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Ⅲ. 3·1운동
  • 2. 3·1운동의 전개
  • 2) 3·1운동의 발발
  • (1) 민족대표의 독립선언

(1) 민족대표의 독립선언

 1919년 2월 28일 집에 돌아온 최린은 다음날 직면할 일제의 체포와 고문, 어쩌면 42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감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하며, 눈물까지 지었다.621) 최린, 앞의 책, 199쪽. 아침에 일어난 최린은 대문안에 떨어진<독립선언서>2장을 보고 이 역사적인 문서가 이미 시내에 배포되었음을 확인했다. 그는 손병희의 집으로 가서 권동진·오세창·손병희와 함께 인력거에 몸을 싣고 낮 12시 쯤에 인사동에 있는 태화관에 도착하였다. 주인 안순환을 불러 산정 별관에 회석을 정하고, 30여 명 분의 점심을 준비하라고 일렀다. 얼마 후부터 민족대표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오후 2시까지 길선주·유여대·김병조·정춘수 4명을 제외한 29명이 모였다. 길선주는 평양에서, 정춘수는 원산에서, 유여대는 의주에서 그날 늦게 도착하였고, 김병조는 상해로 탈출하여 국내에 없었다. 이때 태화관 주변에는 천도교와 기독교 청년들이 눈물을 흘리며 대기하고 있었고, 별실 옆방 6호실에는 기독교의 李奎甲, 천도교의 李炳憲 등 청년 6명을 비밀리에 잠복시켜 놓고 기록과 파고다공원과의 연락을 취할 책임을 맡겨 놓았다.622) 이병헌,≪3·1운동비사≫(시사시보사 출판국, 1947), 5쪽(이규갑 서문)·66쪽.

 손병희는 이종일에게<독립선언서>를 직접 인쇄·배포했으니 크게 낭독하라 하여 오자를 고치고 낭독하였다.623) 이종일,≪묵암 이종일 비망록(4)≫, 229쪽.
≪최린자서전≫에는 “3시 정각에 선언서 백매를 탁상위에 놓아두고 각인의 열람에 제공하고 낭독만은 생략하였다”고 되어 있다(최린, 앞의 책, 201쪽).
이어 최린에게 경무총감부에 전화로 독립선언의 사실을 통고하라고 하고, 총독부에는 이갑성이 金允珍을 보내어<독립선언서>와<독립통고서>를 제출하게 했다. 종로경찰서에는 인력거꾼을 시켜 제출했다. 긴장된 시간이 한 10분 흘렀을 때 일본 경찰 수십 명이 달려와 식장을 포위하였다. 이때 파고다 공원에서 수천 명의 학생·시민들과 함께 긴장 가운데 독립선언의 장소가 변경된 것을 모르고 민족대표들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던 학생대표 강기덕·김원벽·한위건이624) 이종일,≪묵암 비망록≫, 230쪽에는 “10여 명의 학생들이 태화관으로 몰려왔다”고 되어 있다. 태화관으로 달려와 갑작스런 장소변경에 항의하며 파고다 공원으로 가기를 거세게 요청했다.625) 이병헌, 앞의 책, 66쪽. 손병희와 최린이 이해를 시켜 그들을 돌려 보냈다.

 일경이 에워싸고 있는 가운데 한용운이 “오늘은 조선독립을 선언하기 위한 영광스러운 날이며, 공동합심하여 조선독립을 기도하자”는 式辭를 하였다. 일동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선독립만세를 높이 불렀다. 민족대표들은 경시총감부로 차례로 연행되어 갔다. 이종일·이승훈·나용환이 한 차에 태워져 실려 갈 때에는 200∼300장씩의<독립선언서>를 군중들이 뿌리며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했다. 태화관 바깥과 시내의 군중들이 차를 에워싸고 감격과 흥분속에서 목이 터져라 만세를 따라 외쳤다. 마지막으로 한용운과 최린이 실려 갈 때는 목이 쉬어 군중들이 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626) 최린, 앞의 책, 2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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