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Ⅲ. 3·1운동
  • 2. 3·1운동의 전개
  • 2) 3·1운동의 발발
  • (2) 만세시위운동의 시작

(2) 만세시위운동의 시작

 3월 1일 오후 2시 30분 민족대표를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학생대표들은 독자적으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그날의 파고다 공원의 광경을 이미륵의 묘사를 통해 볼 수 있다.627) 작가 이미륵은 본명 李儀景. 당시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으로 3·1운동에 참여하고 그 후 지하 유인물을 만들다가 일경의 추적을 받자 중국을 통해 독일로 망명하여 고국에서의 성장과정과 경험을≪압록강은 흐른다≫라는 소설로 작품화하였다.

내가 공원에 갔을 때 이미 공원은 경관들로 포위를 당하고 있었다. 담장 내부는 단 열 발자국도 걷지 못하게 사람이 꽉 차 있었다. … 갑자기 깊은 정적이 왔고 나는 누군가가 조용한 가운데 연단에서 독립선언서를 읽는 것을 보았다 … 잠깐 동안 침묵이 계속되더니 다음에는 그칠 줄 모르는 만세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좁은 공원에서는 모두 전율하였고, 마치 폭발하려는 것처럼 공중에는 각양각색의 삐라가 휘날렸고 전 군중은 공원에서 나와 시가행진을 하였다. 우뢰와 같은 만세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삐라를 날리며 행진하였다(전혜린,≪압록강은 흐른다≫, 여원사, 1959).

 시민과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독립선언서>를 발표한628) 다음은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사람이 경신학교 졸업생 정재용이라고 하였다.
이종일,≪묵암 이종일 비망록(4)≫, 234쪽.
이병헌, 앞의 책, 66쪽.
최은희,≪조국을 찾기까지≫中(탐구당, 1973), 14∼17쪽.
파고다 공원의 군중들은 “독립만세”를 연창하며 시가행진을 했다. 서쪽으로 향한 대열의 제1대는 서울역에서 통의동, 정동, 미국영사관, 이화학당, 광화문 앞, 서대문, 소공동, 충무로로, 다른 1대는 무교동, 대한문으로, 동쪽으로 향한 시위대는 창덕궁, 안국동, 광화문, 서대문, 대한문, 충무로, 동대문 방면으로 행진하였다. 온 서울 장안이 만세소리로 진동하였다.

 동쪽으로 향한 다른 시위대는 창덕궁 앞, 안국동, 광화문 앞, 서대문, 프랑스영사관에 이르러 일부는 미국영사관, 대한문 앞, 소공동, 충무로(本町)를 거쳐 종로통, 동아연초회사, 동대문으로 향했다.

 그날 대한문 앞 광장에는 광무황제의 돌연한 죽음을 애도하는 각도의 유생들이 엎드려 곡하는 것을 많은 남녀노소들이 운집하여 지켜보고 있었다. 파고다공원의 시위대열에 앞서 검은 제복을 입은 학생들이 2, 3명씩 조를 지어 먼저 달려오더니 군중들 속으로 흩어져 들어가 모자를 벗어 들고 열변을 토했다. 학생들을 에워싸고 있던 군중들이 독립만세를 높이 외치자 금방 군중 전체에 전파되어 만세소리가 대한문 광장을 뒤흔들었다.629) 윤백남,<3·1운동발발 당일의 인상>(≪신천지≫1-2, 1946), 118∼119쪽. 상인들은 점포를 철시하고 뛰쳐 나오고, 因山을 구경하러 시골에서 상경한 유생들, 평안도 수건을 쓴 부녀자들, 백립을 쓴 노인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가담하여 몇 십만의 인파가 서울 거리마다 넘쳐났다. 대열은 동서남북으로 나누어 각국 영사관, 일제 주요 기관 등을 누비며 나갔다. 행렬은 꼬리를 물었고, 대열마다 한번씩은 덕수궁 정문 앞에 당도하여 대한문 안으로 몇 걸음 들어가서 황제의 빈전을 향하여 절하고 물러갔다. 해가 질 때까지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였다.630) 최은희, 앞의 책, 18쪽.

 ≪조선독립신문≫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지하신문과 격문들이 시가에 배포되었다. 이날 전주에서 상경하여 서울 시가지 시위광경을 목격한 한 사람은 당시의 시위광경을 이렇게 기록으로 남겼다.

