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Ⅲ. 3·1운동
  • 2. 3·1운동의 전개
  • 1) 3·1운동의 초기 조직화
  • (3)<독립선언서>의 배포와 최후의 회담

(3)<독립선언서>의 배포와 최후의 회담

 <독립선언서>의 배포는 오세창이 총책임을 맡고 실무는 이종일이 담당하였다. 선언서의 배포는 천도교·기독교·불교·학생단 등이 분담하기로 하였다. 주로 서울 시내는 학생단에서, 지방 각처는 천도교와 기독교측에서 분담했다. 천도교측에서는 印宗益-충청도·전라도, 安商德-강원도·함경도, 金洪烈-평안도, 李景燮-황해도 등으로 전달책임을 맡았다. 기독교측에서는 金昌俊-평안도, 李甲成-경상도, 吳華英-경기도·함경도, 咸台永-평안도지방 보충 등으로 분담했다. 불교측에서는 한용운이 전달책임을 맡았으며, 학생단에게는 이갑성이 책임을 맡았다. 이와 같이 각기 책임 맡은 지역으로 내려가 3·1운동 발발 전에 경상도로부터 평안도·함경도에 이르기까지 주요 지역에<독립선언서>가 전달되었다.

 파리 평화회의와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보내는<독립청원서>는 기독교의 金智煥이 그 책임을 맡아 3월 1일 서울역을 출발하여 신의주로 가서 미리 중국 상해에 가서 기다리고 있는 현순에게 압록강 건너 안동에서 우편으로 부쳤다. 일본 정부와 의회에 보내는<독립통고서>는 천도교의 임규가 담당하여 2월 27일 서울을 출발하여 3월 1일 동경에 도착하였다. 임규는 일본에서<독립통고서>와<독립선언서>를 일본어로 번역하여 민족대표들이 기명 날인한 지면을 각각에 붙여 일본 정부와 귀족원·중의원에 우송하였다. 기독교측의 安世桓도 별도로 3월 1일 일본 동경에 도착하여 3월 4일 일본 경시청을 방문하여 경시총감을 면회하고, 조선독립의 이유를 설명한 다음<독립통고서>와<독립선언서>를 일본정부 각료들에게 전달해 주도록 요구하였다.

 2월 28일 오후 5시 서울 가회동 170번지 손병희 집의 산장에서 민족대표 23인이 참석한 가운데 마지막 모임을 열었다. 서로 인사를 교환한 후 손병희의 인사말을 듣고, 다음 사항이 결정되었다. 첫째 박희도가 독립선언의 장소를 군중심리에 의해 폭력화할 우려가 있다며 파고다 공원에서 다른 장소로 변경할 것을 제안하여 중국요리점 명월관의 지점 태화관으로 변경하였다. 참석자 모두 이에 찬성하였다. 둘째<독립선언서>와<독립통고서>를 조선총독부로 보내기로 결의하고, 책임자를 이갑성으로 선정하였다. 셋째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갖되 33인 전원이 행동을 통일하기로 하였다. 넷째 독립선언 후 일제 경찰이 체포하러 오더라도 피하지 말고 함께 체포당하여 정정당당하게 경과를 주장하기로 합의하였다. 이날의 결정으로 말미암아 3월 1일의 독립선언식은 불가피하게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서, 학생·시민들은 파고다 공원에서 별도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