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Ⅲ. 3·1운동
  • 2. 3·1운동의 전개
  • 2) 3·1운동의 발발
  • (3) 국내의 만세시위운동

가. 서울의 시위운동

 3월 2일 정오 서울 종로 네거리에서 400명의 군중이 모여 만세를 부르며 종로경찰서 앞으로 나아갔다. 일경이 지휘부 약 20명을 체포하였다. 이들 중 다수는 노동자였고, 다수의 학생들도 참여했다. 이날은 일요일이며 황제의 국장례를 하루 앞두고 있어서 오후 4시까지 시내에서는 시위운동이 없었으나, 각 지방에서 국장배관을 위해 입경한 사람들이 수 만에 달하여 시내의 혼잡이 극에 달해 있었다.633) 국회도서관,≪한국민족운동사료≫(3·1운동편 3, 1979), 8쪽. 밤 11시 반 경 세브란스병원 사무원 鄭泰榮이 독립운동을 끝까지 하자는 경종을 울리기 위해 보신각에 들어가 종을 계속 울렸다.

 3월 3일은 광무황제 장례날이었다. 大輿가 덕수궁에서 장례식장인 훈련원(동대문 운동장)으로 향하는 종로거리에는 수십 만의 군중이 운집하여 지켜보았으나 이날은 시위운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내에는≪조선독립신문≫제2호·≪독립창가≫·≪국민회보≫·≪경고 아이천만동포≫등 지하신문과 격문들이 시내 도처에 살포되었다.

 3월 5일 서울역 앞에서 학생단이 주도하는 대규모 시위운동이 있었다. 오전 8시부터 각급 학교 학생들과 시민들이 서울역 앞에 집결하기 시작하여 9시경에는 수만 명의 대군중을 이루었다. 구동색 한복 두루마기를 입은 연희전문학교생 강기덕이 인력거를 타고 나타나 “朝鮮獨立”이라고 크게 쓴 깃발을 휘날리며 “조선독립만세”를 높이 외쳤다. 군중이 이에 호응하여 함께 독립만세를 높이 불렀다. 여학생들은 감격에 겨워 울음바다를 이루었다. 뒤이어 흰색 한복 두루마기를 입은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생 김원벽이 “조선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휘날리며 인력거를 타고 나타나 군중의 선두에 섰다. 선두의 강기덕과 김원벽의 지휘에 따라 일제히 독립만세를 부르며 남대문으로 향했다. 학생 중에는 붉은 헝겊을 팔에 두른 자도 있었고,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나아갔다. 남대문에서 경찰관헌의 제지를 받아 강기덕·김원벽 등이 체포되었다. 그러나 시위대는 경찰 저지선을 뚫고 남대문 시장으로 해서 조흥은행, 종로 보신각으로 향했으며, 다른 1대는 남대문에서 대한문 앞 무교정을 지나 보신각에서 합류하여 행진을 하며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634)<김형기 등 예심종결결정서>.
최은희, 앞의 책, 113쪽.
국회도서관,≪한국민족운동사료≫(3·1운동편 3, 1979), 13쪽.

 3월 5일의 제2차 시위 이후 서울에서의 시위운동은 각계각층으로 확산되고, 다양한 방법으로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각종의 격문들이 시중에 살포되는 가운데, 상인들은 철시하고, 공장의 노동자·고용인·행상인·일반 서민들이 시위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상인들은 3월 1일부터 대부분 철시에 들어가 8일에는 완전철시, 시위운동에 참여를 결의하여 3월말까지 완전철시에 들어갔다. 당황한 일제는 상인 대표 60명을 초청하여 수 차례 개점을 설득하였으나 거부되자 4월 1일부터 경찰을 동원하여 강제 개점을 시켰으나, 큰 효과가 없었다.

 3월 8일 오후 6시 서울 용산의 조선총독부 인쇄소 노동자 20명이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야간작업을 위해 남아 있던 200명의 노동자들이 시위운동을 벌여 주동자 19명이 일경에 구속당하였다. 이튿날인 9일 오전 10시 30분 서울의 전차회사 차장과 운전수 120명이 동맹파업을 단행하여 전차운행이 중단되었다. 이 파업은 3월 29일까지 20일간 진행되어 시내교통이 마비되었다. 3월 9일 12시에는 동아연초회사 소년노동자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운동을 개시하였다. 10일에는 서울 시내 각 회사의 노동자들이 동맹파업에 들어갔다. 종로 4가에서는 노동자들의 시위운동이 있었다. 노동자들의 동맹파업은 계속되어 15일 노동자들이 출근율은 10%에 불과하였다.

 탄압이 가중되는 속에서도 22일 봉래동에서 노동자 약 300명이 태극기를 세워놓고 노동자대회를 열고 만세시위를 벌였다. 부근의 시민들이 합세하여 군중은 800여 명으로 불었다. 이로부터 27일까지 서울 시내에서는 크고 작은 시위운동과 전차 파괴운동이 일어나 서울 시위운동이 다시 한 번 최고조에 달했다.

 3월 5일의 독자적인 제2차 시위운동을 전개하여 많은 학생 지도부가 검거되고, 학교의 휴교조치로 학생들의 시위운동 확산에 한계를 맞게 되자 12일 서울 종로의 보신각 앞에서 文一平 같은 지식인, 金百源·車相晉 등 기독교 목사, 柳濬根·白觀亨 같은 유림이<12인 등의 장서>(일명 ‘哀願書’)를 낭독하며 제2의 독립선언을 시도하였다. 이들은 꺼져가는 운동의 불씨를 되살리려고 하였던 것이다.635) 이정은,<3·1운동기 12인 등의 장서>(≪한국독립운동사연구≫13, 1999).

 청년·학생들은 시위운동의 대중화를 위하여 지하 유인물의 제작 배포와 지방에의 시위운동 전파, 민중세력과 연대 확대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조선독립신문≫의 발행이었다. 처음 이 지하신문은 천도교 이종일의 지시하에 2월 28일 보성전문학교 교장 尹益善의 명의로 발간되어 3월 1일 시중에 배포되었다. 이종일과 윤익선 등이 체포되자 천도교 李鍾麟과 경성서적조합 서기인 張悰鍵이 제2호부터 4호까지 발행을 이어 받았으며, 이종린이 체포되자 경성전수학교생 최치환·임승옥·최기성·강봉두의 도움을 받으며 장종건이 9호까지 발간하고 구속되었다. 장종건이 구속된 이후 학생들이 전적으로 이 지하신문의 발간을 도맡아 보성고보 4년생 장채극, 3년생 이철 등으로 조직화하고, 4, 5일 만에 한 번씩 이를 인쇄 발행하여 4월 26일 제27호까지 발행하였다. 그 후에도 누군가의 손에 의해 그해 8월 하순 제43호까지 이어져 왔던 것이 확인된다. 이외에도≪국민회보≫·≪각성회 회보≫·≪반도의목탁≫등 수백 종의 지하 신문과 유인물들이 확인되는데 이러한 청년·학생들의 선전활동은 이 운동을 대중화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636) 이정은,<3·1운동기 청년 학생층의 선전활동>(≪한국독립운동사연구≫7,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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