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Ⅲ. 3·1운동
  • 1. 3·1운동의 배경
  • 4) 국내 상황
  • (2) 식민지 지배의 모순 격화와 민생 피폐

(2) 식민지 지배의 모순 격화와 민생 피폐

 3·1운동이 일어나던 때 조선의 민중들에게는 10년간의 조선총독부와 헌병경찰에 의한 무단통치만이 고통이었던 것은 아니었다.601) 1910년대 식민지 통치에 관해서는 ‘제1장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을 참고. 쌀값폭등으로 인해 민생이 도탄의 극을 달리고 있었던 점도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1910년대를 통하여 조선의 무역은 미곡의 수(이)출, 직물의 수(이)입이라는 전형적인 식민지적 종속성을 나타내게 되었다. 미곡의 경우 일본으로 이출율이 1910년의 66%에서 1919년에는 98.6%로, 직물의 이입의 경우 1910년 54%였던 것이 1919년에는 85.1%로서 각각 일본 단일창구에 집중되어 간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조선의 쌀값은 일본의 쌀값 동향과 밀접하게 연관되게 되었다. 일본은 대전기간 중에 자본주의가 급속하게 발달하여 도시 비농업 인구의 급증, 1인당 쌀 소비량의 증가, 酒類 수요의 증대, 시베리아 출병으로 인한 군량미 조달 등으로 인해 쌀 수요가 급증했다. 이에 반해 농업 노동력의 도시 유출, 노동력 부족과 인건비 상승, 폭풍우 피해 등으로 인하여 1917년도 쌀 생산량을 감소시켰으며, 농민의 7할이 소작농인 상태에서 이러한 수요에 대응하여 쌀 생산을 늘이는 데에 한계가 있었다. 이런 요인으로 쌀값이 상승하자 보유미 매출을 주저하게 하여 1918년에 들어 쌀의 출하량은 오히려 줄었다. 이런 상황이 되자 일본의 대미곡상과 지주들은 매점매석을 하여 1918년 일본의 쌀값은 이전에 볼 수 없던 狂騰의 양상을 띠어 ‘米騷動’이라고 하는, 쌀값폭등으로 인한 사회적 소요가 있었다.

 조선의 쌀값은 1914년부터 1916년까지의 3년간에는 精米 1석당 12圓에서 16.7圓 사이로서 1913년의 21원 50전에서 하향 안정을 나타내었다. 3년간 계속 1,100만 석에서 1,250만 석의 풍작을 기록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쌀값의 안정은 지주들에게는 불리했지만, 소농을 비롯한 민중들의 생활에는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1917년에 들어서자 이러한 안정된 쌀값 기조가 깨어지면서 5월에 석당 18원 33전, 6월에 21원 16전, 10월에 23원 50전으로 뛰기 시작했다. 이러한 쌀값등귀의 원인 중 가장 큰 요인은 전쟁특수경기를 타고 대금을 모은 자들이 일본의 미가분등을 기회로 미곡투기에 나섰기 때문이었다. 쌀값의 등귀는 戰後 제반 물가의 등귀와 더불어 조성된 것이어서 서민의 생활에는 심대한 타격을 주었으며, 지방에 따라서는 공황의 양상을 나타내고 있었다. 1917년에 조성되기 시작한 이러한 상황은 1918년에 들어와 더욱 악화되어 갔다. 1918년 전반기에 26∼28원대로 등귀하더니 8월에 접어들면서 전달에 비해 석당 10원이 폭등했다.

 바야흐로 쌀값 폭등장세가 일어나 이해 후반기에는 38∼39원대까지 등귀를 계속했으며, 1919년 1월에 40원대, 2월에는 43원 57전을 돌파하며 폭등세가 계속되었다. 당시 신문에서는 ‘사람 죽일’ 시세라고 표현했다.

 일본정부는 자국내 쌀값 진정을 위하여 오사카(大阪)의 스즈키(鈴木)商店을 대리로 내세워 비밀리에 조선 쌀 20만 석을 매점하게 했다. 이 명령에 따라 스즈키상점은 오사카의 朝鮮米商, 코니시 타츠지로(小西辰次郞)를 매개로 하여 부산·군산·인천에서 조선미를 매수하고, 이것이≪關門日日新聞≫에 보도됨으로써 국내에 큰 파문이 일었다. 이러한 매점 때문에 8월중에 10원이 폭등했고, 이에서 그치지 않고 계속하여 1919년 3월 석당 40원 이상까지 천정을 모르고 쌀값의 폭등세가 지속되었던 것이다.

 일제는 부랴부랴 조선 궁민들을 위해 구제회를 조직하고, 廉賣 쌀을 공급하였으나, 그 양도 적고, 파는 곳도 몇 곳 되지 않아 굶주린 민중들은 종일 열을 지어 1인당 2되씩 파는 쌀을 기다리다가 사지 못하고 돌아가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1918년 8월 28일 종로소학교에서는 염매 쌀을 사려고 기다리던 200여 명의 군중과 경찰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다. 곧 군중이 1,000여 명으로 불어나 학교 건물을 파괴하는 일대 소동이 일어났다. 민중의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8월 22일 목포 철도工夫들이 쌀집을 습격한 사건도 그것이었으며, 부산·서울·원산 등지에서는 대중의 궐기를 호소하는 전단이 뿌려지기도 하였다. 1918년에 들어와 노동자들의 동맹파업과 임금투쟁이 급격히 증가된 것도 이런 맥락에서 터져 나온 것이었다. 1916년도 동맹파업은 6건에 참여인원 362명, 1917년 8건에 1,128명이던 것이 1918년에 가서는 50건에 4,442명으로 급증한 것은 일제의 지배에 대한 민중적 저항이 폭발직전에 와 있다는 표시였다. 602) 이정은,<매일신보에 나타난 3·1운동 직전의 사회상황>(≪한국독립운동사연구≫4,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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