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Ⅲ. 3·1운동
  • 1. 3·1운동의 배경
  • 1) 제1차 세계대전 전후의 국제정세

1) 제1차 세계대전 전후의 국제정세

 1918년 11월 11일 오전 11시 프랑스 파리의 베르사이유궁에서 독일이 항복문서에 조인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자본주의 후발국이었던 독일은 오스트리아·터어키와 함께 자본주의 선발국가들인 영국·프랑스 등과 해외시장 분할을 놓고 1914년부터 4년간 싸웠던 전쟁이었다.

 이 대전의 영향은 막대했다.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약 2천만 명의 사상자를 내고, 20세기 초 과학과 이성을 기초로 한 “끝없는 진보”라는 인류의 보랏빛 미래를 산산조각내었을 뿐 아니라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이 쇠퇴하고 미국이 새로운 세계질서 주도국으로 등장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다른 한편 이 전쟁은 일본이 자본주의 열강의 대열에 합류하게 만들었으며, 한국독립운동에는 커다란 타격을 입혔다.

 일본은 이 세계전쟁에서 거의 피를 흘리지 않고서 반사이익을 많이 본 국가였다. 대전의 특수 경기 덕택에 1913년 12억 2,400만 엔 적자국이던 것이 1915년 흑자국으로 올라섰으며, 1917년에는 11억 5,000만 엔의 正貨를 보유할 만큼 경제적으로 급성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전 중 중국의 산동반도 남단의 膠州灣의 독일 조차지와 태평양상의 독일령 群島들을 점령하였다.

 대전의 와중이었던 1917년 10월 러시아에서 볼세비키 혁명이 일어났다. 세계혁명을 목표로 하는 볼세비키 정부에 대항하여 이를 와해시키려는 자본주의 열강들의 노력이 또한 일본의 국제적 지위를 강화시켰다. 극동에서 공산주의를 막아낼 임무를 일본에게 부여하였던 것이다. 일본은 1918년 8월 시베리아에 11개 사단을 파견하여 1922년까지 4년간 자바이칼·아무르·연해주를 아우르는 바이칼호 以東지역을 실질적으로 점거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만주·연해주 동포사회를 기반으로 국외독립운동 기지건설과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해 온 우리민족의 독립운동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일제와 타협한 중국·러시아 당국에 의해 이 지역 우리 독립운동이 禁壓 당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될 때까지 이런 정세는 계속되었다. 더구나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은 20만 연해주 동포들에게 조국해방투쟁 이전에 연해주 해방을 위해 파르티잔 투쟁에 나서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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