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2. 해외민족운동
  • 3) 중국 관내지역
  • (2) 중국혁명세력과의 연대 구축

(2) 중국혁명세력과의 연대 구축

 “중국혁명이 나의 피를 끓인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손문·황흥·송교인이란 이름은 마치 일가나 친구의 이름과 같이 익숙하였고, 신문에 오르는 그네들의 사진조차 어려서부터 낯익은 얼굴을 보는 듯 하였다”424) 이광수,<나의 고백>(≪이광수전집≫13), 226쪽.는 이광수의 고백은 1910년대 초반 한인들의 중국관을 보여준다.

 신해혁명에 고무되어 망명해 온 한인들은 한국의 독립이나 혁명을 위한 중국혁명세력과의 연대형성을 희망하였다. 한인들은 중국혁명에의 참여를 통한 한·중연대 구축방안을 중시하였다. 신규식과 조성환은 “목숨이라도 중국혁명에 바쳐 지지의사를 표하고자” 하였다. 남경의 한인유학생 6명은 1911년 말 學生軍에 들어가 북벌에 참여하였으며, 다시 陸軍學堂에 들어가 각종 군사기술을 습득하였다. 또 신규식의 조카 申衡浩는 상해 도착 직후 중국혁명을 지원하기 위하여 中華學生軍團에 자원 입단하였다. 이외에도 혁명군의 군비확충을 목표로 한 기부금 모금 및 의료구호 활동 등에 동참하는 등의 방법으로 중국혁명세력에 대한 지지와 성원을 표시하였다.

 하지만 전체 한국인의 명의로 중국혁명에 대한 지지를 표명할 수 있는 단체의 부재 상황은 한인들로 하여금 안타까움에 젖게 만들었다. 한인들은 자신들의 의지를 대변하고 활동의 중심이 될 수 있는 단체 조직의 필요성을 느꼈다. 이같은 상황에서 “중국내 각 지방에 한인단체를 만들고, 또 각 지방에 와 있는 한인동지들과 급히 연락하여 서로 보호하고 돕자”는 중국혁명세력측의 제안은 한인연락기관 건립의 형태로 진전되었으며, 동제사와 신아동제사의 결성은 이러한 한·중연대 선상에서 파악된다.425) 배경한,<상해·남경지역의 초기(1911∼1913) 한인망명자들과 신해혁명:武昌起義·討袁運動에의 참여와 孫文·혁명당인들과의 교류를 중심으로>(≪동양사학연구≫67, 1999)는 한인의 신해혁명 지지활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성과이다.

 한인들은 중국혁명 성공의 날이 곧 한국의 독립·해방의 때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인식에서 중국혁명세력과의 연대는 한국해방을 위한 첫걸음이 되는 것이었다. 신규식 등은≪民權報≫·≪民立報≫등의 언론기관과 南社·寰球中國學生會 등의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들 단체는 中國同盟會의 주요 지지기반으로서,≪민립보≫는 멕시코·필리핀·인도·터키 등의 민족주의운동 소식을 크게 보도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혁명의식을 진작시켰다.≪민권보≫는 특히 反袁世凱운동의 중심역할을 수행하였다. 남사는 동맹회 회원들에 의해 운영되던 진보적 혁명문학단체를 표방하며, 상해지역 언론기관의 혁명적 논조를 주도하였다. 환구중국학생회는 중국인 유학생의 출입국 사무보조와 취업알선 기관을 표방하며 1905년에 설립되었다. 주요 활동인물인 朱少屛은 신규식과 밀접한 사이였으며,426) 신규식의 활동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이 참고된다.
신승하,<예관 신규식과 중국혁명당인과의 관계>(≪김준엽교수화갑기념 중국학논총≫, 1983).
강영심,<신규식의 생애와 독립운동>(≪한국독립운동사연구≫1, 1987).
특히 신규식의 한·중연대 일화 등은<申圭植先生傳記>·<申公逸話二三事>(김준엽 편, 앞의 책)에 소개되어 있다.
신규식의 주도하에 성사된 박달학원의 설립에는 환구중국학생회의 취지와 역할이 참조되었을 개연성이 높다.

 1918년 2월 당시 중화민국 내무차관인 尹志伊과 신규식의 왕래편지 중의 “국제간에는 서로 최선을 다하여 도우는 것이 도리인줄 압니다. 부탁하신 여러 가지 일은 이미 손문선생과 당계요선생 등 여러분들에게 전달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간절하지만, 힘이 부족하니 기회를 기다려서 추진하도록 하여야 되겠습니다. 震懍基本一層(암호로 쓴 용어로, 무기를 지칭하는 것 같음;역자 최종건)도 이미 상의를 하였습니다. 기다려서 숫자가 확보되는 대로 다시 말씀 올리겠습니다”라는 내용은 신규식과 중국혁명세력 간의 연대내용과 수준을 짐작케 한다.427) 최종건 편,≪대한민국임시정부문서집람≫(지인사, 1976), 56쪽.

