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근대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Ⅲ. 3·1운동
  • 3. 3·1운동의 해외 확산
  • 3) 미주

3) 미주

 1919년 3월 9일 샌프란시스코의 안창호는 상해 현순 목사로부터 3·1운동의 제1보를 들었다. 그는 이승만·정한경, 대한국민회 각 지방회와 서재필 등에게 이 소식을 전파하였으며 샌프란시스코의 영자신문에도 전보 복사문을 돌렸다.

 오후 7시 30분 대한국민회중앙총회가 한인교회에서 열리자 만세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이 자리에서 이승만·정한경을 파리 평화회의에 대표로 파견할 것, 미국 각 교계와 단체에 교섭하여 대한독립에 대한 동정을 얻을 것 등을 결정하였다. 하와이 국민회에서도 현순 목사로부터 독립운동의 발발소식을 전해받고 한인교회에 600명이 모여 감격의 만세를 불렀다. 3월 13일 안창호는 대한국민회 중앙총회 석상에서 첫째 피를 흘릴 각오를 할 것, 둘째 미주 한인의 책임은 미국 여론을 일으키는 것임, 셋째 미주 한인의 최대 책임은 재정공급에 있으므로 수입의 1/20 이상 납부하도록 할 것 등을 선포하였다. 김정진은 63일에 걸쳐 서부 10개 주를 순방하며 63개 지방 동포 327명으로부터 의연금 1만 달러 이상을 모았고, 5월 26일까지 중앙총회는 3만 388달러 25센트를 모았다. 당시 한인들의 하루 임금이 3달러밖에 되지 않던 때였다. 주간으로 발간하던≪신한민보≫는 3월 20일부터 격일간으로 발간하며 고국소식을 신속하게 보도하기 시작하였다.

 4월 14일부터 16일 필라델피아(Philadelphia) 시내 리틀극장에서는 자유한인대회가 열렸다. 약 150여 명의 한인과 미국인 목사, 신부, 유대교 랍비, 대학총장이 참석하였으며, 서재필이 의장을 맡아 한민족의 독립 의지와 일제의 억압과 착취의 실상을 알리며, 한국독립에 대한 미국의 여론을 환기하였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하고 충성을 선언하며, 각국에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하였다. 서재필은 그 동안 한국민족에 대해 실망을 갖고 있었으나, 3·1운동의 발발을 보고 생각을 바꾸어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나섰다. 그는 자신의 주관하에 한국통신부(Korea Informatiom Bureau)를 조직하여 미국사회에 한국 실정을 알리고 여론의 지지를 이끌어 내는 일에 착수하였다. 그는 우선 각종 선전 자료로서≪한국평론(Korea Review)≫·≪필라델피아 대회 의사록≫·≪한국의 독립≫·≪한국의 어린 만세 순교자들≫·≪한국에서의 일본의 흉포≫·≪한국의 독립운동≫등을 간행하였다.

 한편 1919년 여름 미국 기독교 연합회 동양선교부에서≪한국의 사정(The Korean Situation)≫이 발간되어 한국의 독립운동에 대한 일본의 잔인한 탄압의 실상이 공개되었다. 이 보고서는 한국 독립 문제에 대한 미국 기독교계의 관심을 환기시켰을 뿐 아니라 우리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힘을 주었다.

 서재필은 또한 한국친우회(The League of the Friends of Korea)를 조직하여 다수의 미국 유지로 간부진과 이사진을 구성하여 한국의 실정을 미국사회에 효과적으로 알리기에 힘썼다. 이 친우회에서 각 지방으로 대표를 파견하여 한국의 실정을 알리고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성명서를 채택하게 하였으며, 각지에 지부를 결성하여 회원이 1만 명에 다다르게 되었다.

<李廷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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