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Ⅲ. 3·1운동
  • 3. 3·1운동의 해외 확산
  • 2) 러시아 연해주
  • (5) 국내진공 계획과 노인동맹단의 독립운동

가. 국내진공작전

 국내에서 3·1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소식은 재러동포들에게 오래 기다리던 고국의 독립쟁취의 일대 기회가 왔다는 확신을 가지게 하였다. 이에 따라 무장독립투쟁을 통한 국내진공을 위하여 군자금의 모금과 더불어, 훈춘에서는 두만강을 건너기 위한 목선 3척이 건조되고 1,000명의 무장병력이 조직되었다.675)<獨立運動에 關한 件>, 騷密제551호(1919년 4월 20일)(國會圖書館,≪韓國民族運動史料≫3·1운동편 其3, 1979), 306∼307쪽. 니콜리스크에서도 柳東說·曺成煥·朴殷植·申采浩·金夏錫 등이 집합하여 독립운동에 관한 회의를 열어 여러 곳에 연락하여 대운동을 전개함과 동시에 일본과 무력으로 결전에 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결론을 내리고 맹렬히 동지의 규합에 노력하였다.676)<獨立運動에 關한 件>, 騷密제673호(1919년 4월 22일)(國會圖書館,≪韓國民族運動史料≫3·1운동편 其3, 1979), 317쪽.

 4월 24일에서 26일까지 노령의 이동휘·이범윤과 삼차구의 秦學新 등이 훈춘현 탑도구를 방문하여 대한국민의회 지부를 설치하고 국내진공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결의했다.

① 국내진공계획은 프랑스 파견 대표들의 전보를 기다려 만약 강화회의에서 한족독립운동이 일부 조선인들의 망동이라고 하고 돌보지 않는 경우에 곧 결행할 것.

② 이 행동은 집정관인 이동휘의 명령에 의해 각 방면 동시에 결행할 것.

③ 조선 국내동지들과 연락하여 일본측 밀정 등을 암살할 것.

④ 운동원 및 대원 모집에 노력할 것(<獨立運動에 關한 件>, 騷密제1473호(1919년 5월 3일), 國會圖書館,≪韓國民族運動史料≫3·1운동편 其3, 1979, 475쪽).

 그 후 이동휘는 연추방면 칸내이와에 귀환하여 그곳에 국민의회 본부를 설치하기로 하였다.677) 위와 같음.

 4월 28일 밤 崔才亨·吳昌煥·金學萬이 嚴仁燮의 집에 모였을 때 장정의 수는 3,000명에 이르렀고, 독립군 자금모금액도 30만 루불에 달하였다. 이들은 국내에서의 3·1운동이 확산되고 있으나, 무기를 갖지 않은 군중의 폭동에 불과하여 외국이 이를 단순히 국내 擾亂으로 인정할 가능성이 많다. 그러므로 그 효과는 파리평화회의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정도가 고작일 것이다. 이런 정도로는 독립부흥의 목적을 달성하기에는 길이 멀다. 따라서 무기를 가지고 일본에 對戰하여 열국으로부터 한 交戰團體로 승인될 때까지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고 있었다.678)<獨立運動에 關한 件>, 騷密제2042호(1919년 5월 14일)(國會圖書館,≪韓國民族運動史料≫3·1운동편 其3, 1979), 4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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