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Ⅲ. 3·1운동
  • 1. 3·1운동의 배경
  • 5) 3·1운동의 태동
  • (1) 상해 신한청년단의 활동과 해외 독립운동가들의 움직임

(1) 상해 신한청년단의 활동과 해외 독립운동가들의 움직임

 1918년 8월 20일 경 呂運亨·張德秀·金澈·鮮于爀·韓鎭敎·조용은·趙東祐 등 청년들은 상해에서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활동하고 있었는데, 1918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미국에서 챨스 알 크레인을 대통령 특사로 중국에 파견하여 전후 평화회담에서의 미국의 입장을 설명하게 하고, 산동반도 처리문제를 갖고 있는 중국에 대표 파견을 적극 권고하게 하였다. 크레인 특사가 상해에 오자 중국정부는 환영집회를 개최했는데, 이 자리에 신한청년당 대표 여운형이 범태평양회의 회원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크레인 특사는 전후 식민지 처리문제가 피압박 민족의 의사를 존중해서 처리될 것이며, 중국도 평화회담에 대표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는 연설을 하였다. 여운형은 이 연설을 듣고, 파리에서 열리는 평화회담에 한국 대표도 참석시켜 한민족의 독립의사를 발표하고,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을 한반도에도 적용할 것을 요구하는 절호의 기회로 보고, 개인적으로 크레인을 찾아가 파리 평화회의에 한국대표의 참석에 대한 협조를 구하였다. 또한 여운형은 당원 긴급회의를 열어<한국 독립에 관한 진정서>2통을 파리 평화회의 의장과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전달해 주도록 크레인 특사에게 부탁하였다. 그는 같은 문서 2통을 파리 평화회의 중국 대표단 고문으로 파리로 떠나는 상해≪밀라드 리뷰≫(Millard Review) 잡지 사장 토마스 밀라드(Thomas Millard)에게 전달을 부탁하였다. 또한 金奎植을 신한청년당 대표 겸 한국대표로 선정, 1919년 2월 1일 파리로 출발시켰다.

 신한청년당은 파리 평화회의를 통하여 국제사회에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는 한편 한국민족 전체의 의사를 표명하도록 촉구하기 위하여 선우혁과 김철을 1차로 국내에 파견하고, 이어서 서병호·김순애(김규식의 부인)·백남규를 제2차로 파견하였다. 선우혁은 1919년 2월 초 평안북도 선천에 도착하여 양전백 목사와 정주의 이승훈·길선주 목사 등을 만나 독립운동을 일으키는 것에 적극적인 찬동을 받고 상해로 돌아갔다. 평안도 지역 기독교 지도자들은 당초 기독교 교회와 학생들이 연합하여 독립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김철은 서울에 와서 천도교측과 접촉하여 3만 엔의 송금을 약속받고 상해로 돌아갔다. 서병호와 김순애는 대구지방의 애국인사와 접촉하고 상해로 돌아갔다.

 신한청년당은 일본에도 제1차로 조용은을, 제2차로 장덕수와 이광수를 파견하여 일본의 한국유학생들과 접촉하게 하였다. 장덕수는 동경에서 일본 유학생들을 접촉하여 김규식의 파리 평화회의 한국대표 파견사실을 전하며 독립운동을 권유하고, 서울로 잠입했다가 일제 관헌에게 체포당했다. 뒤이어 이광수가 서울을 거쳐 동경으로 와 재일본 한국유학생들의<2·8독립선언서>를 기초하였다.

 신한청년당에서는 또 여운형이 직접 만주 간도와 노령 연해주를 순방하였다. 여운형은 간도에서 呂準을 만나고 다시 연해주로 가서 그곳의 박은식·문창범·이동휘 등의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북간도 간민회 회장 金躍淵, 총무 鄭載冕 등 많은 지도자들을 만나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종용하였다. 이와 같이 신한청년당이 김규식을 파리 평화회의에 파견하고, 국내외에서 민족의 독립의사를 표명하는 운동을 벌일 것을 촉구함으로써 3·1운동을 촉발하는 중요한 계기를 주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가장 먼저 가시적인 행동으로 나타난 것은 1919년 2월 만주를 중심으로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을 망라하여 大朝鮮獨立團을 조직하고 金敎獻·金奎植·金東三·金躍淵·金佐鎭·金學萬·鄭在寬·趙鏞殷·呂準·柳東說·李光·李大爲·李東寧·李東輝·李範允·李奉雨·李相龍·李世永·李承晩·李始榮·李鍾倬·李沰·文昌範·朴性泰·朴容萬·朴殷植·朴贊翊·孫一民·申檉·申采浩·安定根·安昌浩·任氵邦·尹世復·曺煜·崔炳學·韓興·許爀·黃尙奎 등 39명 명의로<大韓獨立宣言書>가 나온 것이었다. 이 선언서는 해외 망명 독립운동가의 입장에서 조소앙이 기초하여 작성된 것이다. 이 선언서는 해외에서 활동하는 독립군은 국내 동포의 위임을 받아 활동하고 있으며, 일본은 민족과 동아시아, 국제사회, 인류의 차원에서 타협할 수 없는 적이며, 항일 독립전쟁은 “天(하늘)의 인도와 대동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신성하고도 정의로운 전쟁이며, 자기희생의 비장한 결단에 의해서만 민족의 독립이 성취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미국의 대한인국민회(Korean National Association)의 安昌浩는 1918년 12월 1일 전체회의를 소집하고, 워싱턴에 대표를 파견하여 파리 평화회의에<독립청원서>를 보내기로 결의하고 대표로 鄭翰景·李承晩·閔贊鎬를 선정하였다. 세 대표는 여권수속을 시작하였으나, 같은 전승국인 일본의 항의로 미국 정부가 여권을 발급해 주지 않아 출발할 수 없었다.

 1918년 12월 13일부터 뉴욕에서는 제2차 약소민족동맹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 신한협회(New Korea Association)를 대표해서 뉴욕의 金憲植, 중서부 지역을 대표해서 시카고의 정한경, 대한인국민회를 대표하여 캘리포니아의 민찬호가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파리 평화회의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모든 약소민족들을 독립시켜야 한다”고 결의하였다.

 한편 미주 동포들이 한국대표로 정한경·이승만·민찬호를 파리 평화회의에 파견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일본의 영자신문≪저팬 크로니클(Japan Chronicle)≫에 보도되고, 약소민족 동맹회의의 약소민족 독립결의가≪저팬 어드버타이저(Japan Advertiser)≫에 보도되자 일본의 한국유학생들은 큰 자극과 고무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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