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Ⅲ. 3·1운동
  • 1. 3·1운동의 배경
  • 5) 3·1운동의 태동
  • (2) 2·8독립선언

(2) 2·8독립선언

 미주 한인동포들의 독립운동 보도기사는 일본에 있던 한국유학생들의 행동을 촉발시켰다. 재일본 한국유학생들은 1918년 12월 29일 유학생 학우회의 망년회와 12월 30일 조선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열린 동서통합웅변대회에서 한국독립문제를 의제로 하여 격렬한 토론을 벌이고, 생명을 바쳐서 조국독립을 위한 실천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1919년 1월 6일 한국유학생들은 같은 장소에서 다시 웅변대회를 개최하고, 구체적 운동에 착수할 것을 결의하고 실행위원으로 최팔용·서춘·백관수·이종근·김상덕·전영택·김도연·윤창석·송계백·최근우 등 10명을 선출하였다. 이들은 독립선언을 하여 일본정부와 각국 대사·공사, 일본 귀족원과 중의원에 보내기로 결정하고, 1월 7일 200명의 회중에게 보고하여 만장일치로 동의를 얻었다. 이 무렵 상해의 신한청년당에서 보낸 조용은과 장덕수가 동경에 도착하여 유학생들의 궐기를 고취하였으며, 뒤이어 이광수가 도착하여 한국유학생들의<2·8독립선언서>를 기초하게 되었다.

 재일본 한국유학생들은 실행위원 10명 중 병으로 사임한 전영택 대신 이광수·김철수를 추가하여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와세다대에 유학 중이던 송계백을 국내에 파견하여 독립운동을 고취하고 자금을 모집하며, 선언서 인쇄활자를 구해 오도록 하였다. 송계백은<2·8독립선언서>원고를 비밀리에 휴대하고 국내에 들어와 현상윤·최린 등을 만났다. 이것이 국내 지사들에게 큰 자극을 주어 3·1운동 준비를 본격화시키게 되었다.

 유학생들은 1919년 2월 8일 오전 10시<선언서>와<결의문>·<민족대회 소집 청원서>를 귀족원과 중의원, 조선총독부, 동경 및 일본 각지 신문사와 잡지사, 여러 학자들에게 우송하고 오후 2시 유학생학우회 선거를 칭하고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약 400명이 모여 유학생 대회를 열었다. 최팔용의 사회로 대회의 명칭을 조선독립청년단 대회로 바꾸고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박관수가 조선독립청년단대표 명의의<선언서>를 낭독하고, 김도연이 4개항의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장내의 독립만세 소리로 열광은 극에 달했다.603) 강재언,<2·8독립선언과 3·1운동>(국사편찬위원회,≪한민족독립운동사≫3, 1988), 203쪽.
―――,<日本在住朝鮮人情況>(總督府支署, 1920;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2, 1968), 642∼665쪽.

 <2·8독립선언서>에서 유학생 대표들은 첫째 한국 민족이 유구한 역사를 가졌으며, 역사상 이민족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음을 천명하고, 둘째 사기와 폭력에 의한 국권탈취의 불법성과 침략정책을 고발하였으며, 셋째 10년간의 식민지 통치가 상호이해에 상반됨과 한국 민족의 생존을 위하여 독립을 주장할 수밖에 없음을 주장하였으며, 넷째 동양평화의 견지에서 볼 때 소련이나 중국이 군국주의적 야심이 없음으로 일본이 한국을 침략할 구실이 없으며, 다섯째 일본이 한국에 대해 식민지 통치를 계속한다면 우리 민족은 영원히 일본에 대해 혈전을 할 것임을 밝히고, 여섯째 우리 민족은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신국가를 건설하여 세계평화와 인류문화에 공헌할 것임을 선언하였다. 또한 4개항의 결의문은 첫째 한일의 합병이 우리 민족의 자유의사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우리 민족의 생존·발전을 위협하고, 동양의 평화를 교란하는 원인이 되는 이유에서 독립을 주장하며, 둘째 일본 의회와 정부는 조선민족대회를 소집하여 우리 민족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도록 요구하며, 셋째 만국평화회의에 대해 민족자결주의를 우리 민족에게 적용하기를 요구하고, 이를 위해 각국 대사가 본국에 이 의사를 전달할 것과 우리 대표자 3인을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할 것을 밝혔으며, 넷째 이러한 요구가 실패할 때에는 일본에 대하여 영원히 혈전을 선포한다는 것을 밝혔다. 이렇게 하여 3·1운동의 전주곡이 울려퍼지게 되었다.

 오후 3시 50분 니시간다(西神田) 경찰서의 경찰에 의해 포위된 집회장은 곧 경찰과 유학생들간에 일대 난투극이 벌어졌으며, 미리 상해로 탈출한 이광수를 제외한 임시실행위원 10명과 함께 27명이 검속되어 그 중 최팔용 등 9명은 금고 1년에서 7개월 15일의 형에 처해졌다. 당초 일제는 이 사건에 내란죄를 적용하고자 하였으나 일본 법조계에서 명망있는 하나이 다쿠조(花井卓藏) 등 여러 변호사들이 무료변론을 자청하고 나서604) 이외 무료변론 일본 변호사들은 우자와 후사아키(鵜澤聽明)·후세 다츠지(布施辰治)·이아이 오시유키(今井嘉幸)·사쿠마 고죠(作間耕造) 들이다. “학생의 신분으로 자기 나라 독립을 부르짖는 것이 어찌 일본 법률의 내란죄에 해당되느냐”, “민족자결의 사조가 팽창함에 비추어 학생들의 주장은 정당한 것이니 벌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등의 변론으로 비교적 가벼운 형량의 출판법 위반죄가 적용되었다.605) 강재언, 앞의 글(1988), 208쪽.

 일본 유학생 100여 명은 2·8독립선언에 이어 2월 12일 히비야(日比谷)공원 음악당 근처에 모여 일본의회에 독립을 청원할 대표자로서 李達을 회장으로 추대하고, 한 학생이 독립에 관한 연설을 하다 일경에 체포되었다. 2월 23일에는<독립선언서>와<국민대회청원서>를 일본의회에 제출하였음에도 어떠한 조치도 없자<朝鮮靑年獨立團國民大會促進部趣旨書>를 인쇄하여 히비야 공원에서 시위운동을 전개할 계획을 세웠다가 그 인쇄물이 사전에 발각됨으로써 卞熙瑢·姜宗燦·崔承萬·張仁煥이 구금되었다. 그러나 오후 2시 경 약 150명의 유학생이 히비야공원에 모여 있는 주도자 중 구금되지 않은 崔在宇가 나타나 이 유인물을 배포하며 다시 한 번 시위를 기도하였으나, 곧 일경에 의해 집회는 해산되고 최재우도 체포되었다.606) 강재언, 앞의 글(1968), 6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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