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Ⅲ. 3·1운동
  • 1. 3·1운동의 배경
  • 2) 해방과 평등의 새로운 사조 등장

2) 해방과 평등의 새로운 사조 등장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 사이 서구 산업사회는 社會進化論이 각종 사회불평등과 인종적 불평등을 합리화하면서 제국주의적 침략과 군국주의적 확장을 뒷받침하였다.580) 전복희,≪사회진화론과 국가사상≫(한울 아카데미, 1996), 185쪽. 이런 사회진화론은 전 세계적인 추세를 이루어 서구 산업국가들에서는 강자의 권리만을 인정하고 약자의 패배를 자연의 법칙으로 설명하는 이데올로기 기능을 하는 반면, 동양의 일본, 한국에서는 그들 국가가 처한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입장과 요구에 따라 매우 독특한 기능을 수행하였다.

 일본에서는 메이지 초기에 문명화의 법칙성과 일본 미래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는 이론으로 환영받았다가 1880년대 들어서면서 근대 자연권 사상과 국민주권론을 부정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하면서 국가 유기체설과 결합하여 봉건절대군주인 천황의 권위와 그 관료지배체제를 강화해 주는 이론으로 기능하게 되고, 이것이 후에 ‘가족국가’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하면서 일본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의 확산을 이론적으로 변호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581) 전복희, 위의 책, 186쪽.

 중국에서는 일본보다 조금 늦게 1880년대 중엽에 수용되었는데, 중국 지식인 가운데 일본에서 망명생활하는 중에 사회진화론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 많았다. 중국의 경우 생존경쟁적 국제사회의 현실 속에서 외부와 경쟁하기 위해 내부적 단합을 최우선시하며, 근대화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이론으로 수용되었다. 중국에서는 일본과 달리 전제군주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국가주권설과 입헌국가 설립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제한적이나마 民權의 확대를 주장하며, 국제정치의 냉혹한 현실에서 국가방위를 위한 국민통합의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하였다.582) 전복희, 위의 책, 187책.

 한국에서의 사회진화론은 동아시아에서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세력확장이 본격화되면서 서구의 부와 물질문명, 강력한 군사력에 강한 충격을 받은 진보적 지식인들이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항하여 국가의 독립과 부국강병을 이룩하기 위한 방편으로 받아들였다. 이를 통해 한말 한국 지식인들은 서구 부강의 원동력과 한국의 낙후 원인을 밝혀 국가의 독립과 근대화를 위한 이론적 수단으로서 사회진화론을 수용하였다. 그러므로 서구에서 사회진화론이 발전해 온 사상사적 배경과 이론적 문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자의적이고 희망적인 이해와 평가에 따라 변형하여 사회진화론을 해석하고 적용하였다. 따라서 한국에서 사회진화론은 강자의 권리를 정당화하는 서구의 이데올로기에서 약자가 강자가 되기 위한 의식적 행동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이론으로 변형되어 실력양성운동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며, 애국계몽운동을 통해 근대적 국가사상과 민권사상을 보급하는 데 기여하였다.583) 전복희, 위의 책, 188∼189쪽.

 한편에서 사회진화론은 일본 제국주의와 그 침략을 정당화하는 기능도 수행했다. 친일파들은 진화론을 빌어서 당시의 국제환경을 황인종과 백인종의 인종싸움 시기로 단정하고, 황인종 사이의 반목은 백인종의 아시아 침략과 그 지배를 초래하게 된다는 명목 아래 반일민족운동에 대한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거나 희석시키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나아가 친일적 인사들은 일본을 맹주로 하는 황인종의 단결을 주장하고, 독립보다는 한반도의 근대화가 긴박하다는 논리를 내세우면서 일본과의 연대의 필요성을 정당화하였다.584) 전복희, 위의 책, 189쪽.

 1910년 국권을 상실하게 되면서 사회진화론의 미몽에서 깨어나고자 하는 각성이 일어났다. 신민회를 중심으로 한 애국계몽주의자들은 사회진화론 가운데 ‘근대문화 지상주의’적 입장보다 경쟁을 중시하는 측면에서 사회진화론을 수용하고 자력으로 독립을 쟁취할 것과, 실력양성과 함께 애국정신을 고취하고, 일제의 침략논리인 ‘동양주의’에 대한 비판을 가하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직 사회진화론적 사고와 논리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585) 李浩龍,≪한국인의 아나키즘 受用과 展開≫(서울대 박사학위논문, 2000), 20∼21쪽.

