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Ⅲ. 3·1운동
  • 1. 3·1운동의 배경
  • 5) 3·1운동의 태동
  • (3) 광무황제의 붕어와 인산

(3) 광무황제의 붕어와 인산

 1919년 1월 22일 高宗황제의 갑작스런 죽음은 국민 모두에게 충격이 되었다. 일제 헌병대 보고서에 조차, “1월 22일 ‘돌연히’ 李太王 승하의 소식이 발표되자, 상하 모두 그 급격한 訃音에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경기)”607)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조선소요사건상황>(≪독립운동사자료집≫6), 476쪽., “… 이태왕 전하의 승하의 報가 전해지자 상하 일반이 경악하였고(충북) …”608)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조선소요사건상황>(≪독립운동사자료집≫6), 472∼473쪽.라고 하는 상황이었다. 일제에 의해 강제 양위를 당하고 절치부심하던 황제의 갑작스런 죽음은 여러 가지 추측과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일본의 정략에 의해 일본에 끌려 갔다가 일본 여인과 혼례를 올리게 된 셋째 황태자 영왕 李垠의 혼례날을 앞두고 그 혼례를 좋아하지 않아서 자결하였다든가 하는 소문도 그 중 하나였는데, 이 중 일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쳤으며, 3·1운동 발발에 기름을 끼얹은 것은 ‘독살설’이었다. 광무황제가 일본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소문은 식민지 지배하의 민족적 울분을 촉발시켰으며, 이로 인해 배일사상이 갑자기 비등하게 되었다. 민족대표의 일원이며, 1918년 초부터 민중봉기를 주장해 왔던 李鍾一은 일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어제 고종이 일본에 의해 독살당하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대한인의 울분을 터뜨리게 하는 일대 요건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민중시위 구국운동은 이제 진정한 민중운동으로 성숙될 것이다. … 이 운동에 아니 참여할 자가 있겠는가(이종일,<묵암 이종일 선생 비망록(4)>, ≪한국사상≫19, 1982, 226쪽).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지방마다 주민들은 흰 갓을 쓰고 양반·유생 주도하에 望哭式을 행하였는데 경북지방 1부 23군에서만 230개소에서 망곡식이 거행되었던 데서 전국민적인 추모의 정서를 알 수 있다. 3월 3일 국장일이 결정되자 국장배관을 위해 지방에서 상경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3월 3일 고 이태왕 전하의 국장 집행 전날이래 본도(경남)로부터 양반, 유생, 기타 지방 유력자로서 상경하는 자가 뒤를 이었고 …”609)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6, 483쪽. 기차를 탈 수 없는 사람들은 육로로 밤길을 걸어서 간 사람도 적지 않았으며,610)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6, 474쪽. 교통이 불편한 지역에서는 오륙 명씩, 십여 명씩 단체로, 아니면 배로 가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남대문 정거장에는 매일 평균 1,500∼1,600명의 승객이 이용하던 것이 1919년 2월 26일에는 3,000여 명, 27일에는 6,000여 명이 서울로 왔다.611)≪매일신보≫, 1919년 3월 1일.

 3·1운동의 기획자들은 거사일을 광무황제의 장례식을 이틀 앞둔 시점으로 잡았고, 장례식 참관을 위해 지방에서 서울로 운집한 수만 명이 자연스럽게 참여 또는 목격하고, “많은 ‘불온 인쇄물’이 살포됨으로써 그 중 호기심에 찬 자들이 몰래 이것을 주워 두루마기 속에 꿰매 넣어 가지고 돌아오기도 하고, 혹은 우편으로 친지에게 보낸 자들도 있어”612)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조선소요사건상황>(≪독립운동사자료집≫6), 474쪽. 자연스럽게 전국적 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게 했다. 이러한 국장참관이 시위운동 전파에 미친 영향에 대해 일제는, “갑자기 3월 1일 경성에서의 소요는 민심에 일대 자극을 주었고, 이에 더하여 國葬儀에 拜觀하고 돌아온 자는 소요 목격담을 한층 과대하게 항간에 전하여 더욱더 민심을 험악하게 유도하여, 언제 소요의 발발을 볼지 예측하기 어려운 형세를 나타내었다”613)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조선소요사건상황>(≪독립운동사자료집≫6), 484쪽.고 할 정도의 상황이 조성되었다.

<李廷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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