 1910년대 한·중 연대활동의 중심인물은 신규식이었다. 신규식이 상해에서 처음 만난 인물은 徐天復이었다. 그는≪민립보≫사원으로 재직하며,≪民呼日報≫·≪民吁日報≫등을 통해 반일 혁명운동의 중심부에서 활동하는 인물이었다. 신규식은 그를 통해 陳其美·宋敎仁·黃興·戴季陶 등 중국혁명의 주요인물과 교유하였으며, 중국혁명세력의 연락기관인 민립보사·민권보사·남사 사옥·환구중국학생회관 등은 한·중 혁명세력의 연대기구 역할도 겸하였다.428) 단편적인 사실이지만, 정원택은 1913년 초 상해에 도착하여 民權報社를 통해 신규식과 접촉하였는데, 민권보사의 핵심인물은 戴季陶였다. 이해 가을 환구중국학생회관에는 한인유학생을 위한 영어강습소가 설치되었고, 신규식과 申采浩도 이곳에 머문 것으로 파악된다. 또 1919년 봄 정원택은 환구중국학생회관측에 신규식과의 연락을 의뢰하였다(鄭元澤,<志山外遊日志>,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독립운동사자료집≫8, 1974, 364·374·438쪽). 또 1916년 중반 일제 정보자료는 “신규식·조성환·민충식 등에게 오는 서신·전신 등 미국에서 오는 것은 환구중국학생회를 통해 전달”된다고 파악하였다(≪독립운동사자료집≫9, 25쪽). 또 대계도가 이끌던 自由黨의 남경당사에도 한인유학생을 위한 중국어 강습반이 개설되었다(정원택,<지산외유일지>, 366쪽).

 “예관의 집에는 매일 한어반과 영어반도 열렸다. 김규식이 영어를 가르쳤다. 그들은 여기서 한어나 영어를 배워 가지고 중국 대학이나 서양에 유학을 가려는 사람이었다”, “예관집 2층방 한쪽 벽에는 태극기가 교차되어 있었다. … 애국가를 부르고 여자들의 독창도 있고 나서, 연회도 있었다. 모두 예관이 차린 것이었다”, “1913년 경 예관댁은 상해 뿐만 아니라, 강남일대 조선인 망명객의 본거였다.”429)≪이광수전집≫13, 211·212·329쪽. 이 시기 상해에 머물렀던 洪命熹에 의하면, 신규식이 의식조차 해결하기 어려운 처지의 신채호를 블라디보스톡에서 상해로 데려왔으며, “이때 예관이 상해 조선인 중의 주인격이었습니다”라고 회상하였다(홍명희,<상해시대의 단재>,≪단재신채호전집≫하, 1982, 474쪽).

 신규식은 1912년 4월 중순 상해에서 손문을 면담하였다. 그는 손문의 친절한 태도를 ‘동포에 대한 박애’로 받아들였다. 신규식은 손문이나 중국을 같은 동포로 인식하기까지 하였다.430) 배경한, 앞의 글, 53쪽. 이는 국권피탈 직후 한인의 중국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을 대변하는 것으로 이해하여도 별무리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관념은 일제하 한·중간의 국제연대를 지탱해준 동맥과도 같은 것이었지만, 때로는 중화관념과 뒤엉켜 한인독립운동을 제약하는 장애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신규식은 한·중 간의 국제연대를 통한 독립운동의 기반 조성이 선결과제이며, 이러한 유대의 토대 위에서 한인독립운동의 독자적인 행보도 가능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의 구상은 한인청년의 중국교육기관 유학 주선으로 구체화되었다. “선생은 4명의 한국청년을 선발하여 운남강무당에 보냈으며, … 청년들과의 작별에 앞서, … 그대들은 모름지기 나라잃은 겨레를 위하여 힘껏 싸워야 할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대들 일개인의 광영은 즉 이천만 겨레의 광영인 것이다”고 당부하였다. 이범석·김종진·김홍일 등의 중국 군벌정권 군사학교 유학이나, 조동호·신성모·민필호·정환범 등의 각급 고등교육기관 진학은 그의 소개와 알선에 의해 성사되었다.431) 이에 대해서는 김준엽 편, 앞의 책, 72·291·292쪽.

 1910년대 중국혁명세력과 한인독립운동세력의 국제연대를 상징하는 단체로는 신아동제사가 대표적이다. 주요 인물은 신규식과 陳其美였다. 진기미의 조카로서, 중국 국민당 조직부장 등으로 활동하는 등, 국민당정부의 유력인물이었던 陳果夫의 “숙부는 조선인 某某 등과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이름하여 新亞同濟社였다. 오로지 조선독립을 위함이었다. 숙부는 이 결사의 감독이 되었고, 물질상·정신상 원조를 제공하였다. 이 일은 극히 비밀리에 진행되었고, 나도 단지 숙부가 말한 것을 들었을 뿐으로, 그 명칭도 알지 못하였다. 15년(1926년)에 이르러 비로소 조선친구들에게 탐문하여 알았다432) 陳孝儀 主編,≪陳英士先生紀念集≫(臺北, 1977), 128∼129쪽.
莫永明·范然,≪陳英士紀年≫(南京大學出版社, 1991), 202쪽 재인용.
”는 회상은 신아동제사가 진기미 등 중국혁명의 중심인물과 신규식을 비롯한 한인망명가들의 국제연대기구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신아동제사는 중국혁명동맹회의 세력이 강성하였던 1912년 말에서 이듬해 초 사이에 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송교인·胡漢民·대계도·廖仲凱·진과부·吳鐵城·黃覺·黃介民 등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진다.433) 민필호,<申圭植先生傳記>(김준엽 편, 앞의 책), 302쪽. 신규식과 중국혁명세력을 매개로 형성된 1910년대 한·중간의 연대는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호법정부, 나아가 한인독립운동세력과 국민당정부 간 국제연대의 초석이 되었다.

 이외에 조소앙 등은 1916년 인도·중국·대만·필리핀·월남·파키스탄 민족운동세력과의 반제연대 형성에 적극적이었다.434) 삼균학회 편,≪소앙선생문집≫하(횃불사, 1979), 489쪽. 이처럼 1910년대 중국 관내지역 독립운동의 주안점은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피압박민족운동세력과의 국제적 연대 구축에 있었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 및 중국국민혁명 등을 통한 국제적 환경에 대한 자각과 근대 국제정치사 인식의 결과였으며, 해외독립운동의 기반 설정이라는 측면에서도 기여한 바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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