 사회진화론에 대한 더 근본적인 대안으로 모색된 것은 大同思想의 재발견을 통해서였다.≪禮記≫禮運篇의 대동사회에 대한 묘사는 인간이 추구해야 할 이상적인 사회의 표본으로서 전통적으로 인식되어 왔으나, 이를 근대에 들어와 체계화한 것은 淸末 康有爲에 의해서였다. 그의 사상에는≪예기≫예운편의 大同小康說과 더불어 불교의 자비평등설, 루소의 천부인권설, 기독교의 평등자유설, 유럽 사회주의 학설 등 다양한 요소를 받아들여, 한편에서는 진화와 발전을 선전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진화의 비약적이고 혁명적인 발전에 대해 반대하였다. 즉 제국주의 침략에 직면한 중국이 전통적 체제를 유지하는 한도내에서 개량을 통해 중국의 근대화를 추구하였다.586) 이호룡, 위의 책, 24쪽. 강유위의 대동사상은 한말에 梁啓超의 저술을 통하여 부분적으로 국내에 소개되어 한국 지식인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다. 朴殷植은 1910년 국권상실을 전후한 시기에 강유위의 대동사상의 영향을 받아 優勝에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優勝劣敗의 질서 즉 정치권력적 국제질서에 대해 도덕적 측면에서 사회진화론을 부정하였다. 그는 1909년<儒敎求新論>에서 공자의 대동사상, 맹자의 民爲重說을 통해 전통 유교가 평등적·민주적·민중적 유교로 발전할 것을 주장하며 우승열패·약육강식의 사회진화론적 사고를 부정하였다. 그의 대동사상은 1911년<夢拜金太祖>에서 현재의 민족경쟁·국가경쟁시대에서 하등사회로 하여금 상급사회로 진보케 하는 평등사회를 이룩하는 것이 진화의 공리라 하였으며, 제국주의·강권주의를 정복하여 세계인권의 평등주의를 실현하는 것이 한국인의 당면과제이며, 한국인은 평등주의의 선봉에 서야한다고 주장하였다.587) 이호룡, 위의 책, 25쪽. 이러한 대동사상에 바탕하여 그는 1909년 9월 李範圭·張志淵·元泳儀·趙琬九 등과 함께 大同敎를 창건하였다. 申采浩나 素昻 趙鏞殷도 대동사상에 입각하여 국가·민족·계급사이의 불평등을 배격하는 평등주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평등주의적 사상의 전개는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사회진화론을 극복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588) 이호룡, 위의 책, 26쪽.

 이러한 대동사상은 사회진화론을 극복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했는데 그것은 약육강식·우승열패의 원칙이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함으로써 사회진화론의 부정은 현실적인 의미를 지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의식상의 한계는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대동사상이 社會改造·社會改造論과 결합됨으로써 극복하게 되었다.589) 이호룡, 위의 책, 27쪽.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세계 지성계에 큰 충격과 함께 각성을 가져와 힘이 지배하는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병폐에 눈을 뜨고, 정의·인도의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로망 롤랑(Romain Rolland), 버트란트 러셀(Bertrand Russell) 등이 사회개조·세계개조론을 제기하며 사회진화론을 비판하고, 정의·인도·박애·자유·평등을 표방하였다. 한국의 지식인들도 제1차 세계대전의 참상에 충격을 받고 사회개조·세계개조의 사상을 수용하기 시작하여, 사회개조·세계개조론이 대동사상과 결합하여 1917년 7월 신규식·조소앙·박은식·박용만·신채호 등에 의해<대동단결 선언>로 나타났다.<대동단결 선언>은 독립과 평등을 성스러운 권리라고 함으로써 강자에 의한 약자의 지배를 부정하였다.590) 이호룡, 위의 책, 30쪽. 1918년 11월 28일 창립되어 3·1운동의 단서를 열기 시작한 상해의 신한청년당 黨綱에서 사회개조와 세계대동을 천명했다.591)≪신한청년≫창간호(1920년 3월),<신한청년당>, 78쪽.
≪독립신문≫, 1920년 2월 5일.

 한편 세계대전이 총력전의 양상으로 전개됨에 따라 연합국과 동맹국들은 여론의 강력한 지지를 유도하기 위해 전쟁의 목표를 보다 숭고하고 고원한 이념으로 승화시켜 제시하기에 바빴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자신들이 일으킨 전쟁을 ‘민족적 존립’을 방어하기 위한 것으로 선전하였으며, 미국의 우드로우 윌슨 대통령은 1916년 5월 27일부터 항구적인 평화를 위한 국제기구의 필요성과 함께 “모든 국민은 그들이 속해 살 주권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민족자결주의를 제시하기 시작하였다.592) 이만열,<민족운동과 민족자결주의>(≪한민족독립운동사≫11, 국사편찬위원회, 1992), 263쪽. 1917년 2월 러시아에서 일어난 사회주의 혁명으로 제정러시아가 붕괴하자 연합국들은 이 대전을 민주주의와 군국주의적 전체주의의 대결로 규정할 수 있게 되었다.

 러시아 볼세비키 정권은 1917년 말 무병합·무배상에 기초한 공정하고 민주적인 강화와 러시아 내 소수민족의 자결선언, 비밀외교 폐지를 주장하여 참전국 국민들과 피압박 민족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593) 이만열, 위의 글, 264쪽. 이런 볼세비키 정권의 외교정책에 대항하여 연합국측의 ‘평화의 원칙’을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14개조 평화원칙>을 공표했다. 여기에는 공개적인 평화조약, 비밀조약의 폐지, 군축, 해양자유의 원칙, 국제통상의 평등주의, 민족자결, 국제연맹의 창설 등이 포함되었는데, 이러한 원칙은 연합국측의 이념으로서 전세계에 선전되었다. 그러므로 러시아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 붕괴, 주축국 오스트리아·독일·터어키 등 전체주의적 군국주의 국가의 패전과 연합국측의 민족자결주의 등으로 세계는 바야흐로 해방·자유와 평등·민주주의가 세계를 풍미하게 되었다.594) 이만열, 위의 글, 265∼266쪽.

 이 가운데 제국주의적 국제질서를 부정하고, 약소국의 민족자결을 주장하자 사회진화론적 사고에서 탈피하고자 하고 있던 한국인들은 ‘세계개조의 신시대’가 눈앞에 전개되기 시작한 것으로 파악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회개조·세계개조론’은 가장 먼저 발표되었다고 알려진 만주에서의<대한독립선언서>에도 반영되어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것을 부정하고, 대동사상에 입각하여 모든 사람이 평등한 대동사회를 건설할 것”을 주장하였으며,595) 이호룡, 앞의 책, 32쪽. 서울에서의 민족대표<독립선언서>에서 “신천지가 眼前에 전개되도다. 위력의 시대가 去하고 도의의 시대가 來하도다 … ”고 표명하게 된 것도 이러한 세계 사상계의 변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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