백원보가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1917년 7월 23일)>(≪도산 안창호자료집≫1), 221쪽. 이처럼 대회의 주도인물들은 항일운동의 과제보다는 한인사회의 민족적 권리의 신장이라는 과제를 우선시하였다.396) 劉孝鐘,<極東ロシアおける十月革命と朝鮮人社會>(≪ロシア硏究≫45, 1987), 24쪽.

 여하튼 러시아 2월혁명 이후 한인사회를 주도하고 있던 원호인들의 민족자치우선의 입장은 중앙의 케렌스키정권이 붕괴된 10월혁명까지도 지속되었다. 고려족중앙총회는 10월혁명 후인 1917년 11월 25∼27일에 실시된 헌법제정의회 의원선거에서 반볼쉐비키적인 시베리아독립정부 지지입장을 채택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1918년 1월 11일 개최된 고려족중앙총회는 시베리아독립정부에 고려족대표로 烟秋南都所 사장이자 우수리스크 지방의원인 최재형 등 2명을 파견하기로 결의하였던 것이다.397)≪新韓民報≫, 1918년 2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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