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2. 해외민족운동
  • 3) 중국 관내지역
  • (3) 한인단체의 활동과 독립운동의 기반조성

가. 동제사의 결성과 조직기반의 마련

 同濟社는 1912년 7월 4일 결성되었다. 신규식과 박은식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신채호·조소앙·문일평·김규식·박찬익·조성환·신건식·민필호·신석우·한진산·정원택·여운형·선우혁·서병호·조동호·홍명희 등이 참여하였다. 총재(박은식)·이사장(신규식)·간사 및 사원으로 편제되었으며, 전성기의 회원이 300여 명을 헤아렸다고 한다. 주도인물의 면모로 미루어 보면, 이들은 시민적 민족주의·대동사상·개량적 사회주의를 추구한 것으로 추정된다. ‘同舟共濟’라는 명칭이 함축하듯이, 표면상으로는 동포들의 호조기관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실제적인 의미에서는 국권회복을 전개했던 독립운동단체였다.435) 이에 대해서는 김희곤,<同濟社와 상해지역 독립운동의 태동>(≪중국관내 한국독립운동단체연구≫, 지식산업사, 1995)이 대표적이다. 동제사는 共濟社·同舟社라는 명칭으로도 나타난다.

 동제사의 활동은 두 단계로 나누어 살펴보는 것이 이해에 보탬을 준다. 1910년대 전반기 상해와 남경의 한인유학생들은 대개 신규식의 주도하에 집단으로 숙식하였다. 당시 정황하에서 한인단체의 활동은 한인유학생을 돌보고 유학을 알선하는 일에 역점을 두었을 것이다. 동제사도 출범 당시에는 이같은 현실상황을 반영한 상호부조의 성격이 강한 조직체였을 것으로 판단된다.436) 배경한, 앞의 글, 61∼63·65쪽에서는 “동제사의 결성 초기 임무와 활동은 신규식·박은식 등의 지도 아래 공동생활을 하던 한인유학생의 조직이었고, 실제로는 유학의 알선이나 편의 제공, 어학공부 등을 목표로 하였으며, 이를 통해 독립운동의 기반을 주선하는 일을 하였다고 생각된다”고 평가하였다. 박달학원의 운영을 통한 한인유학생에 대한 편의 제공 사실 등이 이같은 측면을 뒷받침한다.

 1913년 초에서 이듬해 가을까지 상해에 있었던 鄭元澤의 일기에 근거하면, 동제사는 상해와 남경지역의 한인유학생을 주요 인적기반으로 하였다. 신규식·김규식·홍명희·정인보·문일평 등이 빈번히 왕래하며 양 지역의 유학생을 지도하였다. 또 이들은 동제사 총회 및 창립기념식, 박달학원 개학식, 홍범식·안중근 의사 추도회 등을 개최하였다.437) 정원택,<지산외유일지>(앞의 책), 369∼380쪽. 이를 통해 단원의 조직화가 이루어졌고, 동제사의 성격도 상호부조적 차원을 넘어 점차 반일 민족주의운동단체로서의 성향이 강화되어 갔을 것이다.

 동제사를 ‘혁명당’으로, 사원을 ‘당원’으로 부르기도 하였다는 사실은438)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독립운동사≫4(1972), 112쪽. 당시 중국혁명의 영향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일면 반일독립운동단체로서의 정치적 성격이 강화되어 갔음을 말해준다.

 아울러 중국 각지와 구미·일본에 分社를 두었으며,≪新韓民報≫·≪國民報≫등 미주 한인사회의 신문을 安東縣(지금의 丹東市)을 경유하여 국내로 반입하였다.439) 대한민국국회도서관 편,≪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1976), 3쪽.
경상북도경찰부,≪高等警察要史≫(1934), 85쪽.
이는 동제사가 해외 한인사회의 중간연락기관 뿐만 아니라 반일운동단체로 기능하였음을 시사한다. 동제사의 중간연락기관 설치와 활동을 전하는 기록이 있다. 1917년 미국에서 상해에 온 張建相은 “동제사에서는 조국광복에 전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만주 안동현에 자리잡고 본국으로부터 망명하는 인사들에 대하여, 나는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하였다”440) 장건상 외,≪사실의 전부를 기술한다≫(희망출판사, 1966), 413쪽.고 증언하였다.

 1916년 9월에 작성된 일제자료는 “본국 및 외국 각 요지를 통하여 비밀결사를 만든 바, 일본에도 또한 그 지사가 있으며, 이에 가입하는 자는 모두가 비밀을 맹약하고 각지에 각각 사장 및 간사를 두어 암호를 써서 서로 왕복하고 있으므로, 가장 위험한 분자이다는 등의 정보도 있다”고44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독립운동사자료집≫9, 23쪽. 분석하였다. 이는 1916년 중반 무렵 동제사가 독립운동단체로서의 성격이 강하였음을 의미한다. 정원택의 기록 등으로 미루어 보면, 한인유학생 지원 등 상호부조기구로 출발한 동제사는 제1차 세계대전 발발 등 환경변화에 직면하면서, 독립운동단체로서의 성격이 강화되어 간 것으로 유추된다.

 이와 함께 동제사는 중국혁명세력의 한인독립운동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고, 그들의 지원을 확보하는 한·중연대의 창구로도 활용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442) 신승하, 앞의 글, 618쪽. 그리고 신아동제사는 동제사의 조직을 기반으로 결성된 한·중 양국 혁명운동의 효시적인 호조기관으로 평가된다.443) 김희곤, 앞의 글, 55쪽. 이와 더불어 배경한은 동제사를 1910년대 초반 한인유학생의 공동생활 내지는 편의제공 기구로 전제하고, 신아동제사를 “이러한 한인의 활동을 보장하기 위한 일종의 外衛組織으로서”, “일제하 한·중연대조직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평가하였다(배경한, 앞의 글, 65쪽). 그리고 민필호는 신아동제사를 “중국대륙에서 처음 생긴 韓中親善 기구였다”고 기술하였다(민필호,<대한민국임시정부와 나>, 김준엽 편, 앞의 책, 71쪽). 이외에 1915년에는 신규식·박은식 등을 중심으로 한 大同輔國團이 조직되었는데, 본부는 프랑스조계 明德里에 소재하였다. 이들은 시베리아·간도지역의 한인들과 연락하는 동시에, 韓鎭敎·鮮于赫 등 국내인물들과 연계하여 세력확대에 노력하였다.444) 국회도서관,≪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1976),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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