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2. 해외민족운동
  • 3) 중국 관내지역
  • (1) 한인의 이주와 한인사회의 형성

가. 독립운동의 환경과 상해

 1910년대는 일본의 세력이 극동지역 전역으로 팽창하던 시기였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일본은 시베리아로부터 長江에 이르는 지역을 세력권으로 확장하였는데, 이를 견제할 세력이 없었다. 유럽국가들은 전쟁의 수렁에 빠져 극동지역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었고, 러시아나 볼세비키정권도 여력이 없었다. 윌슨정부가 일본의 산동반도 점령을 반대하였으나, 당시 미국정부는 국제연맹의 설립에 급급하였기 때문에, 일본의 팽창주의를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1910년대 국제정세는 한국독립운동에 불리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415) 이정식,<1910년대의 국제정세>(≪한민족독립운동사≫3, 국사편찬위원회, 1988).

 中國 關內地域은 河北省 山海關 서쪽, 四川省 康定 동쪽, 甘肅省 嘉峪關 동쪽지역을 가리킨다. 관내지역이라는 말에는 漢族의 활동강역 및 中華文化의 범주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지역적으로는 대체로 長城을 경계로 하며, 몽고·만주·월남 등 주변민족의 문화와 한족의 그것을 구분짓는 의미를 함축하였다. 일제하 해외독립운동의 무대로서 관내지역은 대체로 동북군벌 및 괴뢰 만주국의 영역인 중국 동북지방(흔히 ‘滿洲’로 지칭)과 구분되는 중국 국민당정부와 중국 공산당정권의 관할구역을 가리킨다. 특히 上海·南京·北京·天津·武漢·重慶·廣州·延安 등이 한인독립운동의 주요거점이었다. 1910년대의 경우, 상해가 여타 지역에 비해 활발한 곳이었다.

 상해가 반일독립운동의 주요 무대가 된 배경으로는, 첫째 국내와 가깝고 미국이나 유럽으로의 교통요충지라는 점, 둘째 국제열강을 비롯한 각국의 외교기관이 주재하고 있어, 외교활동을 통한 효율성이 기대되었던 점, 셋째 租界로 대변되듯이, 제국주의국가 간의 힘의 균형상태가 유지되어, 활동공간의 확충이 가능하였던 점, 넷째 중국·월남·인도·필리핀·태국·인도네시아 등 동아시아 민족해방운동세력과의 국제연대 형성의 가능성이 기대되었던 점 등이 꼽힌다.

 이와 함께 辛亥革命도 한인의 중국행에 영향을 미쳤다. 한인독립운동가들 중에는 중국혁명의 성공 소식에 고무되어 망명을 결심한 경우가 많았다. 呂運亨은 “황흥과 孫文의 사진이 서울 중국인 상루에 걸리고, 혁명의 새로운 음파가 유지청년의 귀를 난타하는” 정황에서 중국행을 결정하였다. 金奎植도 압록강을 건널 때 “신해혁명의 주도자인 손문을 만나서 일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하였다. 조국을 잃은 한인 청년들은 신해혁명의 소식에서 희망과 기대를 발견하였다. 손문은 한인 청년의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416) 이만규,≪여운형선생투쟁사≫(민주문화사, 1947), 19쪽.
이정식,≪김규식의 생애≫(신구문화사, 1974), 41쪽.
이러한 사실과 관련하여, 민두기는 “중국의 공화혁명은 우리의 독립운동에 ‘가능성의 신앙’이라는 영혼을 불어넣어 주었다”고 평가하였다(민두기,≪신해혁명사≫, 민음사, 1994, 19쪽).

 상해는 1842년<남경조약>으로 개항하였다. 영국조계(현재의 延安中路 북쪽, 北京東路 남쪽, 1845년)·미국조계(현재의 蘇州河 북쪽 虹口일대, 1848년)·프랑스조계(현재의 延安中路 남쪽, 西藏南路 동쪽, 1849년)가 설정되었고, 1863년 영·미조계는 公共租界로 합쳐졌다. 이로써 상해는 크게 공공조계(현재의 魯迅公園 일대, 閘北鐵道 남쪽, 蘇州河 북쪽, 靜安寺 서쪽, 中山公園 동쪽지역)·프랑스조계(현재의 徐家匯路 동·북쪽, 肇嘉浜路 북쪽, 延安西路 남쪽, 開沙恩橋 서쪽지역) 그리고 上海縣城(현재의 上海市 南市區)으로 구분되었다. 조계는 1942년에 이르러 폐지되었다.

 1910년대 중반 상해에 발을 디뎠던 李光洙는 “프랑스조계는 영미조계와 길 하나를 사이함에 불과하건만, 조용하고 쓸쓸하기가 딴 세계라. 그 본국의 소쇠하는 표상인가 하여 슬그머니 설움이 나더이다. 그러나 도로의 정결함, 長林과 가옥의 潚酒함은 경쾌하고 詩趣있는 라틴식을 발휘하였더이다”417) 이광수,<상해인상기>(≪이광수전집≫18, 삼중당, 1963), 203쪽.라고 소회를 적었다.

 많은 한인은 프랑스조계와 공공조계에 둥지를 틀었고, 일부는 상해현에도 살았다. 1910년 이전 한인의 거주지역 선택에 있어서는 정치적 판단이 크게 고려되지 않았으나, 1910년 이후에는 일본세력이 개입할 수 없고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였던 프랑스조계가 한인의 주된 거주지로 부상하였다. 그런데 프랑스조계가 1910∼1920년대 한인독립운동의 본거지 역할을 한 배경으로는 다음의 사실을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영·미와 프랑스간의 전통적인 경쟁·견제관계를 지적할 수 있는데, 이는 대일본 이해관계와 맞물려 한층 심화되었다. 1900년경 이래 영·미는 러시아의 만주독점과 남하정책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의 한반도 점령을 묵인한 반면에, 프랑스는 영·미에 대항하는 정책의 기조 위에서 일본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만은 아니었다. 이러한 구도는 자국이익이라는 기준에 의해 가변적인 것이었으나, 한인정책의 한 배경으로 작용한 것은 틀림이 없다. 지엽적인 예이지만, 프랑스는 도쿄에 체제 중인 베트남왕국 망명세력을 매개로 일본과 신경전을 벌였다. 전 베트남왕국의 왕자 콘테(Conte)는 동경에서 반프랑스 독립운동을 벌였는데, 이는 양국 정부의 외교 현안이 되었다.

 이러한 국제관계는 프랑스조계 당국의 한인정책에도 투영되었다. 프랑스조계 당국은 한인독립운동에 대해 방관적 또는 지원 입장을 취하였으며, 한인을 대일본 정보수집 및 외교활동에 투입하였다. 이는 이 지역 한인세력에게 유리한 환경조건이 되었다. 1910년대 한인독립운동이 이곳을 주무대로 전개되었고,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이곳에서 수립되어 1932년 윤봉길의거를 계기로 상해를 탈출할 때까지, 프랑스조계가 한인독립운동의 주요 근거지였던 사실에는 이같은 국제관계가 밑그림으로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조계 당국의 입장도 상해근대사의 진전에 수반하여 변화해 갔다. 즉 상해는 중국 공산주의운동의 발원지였으며, 1920년대 중반 이래 반제국주의 민족운동의 주무대가 되었다. 이러한 정치환경하에서, 프랑스조계 당국의 한인민족운동세력에 대한 입장도 변화하기 시작하였는데, 1920년대 중반 이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침체상황은 이러한 상해의 정세변화 및 프랑스조계 당국의 태도 변화와도 관련이 있었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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