그때 인심은 극도로 동요되고 학생은 교복을 벗고 白衣에 흰 헌팅을 쓰고 서로 만나는 대로 인사 뿐이요, 말은 하나도 건네지 않고 이처럼 학생들의 鬪意는 불타고 있었다. 거리의 긴장은 무서웠고, 독립신문을 비롯한 비밀신문이 무려 수십 종이 발행되어 돌며, 거리마다 만세성이 물끓듯 적이 컸는지라. 일경은 말을 타고 3尺 가량이나 되는 철망치를 휘두르며, 소방부는 몽둥이를 들고 발광하듯이 우리 동포를 사상케 하였고, 거리며 동리 어구마다 변장한 倭警이 서서 加害를 하니 그 수 不知其數라. 그럴수록 민심의 타는 애국의 至情은 더욱 더 고양의 일로를 달릴 뿐이었다(유병민,<내 삼일운동의 기록>,≪신천지≫1-2, 1946, 112∼113쪽).

 시위대가 지나가는 길목마다 시민들이 합세하여 함께 만세를 불렀다.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이었던 崔恩喜 여사는 그 광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독일 영사관에서 회정하여 의주통을 지나갈 적에는 길가에 냉수동이가 즐비하게 놓이고, 평양수건을 쓴 할머니들이 지켜서서 바가지로 물을 떠 주다가 바가지째 두 손을 번쩍 들고 만세를 부르던 것이 퍽 인상적이었다. … 우리 일대는 거기서 숭례문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돌아 진고개 골목으로 들어섰다. … 샐 틈이 없는 좁은 골목이라 본정 2정목에 이르러서부터는 몽땅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일제 상가가 모두 떨쳐 나와 협력하였다. … 수갑이나 포승을 사용할 겨를이 없었다. 헌병들은 양편 손에 한 사람씩 손목을 잡고 남산 밑에 있는 경무총감부로 연행해 갔다. 군중들은 끌려가는 길에서도 힘차게 만세를 불렀고, 총감부 마당에 꿇어앉은 사람들도 새 사람이 잡혀 들어올 적마다 마주들 바라보며 만세를 불렀다(최은희,≪조국을 찾기까지≫中, 탐구당, 1973, 100 ∼101쪽).

 3월은 해가 짧아 일찍 어두워졌다. 저녁 7시까지 서울 중심가에서는 시위운동이 일단 끝났으나 밤 8시 경 마포전차 종점에서 전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여 약 1,000명의 사람들이 모여 만세시위를 하였고, 밤 11시 경에는 신촌 연희전문학교 부근에서 학생 약 200명이 집결하여 시위를 하였다.631)≪警務日次報告≫제3보.

 일제 총독부는 서울 중심가의 군경을 총동원하는 한편, 용산의 일본군 보병 3개 중대와 기마병 1개 소대를 시위해산에 투입하였다. 일제는 평화적인 학생, 시민들의 시위에 손을 쓸 방법을 몰라하다가 해가 저물고 난 뒤부터 경찰·헌병·군인들이 일본 진고개 상점가 점원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그곳을 통과하는 시위대원들을 모조리 검거했다. 이 날 134명이 검속되었다.

 서울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이 시작된 같은 날에 평양·진남포·안주·의주·선천·원산에서도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이들 지역에 사전에 천도교측과 기독교측에 의해<독립선언서>가 배포되었고, 사전 조직화 작업이 진행되었기 때문이었다.

 평양에서는 오후 1시부터 예수교 감리파와 장로파 신도들이 광무황제 奉悼會를 거행한 후 갑자기<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에 관한 연설을 한 후 시위행진에 들어갔다.

 진남포에서는 오후 2시 예수교회에 기독교인 및 학생 약 130여 명이 모여 ‘조선독립만세’라로 쓴 큰 깃발을 앞세우고<독립선언서>를 뿌리며 만세를 부르며 시가행진을 하였다. 정주에서는 기독교인 300∼400명이 집합하여 오후 5시 경<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독립에 관한 연설을 시작하였다. 평안북도 선천에서는 예수교 소속 성신학교 생도 수백 명이 오후 2시<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연호하며 시위행진을 하며 경찰서와 군청에 쇄도하였다. 함경남도 원산에서는 오후 4시 경 약 500명이 악대를 선두에 세워 일본인 시가를 행진했다. 조선인 거리에서는 약 2천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독립에 관한 연설을 하였으며, 일경이 쉽게 해산시킬 수 없어 일본인 소방부들과 재향군인회까지 동원하였다.632) 국회도서관,≪한국민족운동사료≫(3·1운동편 3, 1979), 3쪽.

 이렇게 서울의 파고다 공원에서 시작된 독립만세 시위운동은 위의 7곳에서 이에 호응하여 동시에 점화되었으며, 3월 2일에는 함흥·해주·수안·황주·중화·강서·대동 등지에서 시위운동이 계속해서 일어났고, 3일에는 충남 예산·개성·사리원·수안(재)·송림·곡산·통천 등지에서 일어났다. 이처럼 3·1운동은 서북지방과 경기·충청지방을 시작으로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가 5월까지 계속되어 민족 최대의 독립운동으로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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